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취리히공대의 4족보행 로봇 ‘애니멀’ 인공지능으로 시각·촉감 정보 분석해 등반 120미터 최종구간, 사람보다 4분 빨리 통과
사람보다 빨리 등산하는 실력을 보인 4족 보행 로봇 애니멀. 취리히연방공대 제공
사람은 세상의 정보를 수집하고 자극에 반응할 때 두가지 유형의 감각을 함께 사용한다. 하나는 시각이나 청각, 후각처럼 외부의 정보와 자극에 반응하는 외부수용감각(exteroception), 다른 하나는 촉각이나 압박감처럼 자기 몸의 움직임이나 위치, 상태 등을 느끼는 고유수용감각(proprioception)이다. 예컨대 미끄러운 지면이나 캄캄한 곳에서도 몸의 균형을 유지하며 이동할 수 있는 것은 고유감각 덕분이다. 외부감각은 행동을 계획하는 데 사용하고, 고유감각은 일이 어려워질 때 제 역할을 한다. 동물도 마찬가지다. 로봇에도 두 유형의 감각에 해당하는 장치가 있다. 예컨대 카메라는 외부감각, 힘 센서는 고유감각이다. 로봇은 두 감각을 얼마나 잘 활용할 수 있을까?
스위스 취리히연방공대(ETH Zurich) 로봇시스템연구실 연구진이 로봇개 ‘애니멀’(ANYmal)이 인공지능 알고리즘으로 두 가지 감각을 이용해 사람보다 빠른 속도로 등산하는 데 성공했다고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로보틱스’에 발표했다. 기계학습을 통해 얻은 시각과 촉감 정보 분석 능력을 이용해 산길을 오른 덕분이다.
연구진에 따르면 4족보행로봇 애니멀은 취리히호수 남쪽 해발 1098미터 에첼산의 마지막 가파른 경사구간 120미터를 31분만에 올랐다. 연구진은 “이는 일반적인 등산객이 걸리는 시간보다 4분 더 빠른 속도”라고 밝혔다. 연구진은 이 구간에는 미끄러운 바닥과 가파른 계단, 자갈, 돌출된 나무뿌리 등 장애물이 많지만 애니멀은 중간에 넘어지는 등의 실수도 없었다고 덧붙였다.
로봇 애니멀이 통과해야 하는 실제 환경과 센서가 인식하는 환경. IEEE SPECTRUM 제공
가상훈련 통해 최적의 방법 습득
마르코 후터 교수가 이끄는 연구진은 애니멀이 등반에 성공할 수 있었던 건 새롭게 개발한 제어기술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후터 교수는 보도자료를 통해 “애니멀은 다리에서 전해주는 고유수용감각(촉감)과 시각 정보를 결합하는 방법을 학습해 습득했다”며 “그 덕분에 거친 지형을 더 빨리, 더 효율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더 힘차게 통과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연구진에 따르면 지금까지 로봇은 시각 정보와 고유감각을 결합해 처리하는 일을 잘 하지 못했다. 레이저 센서와 카메라에 기록된 정보가 불완전하거나 애매모호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예컨대 키 큰 풀이나 웅덩이, 눈길을 만나면 통과할 수 없는 장애물로 인식한다. 또 먼지 또는 안개가 끼면 로봇의 시야 자체가 흐릿해진다.
연구진은 인공신경망에 기반한 새로운 알고리즘을 개발해 애니멀이 이 한계를 극복하도록 했다. 논문 제1저자인 미키 다카히로 박사과정 연구원은 공학전문지 ‘아이트러플이 스펙트럼’(IEEE SPECTRUM) 인터뷰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을 꼽아달라는 질문에 “눈이 쌓인 계단을 통과하는 것은 이번이 첫 도전이었는데, 미끄러운데도 로봇이 잘 해낸 것에 놀랐다”고 말했다.
연구진은 실제 등반에 앞서 가상훈련을 통해 애니멀이 장애물을 통과하는 최적의 방법을 습득할 수 있도록 했다. 후터 교수는 “이 훈련을 통해 애니멀은 험난한 자연 지형도 통과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지난해 지하 동굴 경진 대회에 참가한 4족보행 로봇 ‘애니멀’. 사이언스 로보틱스 동영상 갈무리
아직은 사람이 경로 선택해줘야
애니멀은 이미 지난해 10월 미 고등방위연구기획국(DARPA)이 주최한 지하 동굴 탐색 경진대회에서 이 기술을 뽐낸 바 있다. 취리히연방공대 연구진이 포함된 국제연합팀 케르베루스(CERBERUS)가 로봇개 애니멀을 출전시켜 우승을 차지했다. 애니멀은 결승전에서 지하 동굴에 배치한 인공장애물 40개 중 23개를 정확하게 감지해 통과했다.
연구진은 앞으로 원자력발전소 재해나 산불 등 사람이 가기엔 너무 위험하거나 다른 로봇은 갈 수 없는 곳에 애니멀을 보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아직 갈 길은 멀다. 이번 등산 프로젝트에서 산을 직접 오른 것은 로봇이지만, 가는 경로는 사람이 선택해줬다.
논문 제1저자인 미키 다카히로 박사과정 연구원은 “지하 동굴 경진대회에선 스스로 경로를 설정하는 알고리즘을 이용하기는 했지만, 주변 환경이 훨씬 복잡한 산악지역에서도 자율 등산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라고 말했다.
곽노필 선임기자 nop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