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는 대개의 경우 나의 명령을 수행해주는 기기이지만 때때로 나에게 반강제적인 요구를 해오기도 한다. “비밀번호를 변경하세요”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그 필요성을 익히 알고 있음에도 비밀번호를 변경할 때마다 이제 내가 기억할 수 있는 비밀번호의 가짓수가 한계에 다다랐다는 딜레마에 빠진다.
기기마다, 플랫폼마다, 계정마다 각기 다른 비밀번호를 설정하고 주기적으로 변경할 것을 권장한다. 하지만 여러 개의 비밀번호를, 그것도 특수문자와 대문자를 포함하고 생년월일과 무관하며 연속성이 없는 최소 8자 이상의 글자 조합을 외우는 것은 좀체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컴퓨터 앞에 적어 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기존에 사용한 적이 없으면서도 잊어버리지 않을 만한 비밀번호의 조합을 만들어내는 것은 이제 창의성의 영역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해외 보안 전문 업체의 발표에 따르면, 2020년에 가장 많이 사용된 패스워드는 ‘123456’이다. 2019년 1위는 ‘12345’였으니, 겨우 숫자 한 자리가 늘어났을 뿐이다. 2위는 ‘123456789’, 4위는 무려 ‘password’다. 비밀번호 입력을 통해 접근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은 점점 방대해진다. 과거에는 메일 수신함 정도였다면, 이제는 핸드폰의 사진과 문자 기록, 계좌 정보와 같은 긴밀한 개인 정보까지 접근이 가능하다. 그리고 앞에서 열거한 비밀번호를 전문 해커가 풀어내는 데는 1초의 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다.
박물관의 어린이융합워크숍 첫 과정에서는 컴퓨터 보안의 중요성을 다룬다. 악당 해커가 박물관을 지키는 로봇들을 마음대로 조종해서 소장품을 고장내고 있는 상황을 가정하면, 아직 초등학교 입학 전인 어린이들이 마치 제 일이라도 된 것처럼 온 신경을 집중해서 대응 방법을 찾아낸다. 그 과정에서 방화벽을 설치하고, 백신을 업데이트하고, 비밀번호의 복잡도를 높여 스스로 안전을 지켜낼 수 있다는 점을 체득하게 된다.
몇 년 전, 수업이 끝나고 한 어린이가 선생님께 질문을 던졌다. “해녀도 해커에요?” 제주에 사는 어린이에게는 해녀라는 단어가 해커와 매우 비슷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혹은 컴퓨팅 환경 속에서 데이터를 캐는 해커를 바다 속에서 해산물을 캐는 해녀에 비유한 것일까. 뭐가 되었든 바다를 지켜야 바다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보안을 지켜야 안전하게 컴퓨터를 사용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느꼈다면 단어를 좀 혼동하는 것이 무슨 대수인가 싶다.
혹시 지금 사용 중인 비밀번호가 얼마나 안전한지 확인하고 싶다면 검색창에 ‘나의 비밀번호는 얼마나 안전한가?(How Secure Is My Password?)’를 검색해보라. 만약 1일 이내에 풀리는 비밀번호를 사용하고 있다면 특수문자 하나만 추가해도 해킹 시간을 훨씬 늘릴 수 있다는 점도 꼭 확인해 보면 좋겠다.
최윤아 ㅣ넥슨컴퓨터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