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영광원자력발전소 안팎에 설치된 ‘원전 중성미자 진동변환상수 측정 실험’(RENO) 장치. 원자로에서 나온 중성미자가 원통형 아크릴에 채워진 16t의 액체섬광체를 통과하면 2개의 검출기에 설치된 708개의 광센서(광중배관)들이 그 신호를 감지한다. 연구팀은 3월 검출기를 가동해 물질세계의 또 하나의 비밀을 찾아나설 예정이다. 한국중성미자연구센터 제공
선도연구센터 ‘외길 20년’ ① 한국중성미자연구센터
전자중성미자→뮤온중성미자 변환상수 측정
외국팀 더부살이 끝내고 3월부터 실험기 가동
연구팀 “2014년께 학계가 주목할 논문 낼 것” 1990년 정부와 한국과학재단(현 한국연구재단)이 각 대학의 우수 연구인력을 모아 선도적인 과학자그룹으로 육성해 우리나라 기초과학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는 목적으로 선도연구센터 지원을 시작한 지 20년이 됐다. 그동안 200여개의 연구센터들이 모두 1조1천여억원의 연구비를 지원받아 숱한 성과들을 일궈냈다. 현재도 102개의 센터들이 과학기술 발전의 밑동이 될 진리 탐구에 힘을 쏟고 있다. 선도연구센터 세곳을 차례로 찾아 어떤 연구들이 이뤄지고 있는지 살펴본다.
“이제 더부살이 셋방 신세를 벗어나 내집에 입주를 하는 겁니다. 우주 생성의 마지막 비밀을 밝히는 데 다른 나라 경쟁 연구팀보다 한발 앞서나갈 수 있게 됐습니다.”
서설이 내린 지난달 30일 서울대 자연과학대학 건물 4층 연구실에서 만난 김수봉(51·사진) 물리천문학부 교수(한국중성미자연구센터 소장)는 상기된 표정이었다. 실험에 쓰이는 용액 500㎘가 예고도 없이 갑자기 배송돼 아침 일찍부터 혼자 부산을 떨어서라 했다. 연구원들은 연말임에도 ‘원전 중성미자 진동변환상수 측정 실험’(RENO) 장치가 설치된 전남 영광원자력발전소 내 연구시설에 모두 내려가 있었다. 김 교수는 목소리에도 흥이 들어가 있었다. 그는 “오는 3월이면 만 4년 동안의 간난신고 끝에 중성미자 검출기가 가동에 들어간다”며 “3~4년 먼저 시작한 다른 나라 연구팀들을 제치고 가장 먼저 실험에 착수하게 됐다”고 말했다. 연구팀이 설치한 실험 장치는 중성미자의 성질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다. 우주를 구성하는 것으로 밝혀진 12개 소립자에는 전자·뮤온·타우중성미자 등 세 종류의 중성미자가 들어 있다. 이들은 질량이 거의 없어 우리 몸을 뚫고 지나가면서도 아무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신비로운 소립자다. 또 서로 몸체를 바꾸는 변화무쌍한 입자들이다. 과학자들은 중성미자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아냈지만, 전자중성미자가 뮤온중성미자로 탈바꿈하는 비율 곧 진동변환상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 측정해내지 못했다. ■ 내집 마련의 꿈 1998년 뮤온중성미자가 타우중성미자로 바뀌는 현상이 일본 가미오카의 지하수조 실험장치 ‘슈퍼가미오칸데’에서 처음 관측됐을 때 한국 연구팀도 자체 제작한 전단전자기판으로 데이터 분석을 맡았다. 이 연구로 일본팀은 노벨상까지 받았다. 일본은 2000년대 초 전자중성미자가 뮤온중성미자로 바뀌는 현상을 관측하기 위해 2조원짜리 양성자가속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 사업(제이-파크)에도 우리 연구팀이 참여하고 있지만 ‘더부살이’ 연구일 뿐이다. 한국 연구자들에게 ‘내집 마련’의 꿈을 준 것은 2003년 세계 입자물리학자들이 제안한 새로운 측정 방법이었다. 학자들은 원자력발전소 옆에 2개의 검출기를 설치하면 중성미자 변환상수를 손쉽게 잴 수 있을 것이라는 백서를 내놨다. 원자력발전소의 원자로 1기에서는 초당 10의 19제곱개(1000억개의 100억배)의 전자중성미자가 나온다. 이것을 원전 근처(300m)에서 한번 측정하고, 멀리 떨어진 곳(1.4㎞)에서 다시 측정해 둘의 차이를 비교하면 얼마나 뮤온중성미자로 바뀌는지 알 수 있다. 전자중성미자가 타우중성미자로 바뀌는 경우는 100㎞ 이상 지나서야 가능하기 때문에 두 지점의 측정값 차이에 영향을 줄 염려는 없다. 프랑스 연구팀은 2003년에 바로 정부로부터 연구비 300억원을 승인받았으며, 중국과 미국도 다음해 300억원씩을 투자해 홍콩 근처의 다야베이 원전에 측정장치 건설을 시작했다. 일본과 이탈리아는 정부 허가를 받지 못해 좌절됐다. 김수봉 교수는 “우리나라에 원자로 6기가 한꺼번에 모여 있는 곳이 울진과 영광원전 두군데나 된다는 사실은 행운이었다”며 “원자로 1기당 2조원씩 따져 12조원짜리 가속기를 이미 보유하고 있는 셈이니, 검출기만 만들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1년여에 걸친 끈질긴 설득에 정부가 2006년 3월부터 100억원의 연구비를 승인해줬다. 경쟁 연구팀들보다 3~4년 늦었지만 세계 2위의 출력을 갖춘 영광원전은 연구팀에 희망이었다. ■ “차라리 물리학이 쉬워” 호사다마라 했던가. 영광원전 쪽은 배출수로 인한 수온 상승으로 주민과 마찰을 빚고 있던 터라 연구팀이 원전 안에 과학시설을 짓고 싶다고 하니 난색을 표했다. 주민을 설득해오면 고려해보겠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주민들이나 환경단체는 중성미자가 방사능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연구시설용 터널이 추후에 방사성폐기물처분장으로 활용될지를 우려했다. 연구시설은 지하 70m밖에 안 돼 폐기장으로 쓸 수 없다고 겨우 설득하고 나니, 이번에는 원전 내 시설을 위한 인허가 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김 교수는 “물리학은 어렵더라도 열심히 하면 조금이라도 이해되고 풀릴 수 있는데 인허가는 상대방의 움직임이 없으면 소용이 없었다”며 “차라리 물리가 쉽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인허가에 1년이 걸렸지만 원자로에서 290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검출기를 설치하게 된 것은 연구팀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프랑스와 중국의 경우 관계당국 허가를 받지 못해 원전 밖 500m에 검출기를 설치해야 했다. 2008년 터널공사가 시작되고, 2009년부터는 검출기가 설치되기 시작했다. 애초 목표는 지난해 말까지 설치를 마치고 올해 1월부터 측정에 들어가는 것이었지만, 외환위기로 치솟은 환율 때문에 일본 광센서의 수입 시기를 늦춰 일정이 다소 미뤄졌다. 연구팀은 올해 3월께면 본격적인 중성미자 측정에 들어간다. 그러나 이것은 또다른 시작에 불과하다. 3년 정도 데이터를 모아 분석해야 중성미자 변환상수가 도출될 수 있다. 변환상수가 2% 이하라면 측정에 실패할 수도 있다. 최소 단위가 2g인 저울로 1g짜리를 잴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이쯤되면 실패는 연구팀이 아니라 ‘신의 책임’이다. 김 교수는 “지금까지 우리 연구팀에 행운이 따랐듯이 2014년께 물리학계가 주목할 논문을 낼 수 있으리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이근영 선임기자 kylee@hani.co.kr
외국팀 더부살이 끝내고 3월부터 실험기 가동
연구팀 “2014년께 학계가 주목할 논문 낼 것” 1990년 정부와 한국과학재단(현 한국연구재단)이 각 대학의 우수 연구인력을 모아 선도적인 과학자그룹으로 육성해 우리나라 기초과학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는 목적으로 선도연구센터 지원을 시작한 지 20년이 됐다. 그동안 200여개의 연구센터들이 모두 1조1천여억원의 연구비를 지원받아 숱한 성과들을 일궈냈다. 현재도 102개의 센터들이 과학기술 발전의 밑동이 될 진리 탐구에 힘을 쏟고 있다. 선도연구센터 세곳을 차례로 찾아 어떤 연구들이 이뤄지고 있는지 살펴본다.
김수봉 교수
서설이 내린 지난달 30일 서울대 자연과학대학 건물 4층 연구실에서 만난 김수봉(51·사진) 물리천문학부 교수(한국중성미자연구센터 소장)는 상기된 표정이었다. 실험에 쓰이는 용액 500㎘가 예고도 없이 갑자기 배송돼 아침 일찍부터 혼자 부산을 떨어서라 했다. 연구원들은 연말임에도 ‘원전 중성미자 진동변환상수 측정 실험’(RENO) 장치가 설치된 전남 영광원자력발전소 내 연구시설에 모두 내려가 있었다. 김 교수는 목소리에도 흥이 들어가 있었다. 그는 “오는 3월이면 만 4년 동안의 간난신고 끝에 중성미자 검출기가 가동에 들어간다”며 “3~4년 먼저 시작한 다른 나라 연구팀들을 제치고 가장 먼저 실험에 착수하게 됐다”고 말했다. 연구팀이 설치한 실험 장치는 중성미자의 성질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다. 우주를 구성하는 것으로 밝혀진 12개 소립자에는 전자·뮤온·타우중성미자 등 세 종류의 중성미자가 들어 있다. 이들은 질량이 거의 없어 우리 몸을 뚫고 지나가면서도 아무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신비로운 소립자다. 또 서로 몸체를 바꾸는 변화무쌍한 입자들이다. 과학자들은 중성미자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아냈지만, 전자중성미자가 뮤온중성미자로 탈바꿈하는 비율 곧 진동변환상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 측정해내지 못했다. ■ 내집 마련의 꿈 1998년 뮤온중성미자가 타우중성미자로 바뀌는 현상이 일본 가미오카의 지하수조 실험장치 ‘슈퍼가미오칸데’에서 처음 관측됐을 때 한국 연구팀도 자체 제작한 전단전자기판으로 데이터 분석을 맡았다. 이 연구로 일본팀은 노벨상까지 받았다. 일본은 2000년대 초 전자중성미자가 뮤온중성미자로 바뀌는 현상을 관측하기 위해 2조원짜리 양성자가속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 사업(제이-파크)에도 우리 연구팀이 참여하고 있지만 ‘더부살이’ 연구일 뿐이다. 한국 연구자들에게 ‘내집 마련’의 꿈을 준 것은 2003년 세계 입자물리학자들이 제안한 새로운 측정 방법이었다. 학자들은 원자력발전소 옆에 2개의 검출기를 설치하면 중성미자 변환상수를 손쉽게 잴 수 있을 것이라는 백서를 내놨다. 원자력발전소의 원자로 1기에서는 초당 10의 19제곱개(1000억개의 100억배)의 전자중성미자가 나온다. 이것을 원전 근처(300m)에서 한번 측정하고, 멀리 떨어진 곳(1.4㎞)에서 다시 측정해 둘의 차이를 비교하면 얼마나 뮤온중성미자로 바뀌는지 알 수 있다. 전자중성미자가 타우중성미자로 바뀌는 경우는 100㎞ 이상 지나서야 가능하기 때문에 두 지점의 측정값 차이에 영향을 줄 염려는 없다. 프랑스 연구팀은 2003년에 바로 정부로부터 연구비 300억원을 승인받았으며, 중국과 미국도 다음해 300억원씩을 투자해 홍콩 근처의 다야베이 원전에 측정장치 건설을 시작했다. 일본과 이탈리아는 정부 허가를 받지 못해 좌절됐다. 김수봉 교수는 “우리나라에 원자로 6기가 한꺼번에 모여 있는 곳이 울진과 영광원전 두군데나 된다는 사실은 행운이었다”며 “원자로 1기당 2조원씩 따져 12조원짜리 가속기를 이미 보유하고 있는 셈이니, 검출기만 만들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1년여에 걸친 끈질긴 설득에 정부가 2006년 3월부터 100억원의 연구비를 승인해줬다. 경쟁 연구팀들보다 3~4년 늦었지만 세계 2위의 출력을 갖춘 영광원전은 연구팀에 희망이었다. ■ “차라리 물리학이 쉬워” 호사다마라 했던가. 영광원전 쪽은 배출수로 인한 수온 상승으로 주민과 마찰을 빚고 있던 터라 연구팀이 원전 안에 과학시설을 짓고 싶다고 하니 난색을 표했다. 주민을 설득해오면 고려해보겠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주민들이나 환경단체는 중성미자가 방사능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연구시설용 터널이 추후에 방사성폐기물처분장으로 활용될지를 우려했다. 연구시설은 지하 70m밖에 안 돼 폐기장으로 쓸 수 없다고 겨우 설득하고 나니, 이번에는 원전 내 시설을 위한 인허가 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김 교수는 “물리학은 어렵더라도 열심히 하면 조금이라도 이해되고 풀릴 수 있는데 인허가는 상대방의 움직임이 없으면 소용이 없었다”며 “차라리 물리가 쉽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인허가에 1년이 걸렸지만 원자로에서 290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검출기를 설치하게 된 것은 연구팀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프랑스와 중국의 경우 관계당국 허가를 받지 못해 원전 밖 500m에 검출기를 설치해야 했다. 2008년 터널공사가 시작되고, 2009년부터는 검출기가 설치되기 시작했다. 애초 목표는 지난해 말까지 설치를 마치고 올해 1월부터 측정에 들어가는 것이었지만, 외환위기로 치솟은 환율 때문에 일본 광센서의 수입 시기를 늦춰 일정이 다소 미뤄졌다. 연구팀은 올해 3월께면 본격적인 중성미자 측정에 들어간다. 그러나 이것은 또다른 시작에 불과하다. 3년 정도 데이터를 모아 분석해야 중성미자 변환상수가 도출될 수 있다. 변환상수가 2% 이하라면 측정에 실패할 수도 있다. 최소 단위가 2g인 저울로 1g짜리를 잴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이쯤되면 실패는 연구팀이 아니라 ‘신의 책임’이다. 김 교수는 “지금까지 우리 연구팀에 행운이 따랐듯이 2014년께 물리학계가 주목할 논문을 낼 수 있으리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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