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 관람을 오는 어린이들은 플로피디스크를 모른다. 픽사베이
2021년 새해가 밝았다. 새해가 되면 탁상 달력에 열두 달의 주요한 일정부터 적어 본다. 대체로 주변인들의 생일, 집안 기념일, 병원 가는 날 등 매월 혹은 매년 반복되는 일들이다. 물론 이미 몇 해를 같이한 스마트폰에 대부분의 일정이 담겨 있지만 굳이 달력에 해야 할 일들을 적는 버릇은 올해도 계속된다.
1970년대 중반, 개인용컴퓨터(PC)가 등장하면서 공학용 계산을 위한 도구였던 컴퓨터는 사적 기록을 담을 수 있는 저장소가 되었다. 이후 컴퓨터가 우리의 일상에 가장 긴밀한 매체로 자리잡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과거에는 피시에 뭔가를 기록하기 위해 플로피디스크를 주로 사용했다. 3.5인치 2HD 디스켓에 1.44메가바이트가 담긴다. 오늘날 주로 사용하는 테라바이트 단위의 하드디스크나 SSD에 비하면 수십만분의 1에 불과한 용량이다.
박물관 관람을 오는 어린이들은 플로피디스크를 모른다. 전시된 플로피디스크를 마치 오래된 유물인 것처럼 설명하다 보면 묘한 기분이 들곤 한다. ‘저장’을 표현하는 아이콘이 3.5인치 플로피디스크의 모양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이 디스켓에 최신 스마트폰으로 촬영하는 사진 한 장도 채 저장할 수 없다는 것은 그들에게 매우 낯선 사실이다. 그런 디스켓 한 장으로 프로그램을 구동하고, 게임을 하고, 온갖 과제물까지 저장했던 80~90년대 학번들의 일상과 비교해보면 약 30년 사이에 천지가 개벽한 느낌이다.
디지털 저장장치는 무척 빠르게 발전해왔다. 그러나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 저장 용량이 데이터의 영속성까지 담보하지는 않는다. 안전한 매체일 것이라 기대하는 콤팩트디스크(CD)도 보통 10년이 넘어가면 데이터의 손실이 발생할 수 있다. 외장 하드디스크는 수명이 더 짧은 편이다. 클라우드 시스템은 서비스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다. 얼마 전 싸이월드 서비스가 종료되고 그 안에 담긴 추억을 함께 떠나보내며 사람들은 웹에 저장한 정보의 덧없음을 쓸쓸하게 경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디지털 저장의 기능적 한계 때문에 해마다 달력에 일정을 적고 메모를 남기는 것은 아니다. 새해 일정을 달력에 써넣으며 작년에 잘 챙기지 못한 사람들에게 미안함을 전하기도 하고, 올 한 해 꼭 해야 할 일들을 되새겨 보기도 한다. 이건 일종의 습관이며 수십 년간 이어져 온 의식과도 같다. 지금은 많은 공간이 비어 있는 이 작은 탁상 달력이 연말이 되면 빽빽하게 적힌 일정과 메모들로 나의 한 해의 기록으로 저장될 것이다.
그렇다면 태어나면서부터 ‘잼잼’보다는 ‘드래그’로 손가락 움직임을 배운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에게 ‘찐’ 저장장치는 무엇일까? 요즘 MZ세대에게 유행하는 저장장치는 바로 ‘다꾸’(다이어리 꾸미기의 준말)다. 다이어리에 하나하나 일정을 적고, 그림을 그리고, 스티커를 붙여가며 한 해의 기록을 남기고 저장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에게 다이어리가 나의 탁상 달력과 다르지 않다. 세대와 상관없이 여전히 우리 모두에게 ‘찐’ 저장장치는 촉감과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종이인지도 모르겠다.
최윤아 ㅣ 넥슨컴퓨터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