지난달 31일 광주광역시 광산구 하남동 71번지 김봉호 가옥(광주시 문화재자료 제25호)에서 만난 김형(71)씨가 아버지의 일기장이 있는 책장 앞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정대하 기자
오래된 일기가 빼곡히 꽂혀 있었다. 66년 동안 하루도 빼지 않고 기록한 일기장이 72권이나 된다. 일기엔 지금은 사라진 공출미 이야기며 논물 대기, 경지정리 등 생활 풍속사가 오롯이 담겨 있다. 단골 이발소에서 치르던 이발값과 농사일을 거든 인부들의 품삯이 어떻게 변했는지도 알 수 있다. 아내와 지인의 병환과 죽음을 본 소회도 적혀 있다. “오늘 논 물 개치기 시작했다. … 그리고 술진논 자근(작은)다랭이 벼 비기(베기) 시작. 가족들은 목화 대뽑기 했다.”(1958년 10월24일)
한자 일기는 어느 순간 한글로 바뀐다. 일기장 각 권 맨 앞장엔 날짜별로 무엇을 기록했는지를 목록화했다. 1952년 10월24일부터 시작된 일기는 지난해 10월23일로 끝났다. 일기의 주인공 김봉호(1928~2018)씨는 작년 11월 세상을 떴다. “나는 종일 아무일 없이 지냈다. 오후에 형(장남의 이름) 내외가 와서 일 봐주었다. 오늘 광산구 구보 신문사 직원이 와 집안 삭삭이(샅샅이) 찰령(촬영) 취제(취재)해가고 나의 사진도 찍어 같아(갔다). 오늘 형(장남)의 재자(제자)가 차저(찾아) 오기도 했다. 반가웠다.”(마지막 일기)
“아버지의 별호가 ‘반듯이’였어요. 무엇이든 반듯, 반듯해야 하는 분이셨어요.”
지난달 31일 광주광역시 광산구 하남동 71번지 김봉호 가옥(시 문화재자료 제25호)에서 만난 김형(71)씨는 일기를 꺼내며 아버지를 회고했다. 그는 고인이 오랫동안 일기를 썼던 것은 ‘성품’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봤다. 대문 옆엔 지금도 우편으로 온 부고장 등이 가지런히 묶여 있을 정도다. 논 경지정리도 정부에서 시작하기 전에 끝냈다. 묘지의 비석조차 높낮이를 맞출 정도로 대충 하는 게 없는 분이었다. “이런저런 일이 많을 땐 한장을 채우기도 하셨고, 아닐 땐 몇줄로 끝내기도 하셨죠.”
일기의 주인공 김봉호씨가 작고 직전인 지난해 10월 맏아들 김형씨와 한옥 마당에서 마지막 기념사진을 찍었다. 광주 광산구 제공
고인은 ‘정리의 달인’이자 ‘기록의 명인’이었다. 1997년 박래욱(1938년생)씨가 1950년부터 쓴 일기는 ‘생존한 개인의 가장 오래된 일기’로 한국기네스인증서를 받은 바 있다. ‘김봉호의 일기’는 아들 김씨가 이어 쓰고 있다는 게 특징이다. 고인은 생전 아들 김씨에게 “일기를 물려주고 싶다”고 했다. 아들 김씨는 아버지 권유로 2014년부터 일기를 쓰고 있다. 아버지의 일기는 때론 꼬인 갈등을 푸는 열쇠가 됐다. “땅을 실제로 매매하지 않고 지인에게 살도록 했는데 세금이 나왔어요. 아버지가 세무서를 찾아가 일기장에 적힌 내역을 보여주며 소상하게 설명해 정상적으로 처리됐지요.”
부친 김봉호 선생 52년부터 시작
지난해 일기 72권 남기고 별세
‘공출미 이야기’ 등 사료 가치도
“부친 뜻 따라 6년째 이어 쓰는 중”
부친 지은 한옥은 시문화재 지정
연 8회 ‘농가의 사계’ 문화공연도
고인은 해방 전 광산 송정리에 있던 5년제 공업학교를 나와 대구의 한 광산에서 근무했다.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되자 조부는 객지에 있던 아들을 찾아가 함께 귀향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기차를 타고 오던 중 터널에서 기차 밖으로 밀리는 사고를 당했다. 이때부터 평생 왼손에 의수를 했다. 김씨는 “이때부터 아버지는 세상에 나가는 것을 접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한때 조선대 공학부 광산학과로 편입했으나 졸업하지 않았다. 그리고 40여 마지기의 논에서 농사에만 매달렸다. 한 손으로 일하는 아버지는 유능한 농사꾼이었다. 3남 1녀를 둔 그는 농사를 지어 동생 2명까지 대학에 보냈다.
고 김봉호(1914~2018)씨는 1952년 10월24일부터 2018년 10월23일까지 66년 동안 하루도 빼지 않고 일기를 썼다. 정대하 기자
고인은 1940년대 지은 한옥을 지극하게 아꼈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 경암마을 일대에 새도시 개발 바람이 불었다. 엘에이치공사는 광산구 하남 일대에 대규모 택지개발에 나섰다. 김씨는 “아버지께서 손때 묻은 집이 허망하게 헐린다는 것을 견디기 힘들어하셨다”고 했다. 고인은 2000년 초 고재유 당시 광주시장을 찾아가 문화재 지정을 의뢰했다. 문화재자료로 지정되면 경제적으로는 손실이었지만, 가치를 좇았다.
김봉호 가옥은 2000년 5월 광주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됐다. 2645㎡(800평) 규모의 전형적인 농촌 가옥이다. 광주시 문화재위원들은 “안채는 공간의 배치, 재료의 짜임이 뛰어나고 큰 다락이 있어 주목된다”고 평가했다. 안채 대청엔 ‘공루’로 불리는 다락으로 올라가는 나무 계단이 있다. 김씨는 “공루가 큰방~대청~건넌방 3칸 규모인 것이 특징이다. 여름에 작은 문을 열면 바람이 시원한 공간”이라고 했다.
2000년 5월 광주시 문화재자료 제25호로 지정된 김봉호 가옥엔 대청 위에 큰 다락(공루)이 있다. 정대하 기자
‘김봉호 가옥’은 도심 고층 건물 사이에서 숨통을 틔워주는 문화공간으로 변신해왔다. 광주 광산구는 2015년부터 여기서 ‘농가의 사계’라는 문화공연을 연 8회 정도 연다. 옆에 조성된 경암근린공원과 묶어 매년 ‘가옥 이야기 축제’가 열린다. 하지만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한옥 관리는 만만치 않은 일이다.
전교조 활동을 하다가 해직·복직을 거쳐 중학교 교사로 퇴직한 김씨는 “아내와 자주 와서 집을 보살피려고 해도 사랑채가 너무 비좁고 불편해 아쉽다”고 말했다. 광산구는 일단 올해 문화재자료 지정에서 제외됐던 사랑채의 슬레이트 지붕을 교체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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