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인공지능 통돌이 세탁기’라는 지시어로 미드저니를 통해 생성한 그림.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인공지능’이란 단어를 일상생활에서 처음 접한 때가 1990년 가을이었다. 그해 10월 초순 금성사와 대우전자가 ‘인공지능 퍼지 세탁기’를 내놓았다. 삼성전자는 약 한달 뒤인 11월 중순 퍼지 세탁기 발매를 앞두고 ‘진짜 퍼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다른 퍼지 가전제품도 등장했지만, 치열한 판매 전쟁은 세탁기 시장이 중심이었고, 승자는 금성사였다. 세탁기 히트 모델이 월 1만대 정도 팔리던 시절에 금성사는 발매 첫 두달 만에 퍼지 세탁기를 5만3천대 팔았고, 이듬해 중반까지 매달 4만대 판매를 이어갔다.
‘퍼지’(fuzzy)는 ‘어렴풋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고 ‘퍼지 논리’는 어렴풋함을 ‘0 아니면 1의 구조’에서 벗어나 정량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인간의 감각과 인지는 어렴풋한 것이니 인공지능을 추구한다면 이 모호한 상태를 공학적·수학적으로 계산하고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공지능 퍼지 세탁기’는 이 모호함을 세탁에 적용했다. 기존의 세탁기들은 참과 거짓, 두 개념밖에 파악하지 못해 오염도 기준값을 입력해두면 기준값보다 빨래가 살짝만 덜 더러워도 무조건 약하게 작동하고, 조금만 더 더러우면 강하게 작동했다. 그러나 퍼지 세탁기는 센서로 세탁물의 무게를 감지하고 옷감의 종류와 재질을 확인해 수위나 물살 세기, 탈수 시간 등을 알아서 설정하고 작동했다. 세탁물의 오염 정도, 재질에 따라 사람이 빨래 방식을 정하고 실행하는 최적의 작동 방식이라는 설명이었다.
한국의 퍼지 열풍은 당시 미-일 무역분쟁의 여파에 따른 것이었다. 마쓰시타전기에서 1985년부터 퍼지 기술 개발에 종사한 와카미 노보루는 ‘당시 일본 업체들 사이에서 일본이 미국의 기초연구를 도둑질해서 제품 개발만 한다는 미국 쪽의 비난을 부담스러워했다’고 회고했다. 그런 분위기에서 일본 대학에서 진행되던 퍼지 기술 연구에 기업이 합류했다. 1987년 히타치는 센다이시 당국에 납품한 전철용 퍼지 제어시스템으로 대성공을 거뒀다. 급가속·급제동을 격감시켰고, 플랫폼의 정위치에 열차를 세울 수 있었으며, 전력 소비도 절감할 수 있었다. 소비자 제품으로는 1990년 2월 마쓰시타가 발매한 ‘아이사이고(애처가라면 구매할) 데이 화지’ 세탁기가 처음이었고, 산요·샤프 등 두세달 새 퍼지 기술이 적용된 진공청소기, 밥솥, 카메라, 캠코더, 식기세척기, 등유 온풍기 등이 쏟아져 나왔다. 기초연구를 통해 추상적인 퍼지 이론을 실용화해냄으로써 ‘일본의 미국 기초연구 무임승차론’을 붕괴시켰다고 일본이 자부할 정도의 거대한 충격이었다. 한국의 가전 3사는 여기에서 큰 자극을 받았다.
물론 미국인들은 온전히 동의하지 않았다. 1990년 5월 미국 경제잡지 ‘포천’은 “또다시 일본 기업들이 미국에서 발명된 기술을 가져다 획기적인 소비자 제품을 만드는 데 사용한다”라는 문장으로 일본의 퍼지 붐을 보도했다. 1992년 1월 미국 시카고 국제전자제품박람회(CES)를 앞두고 워싱턴포스트는 연말 보너스로 미친 듯이 퍼지 제품들을 구매하는 일본인들을 묘사하고, 곧 미국에도 닥쳐올 퍼지 제품들을 경계하는 기사를 게재했다. ‘어렴풋한’이라는 뜻의 영어 단어 ‘퍼지’의 일본 발음이 ‘화지’라서, ‘환타지’(판타지), ‘환시’(팬시)와 운이 맞아떨어진다는 산요 쪽의 설명을 전달하면서도, “어렴풋한 세탁기”나 “어렴풋한 카메라”라는 명칭은 제품 이미지를 손상시킬 수 있다는 논평도 붙였다. 미국인들은 먼지봉투를 갈아끼우라고 말하는 진공청소기를 원할 것 같지 않다는 일본 주재 미국인 전문가의 견해도 소개했는데, 이는 모함이었다. 당시 퍼지 제품들 중에는 그런 음성기능을 탑재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단, 일본 퍼지 열풍에 짐짓 태연한 척하던 미국인들은 일본인들이 숭상하는 퍼지 이론의 잊힌 발명가 로트피 자데가 누구냐고 묻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붐이 일기 전까지 미국 학계에서 ‘퍼지’는 독보적인 공학자 자데의 ‘흑역사’로 보는 견해가 대세였다. 아제르바이잔에서 태어나 이란에서 자란 자데는 1942년 테헤란대학을 졸업한 뒤 1946년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의 전기공학 석사를 받았고, 1949년 나선형 안테나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아 컬럼비아대학 교수가 되었다.
자데가 입학한 1947년부터 1950년대 말까지 컬럼비아대학의 전기공학과는 제어공학의 찬란한 중심지였다. 예컨대 ‘용광로의 상태를 목표치에 맞추기 위해 어떤 원료를 얼마나 투입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이미 투입해둔 원료들의 양, 목표치와 현재 상태의 편차, 현재 시점의 초당 투입량들을 복합적으로 계산해야 한다. 또한 센서의 적절한 측정주기, 전달받은 측정값에 필연적으로 섞여드는 측정 에러와 통신잡음이 계산 결과에 얼마나 악영향을 주는지도 분석해야 한다. 비슷한 문제는 공정제어뿐만 아니라 선박 조타, 무선통신, 송배전 등등 여러 분야에서 공통적으로 발생한다. 2차 대전이 끝날 무렵엔 센서의 측정값을 전기신호로 받아 제어용 모터에 전력을 공급해서 대상을 움직이는 방식이 보편화되었다. 그렇다면 전기신호와 전력의 특성을 기술하는 수식들을 이용해서 제어공학 이론을 일원화할 수 있지 않을까? 후일 등장한 퍼지 이론과 정반대로 엄격한 증명을 통해 모호함을 철저히 제거하는 것이 당시 제어공학의 과제였다.
컬럼비아대학 출신의 전기공학자들은 제어 대상과 센서와 제어기기의 변화를 추상적인 수식으로 묘사하는 ‘상태공간’에서 모델링하는 ‘상태공간 접근법’을 다듬어 중요한 업적들을 쏟아냈다. 매사추세츠공과대학의 노버트 위너는 무한히 먼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의 모든 신호를 모아 미래값을 예측하는, 이론적으로는 완벽한 수학적 기법을 완성했다. 실용성은 없었다. 보일러의 온도와 압력을 예측하기 위해서, 공급되는 열량과 방출되는 증기의 온도와 압력을 무한히 먼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계속 측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자데는 위너의 기법을 유한한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불연속적인 측정만으로도 미래 상태를 산출하고, 측정값의 빈도와 오차에 따라 미래 예측값의 오차를 추정하는 이론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는 자신과 동료들의 업적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교과서 ‘선형시스템이론: 상태공간 접근법’을 1963년에 출판했는데, 이 책은 70년이 지난 지금도 종종 보조교재로 사용되는 살아 있는 고전이다.
자데는 ‘선형시스템이론’을 집필하고서도 기존 제어공학이론이 너무 엄격해서 모든 현실에 적용하지는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홀로 있던 1964년 7월 밤, 퍼지 논리의 착상을 떠올리게 됐다. ‘한 원소가 집합에 속하는 정도를 0에서 1 사이의 값으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었고 2주 만에 보고서를 완성했다. 물의 집합에 찬물 부분집합과 뜨거운 물 부분집합이 있다면, 미지근한 물 부분집합에 속한 물들은 찬물 부분집합에 0.4~0.6 정도 속하고, 뜨거운 물 부분집합에는 0.6~0.4 정도 속한다고 정의할 수 있다는 것이 뼈대였다. 고전 집합론의 공리체계를 퍼지 집합론으로 확장하는 이 내용이 1965년 발표된 첫 퍼지 논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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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속 논문들은 1969년부터 나왔다. 그는 인간의 감각과 인지는 어렴풋한 것들이니 사람 같은 인공지능을 추구한다면 어렴풋함을 공학적으로, 즉 수학적으로 계산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믿음을 확장해 나갔다. 집합 연산은 논리 연산으로 쉽게 변환되기 때문에 퍼지 집합론을 기초로 퍼지 논리체계를 만들 수 있었다. “미지근한 물과 뜨거운 물을 섞으면 약간 따뜻한 물이다”라는 문장을 퍼지 집합론에 따라 논리 연산을 할 수 있게 한 것이다. 1970년대 후반에는 2차 퍼지 논리로 확장했다. “미지근한 물이다”라는 문장이 0.3만큼 참이고 0.7만큼 거짓이라면 “약간 따뜻한 물이다”라는 결론은 얼마만큼 참일까? 자데가 만들어낸 체계는 이 질문에 일정한 전제하에 수치로 답할 수 있었다.
자데의 이론은 나름 신기하기는 한데, 무슨 의의가 있는지, 어떤 쓸모가 있는지 애매했다. 그의 연구는 인공지능, 사이버네틱스, 컴퓨팅, 수학인 것 같으면서도 어느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같은 과 교수로부터 “어렴풋한 논리”란 인류사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켜온 부정확한 사고를 조장할 수 있기” 때문에 “틀렸고, 잘못되었으며, 해롭다”는 혹평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자데의 이론은 다른 나라의 제어공학자들에 의해 발전됐다. 런던대학의 이브라힘 맘다니는 1975년에 퍼지 문장들을 수치로 변환해서 그래프를 그리고 기하학적으로 가중평균을 내서 제어용 변수를 계산해내는 맘다니 추론 체계를 발표했다. 1985년 도쿄공업대학의 다카기 도모히로와 스게노 미치오가 시스템의 상태를 묘사하는 미분방정식들에 행렬연산을 적용해 제어함수를 만들어내는 티에스(TS) 추론 방식을 발표했다. 자데가 말년에 손을 놓은 제어공학이 퍼지 논리에 힘을 불어넣은 것이다. 그리고 1980~90년대 일본에서 꽃을 피웠다.
1990년대 한국의 퍼지 열풍은 ‘뉴로 퍼지’와 ‘휴먼 퍼지’라는, 좀 더 인공지능스러운 이름으로 이어지다가, 1993년 말 마케팅 유행어가 ‘카오스’, ‘탱크주의’ 등등으로 방향을 틀어버리면서 갑자기 사그라졌다. 이제는 ‘인공지능 퍼지’를 기억하느냐고 물으면 누가 그런 구닥다리에 신경쓰느냐는 반문을 듣는다. 그런데 퍼지 마케팅 열풍이 사라진 현재야말로 퍼지 논리를 활용하는 장비들이 우리 생활 곳곳에 퍼져 있다. 스마트폰 카메라의 손떨림 방지 기능부터, 자동차의 브레이크 잠김 방지 시스템(ABS), 공장 자동화 기기, 드론과 로봇, 발전소 제어 시스템 등등이 모호한 상황을 알아서 제어하는 퍼지 이론의 산물이다.
과학저술가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과학사 및 과학철학협동과정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가톨릭대학교 교양교육원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 동국대학교 다르마칼리지에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