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테네시주 오크리지국립연구소에 설치된 세계 최강 슈퍼컴퓨터 ‘프런티어’. 오크리지국립연구소 제공
1초에 100경번.
초당 연산 횟수가 엑사(100경=1,000,000,000,000,000,000=10^18)급에 이르는 슈퍼컴퓨터 시대가 개막됐다.
첫 테라(1조)급 슈퍼컴이 등장한 때가 1997년, 페타(1000조)급 슈퍼컴이 선보인 때가 2008년이었으니 테라에서 페타로 넘어가는 데 11년, 페타에서 엑사로 넘어가는 데 14년이 걸렸다. 25년만에 실력을 100만배 향상시킨 셈이다.
일반 컴퓨터가 넘볼 수 없는 뛰어난 연산 능력을 갖춘 슈퍼컴퓨터는 디지털 세상의 소리없는 또 하나의 전쟁터라고 할 수 있다.
슈퍼컴퓨터는 애초엔 암호 해독 등 군사적 목적으로 탄생했지만 이제는 제품 설계에서 백신 개발, 기후 변화 모델링, 우주 시뮬레이션에 이르기까지 과학과 산업사회가 맞닥뜨린 복잡한 문제를 푸는 데 없어서는 안되는 도구가 됐다.
미국이 압도적 우위를 점했던 슈퍼컴퓨터 경쟁 구도는 2000년대 이후 일본과 중국이 가세하면서 세 나라가 최강 슈퍼컴 자리를 놓고 엎치락뒤치락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중국은 2013년부터 톈허2A, 선웨이를 잇따라 선보이며 2017년까지 미국을 제치고 4년간 슈퍼컴퓨터 왕좌 자리를 차지했다. 현재 세계 슈퍼컴 톱500 가운데 중국 것이 173대로 미국의 126대보다 훨씬 많다. 슈퍼컴 숫자는 적지만 일본도 이 분야의 세계 최강국 가운데 하나다. 일본의 슈퍼컴 후가쿠는 2020년 6월 아이비엠의 서밋을 제치고 1위에 올랐다.
최근 미국이 슈퍼컴의 성능을 한 단계 높이면서 2년만에 왕좌의 자리를 되찾았다.
미 에너지부 오크리지국립연구소의 슈퍼컴 프런티어(Frontier)가 5월 말 독일 함부르크에서 열린 ‘2022 국제슈퍼컴퓨팅 콘퍼런스'에서 일본의 후가쿠를 제치고 세계에서 가장 빠른 슈퍼컴으로 선정됐다. 프런티어는 특히 사상 처음으로 공식 성능 평가에서 엑사급의 연산 능력을 보여줬다.
이번 평가에서 실측된 프런티어의 초당 연산 횟수는 1.102엑사플롭스(1엑사=100경)다. 슈퍼컴은 1초당 처리할 수 있는 부동소수점 연산 횟수를 가리키는 ‘플롭스’(FLOPS)로 성능을 평가한다. 1.102엑사플롭스는 1초당 110경2천조회의 계산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한 사람이 1초에 하나씩 곱셈 문제를 푼다고 가정할 경우 세계 인구 79억명이 4년 반 동안 푸는 문제수와 같다. 지구의 모든 사람이 꼬박 4년 반 동안 매달려야 하는 수학 문제집을 슈퍼컴퓨터 한 대가 1초에 해치우는 셈이다.
이는 이전 챔피언인 후가쿠보다 2배 이상 빠른 속도다. 후가쿠는 지난해 11월 평가에서 442페타플롭스(44경2천조번, 1페타=1000조)의 실측성능을 보여줬다. 프런티어 한 대의 성능이 톱500 슈퍼컴 전체 연산 능력의 4분의 1을 차지한다.
슈퍼컴은 최신 인공지능 알고리즘을 수행하는 데도 요긴하게 쓰인다. 프런티어의 경우, 머신러닝에서 사용하는 컴퓨팅 형식에 기반한 계산 속도에선 최고 6.88엑사플롭스까지 기록했다. 일본의 후가쿠도 이 부문에선 엑사급 성능을 보여준다.
슈퍼컴퓨터 프런티어의 수냉식 냉각장치. 휼릿팩커드 엔터프라이즈 제공
오크리지국립연구소는 현재 프런티어의 성능에 대한 검증 작업을 벌이고 있다. 이 과정이 끝나면 프런티어는 2023년 초부터 정식 가동에 들어갈 예정이다.
미국에 최강 슈퍼컴 칭호를 다시 안겨준 프런티어는 휼릿팩커드 엔터프라이즈가 제작한 것으로 모두 74개의 캐비닛으로 구성돼 있다. 여기엔 에이엠디(AMD)가 제조한 CPU 9400개, GPU 3만7000개가 들어 있다. 코어 수가 총 873만112개로 일반 노트북 피시(코어 수 5~9개)의 100만배 수준이다. 각 캐비닛의 무게만 해도 8천파운드(3.6톤)에 이른다.
토머스 자카리아 오크리지연구소 소장은 “코로나19로 인해 프런티어 제작에 애로를 겪었지만 앞으로 프런티어는 코로나19의 영향을 연구하고 청정 에너지원으로의 전환을 돕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과학계에선 엑사급 슈퍼컴이 매우 복잡한 계산이 필요한 과학 분야에서 새로운 성과를 보여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연구소는 프런티어를 이용해 별의 탄생과 폭발 과정 시뮬레이션, 원자보다 작은 입자 세계의 특성 분석, 핵융합 등의 새로운 에너지원 탐색, 인공지능을 이용한 질병 진단과 예측 등을 진행할 계획이다.
프런티어는 컴퓨터의 에너지 효율성을 평가하는 그린500에서도 와트당 62.68기가플롭스로 1위를 차지했다. 자카리아 소장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기계가 가장 에너지 효율적이라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라고 말했다.
엑사급 성능을 보인 것으로 알려진 중국 슈퍼컴 오션라이트의 CPU 구조도. 출처=hpcwire.com
미국과 중국 간의 신경전은 슈퍼컴 순위 경쟁에서도 치열하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중국 연구진은 미국의 견제로 해외의 성능 좋은 칩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바람에 공식 순위 경쟁에서 슈퍼컴의 사양을 높이는 데 애를 먹었다. 하지만 슈퍼컴 성능의 열쇠를 쥐고 있는 마이크로프로세서 설계에선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이에 따라 공식 무대에 데뷔하진 않았지만 중국은 이미 엑사급 슈퍼컴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시아기술정보프로그램 창립 대표인 데이비드 카하너 박사는 지난해 2대의 엑사급 슈퍼컴에 대한 상세 정보를 공개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하나는 오션라이트(1.02엑사플롭스)로 2016~2017년 슈퍼컴 1위였던 선웨이의 후속 제품, 다른 하나는 2010년 중국에 처음 슈퍼컴 1위 자리를 선물한 톈허1A의 후속작 톈허3(1.3엑사플롭스)이다.
중국이 엑사급 벽을 넘어섰다는 증거는 지난해 11월 나왔다. 당시 중국 연구원들은 엑사급 속도로 작동하는 새로운 선웨이 시스템의 양자컴퓨팅 회로를 시뮬레이션한 공로로 ‘슈퍼컴퓨팅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고든벨상을 받았다. 이들은 중국 슈퍼컴이 오크리지연구소의 가장 빠른 슈퍼컴이 1만년 걸리는 계산을 304초만에 해치웠다고 밝혔다.
하이페리온리서치의 스티브 콘웨이 분석가는 이에 대해 중국이 미국의 추가제재를 바라지는 않지만 슈퍼컴 운영 사실은 알리고 싶어 일부러 흘린 것이라는 분석을 내놨다. 그는 중국 슈퍼컴에 쓰인 칩 대만산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미국에선 앞으로 두 대의 엑사급 슈퍼컴이 더 나올 예정이다.
하나는 캘리포니아의 로렌스리버모어국립연구소가 2023년 완성할 엘카피탄(EL CAPITAN)이다. 다른 하나는 일리노이의 아르곤국립연구소에 올해 말 설치된다.
엑사시대를 연 슈퍼컴의 다음 도약 목표는 제타다. 제타는 엑사의 1000배다.
슈퍼컴 톈허를 개발한 중국 국방기술대 연구진은 2018년 발표한 논문에서 제타급 슈퍼컴에 도달 가능한 시기를 2035년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엑사급 컴퓨터도 애초엔 2018년 또는 2020년에 가능할 것으로 예측했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늦어졌다. 슈퍼컴의 성능 향상을 위해서는 칩 기술 뿐 아니라 연결 시스템과 이를 구동하는 소프트웨어의 기술 혁신도 병행돼야 한다.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의 슈퍼컴 5호기 ‘누리온’.
이번 슈퍼컴 성능 평가에서 한국은 모두 6대의 슈퍼컴을 500위 안에 올려 놓았다.
2021년 삼성전자가 반도체, 인공지능 연구 등을 위해 삼성종합기술원에 설치한 SSC-21(25페타)가 15위로 한국 슈퍼컴으로선 가장 높은 순위에 올랐다.
이어 기상청의 슈퍼컴 구루(18페타)와 마루(18페타)가 31~32위,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키스티)의 누리온(14페타)이 42위, 올해 에스케이텔레콤이 대화형 인공지능 개발을 위해 설치한 타이탄(6.3페타)이 85위, 삼성전자의 SSC-21 스캘러블 모듈(2.3페타)이 315위였다. 키스티는 2023년까지 500페타플로스급(1초당 50경번 연산 횟수)의 슈퍼컴을 새로 도입할 계획이다.
슈퍼컴 톱500 순위는 매년 5월과 11월 두 차례에 걸쳐 발표된다. 이번 순위 발표는 59번째다.
곽노필 선임기자
nop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