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사병이 대유행하던 시절 새 모양의 마스크와 모자를 쓰고 감염병 진료를 하던 의사 모습.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9세기에서 14세기에 걸친 중세 온난기에 살았던 사람들은 그럭저럭 살 만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이 시대를 중세 암흑시대라고 부정적으로 기술한다. 이후부터 19세기 중반까지는 소빙하기였다. 혹독한 배고픔의 시기였고 여기에 흑사병이 퍼져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문명의 맹아를 키워낸 것은 이 시기였다.
중세 온난기에는 기후조건이 좋아 농업 생산량이 증가하였다. 유럽 인구가 두 배로 증가하여 7300만명 이상이 되었다. 그 당시 오늘날 대부분 유럽 도시들이 건설되었다. 이러한 번영으로 종교적 권위에 의한 질서와 안정된 봉건 체제가 유지되었다. 지배층은 여유가 있었으므로 11세기에서 13세기 말에 걸쳐 성지 예루살렘을 점령하기 위한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한나라와 로마의 멸망 이후 끊어졌던 실크로드가 당나라(618~907) 때 다시 연결되었다. 송나라(960~1279)에서도 농업 생산량이 좋아져 인구가 증가하였고 동양과 서양 간 무역이 더 활발해졌다. 뒤이어 등장한 몽골은 따뜻하고 강수량이 많았던 13세기 초에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연결하는 제국을 건설하였다.
소빙하기가 시작되자 작물 성장 기간이 짧아지고 경작지가 줄어들었다. 추울 뿐 아니라 날씨 변동이 심해 가뭄과 폭풍우가 자주 일어났다. 이는 기온 하강보다 농작물에 더 심한 피해를 주었다. 중세 온난기에 식량 생산량이 늘어났다 해도 인구 증가 속도가 그보다 앞질러 대부분의 사람이 풍요로울 정도는 아니었다. 이 상태에서 일어난 소빙하기 기근은 참혹한 고통이 되었다.
2011년 독일과 캐나다 연구팀이 660여년 전 런던 흑사병 집단 매장지에서 발굴된 유골 조직에서 흑사병 균을 찾아냈다. 이 흑사병 균은 오늘날 해마다 세계에서 2000여명을 사망하게 하는 균과 유전자가 거의 같았다. 연구팀은 당시 흑사병이 맹위를 떨칠 수 있었던 것은 병균 자체의 독성뿐만이 아니라 소빙하기 대부분 사람이 영양 상태가 극도로 안 좋아 면역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1334년 몽골제국에서 발생한 흑사병이 1347년 몽골군이 크림반도 항구 도시 카파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유럽에서 처음 발생했다. 이를 피해 제노바에 입항한 이탈리아 상인을 통해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중세 온난기에 이루어진 인구 증가, 도시 발달과 교역 확대가 흑사병을 더욱 더 확산시켰다. 도시 쓰레기와 오물은 흑사병을 옮기는 쥐가 살기에 좋은 환경이었다. 1352년까지 발생한 흑사병으로 당시 유럽 인구의 4분의 1 내지 3분의 1이 사망하였다. 파리와 런던에서는 인구가 절반으로 줄어들 정도였다.
원인도 모르고 치료법도 없는 상황에서 이러한 떼죽음을 신이 내린 벌이라 여겼다. 대중들은 지식을 독점한 권력층의 이런 설명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속죄의 의미로 자신의 몸에 채찍질하기도 했다. 교회에 함께 모여 참회하는 과정에서 흑사병이 더 퍼졌다. 종교적 신념이 흑사병 확산에 더 적합한 환경을 제공한 것이었다.
흑사병으로 숨진 사람을 매장하는 벨기에 투르네 시민들. 14세기 그림. 위키미디어 코먼스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재난이 닥치면 비합리적인 집단 선동으로 희생양을 찾아 사태를 무마하려 한다. 중세 권력자들은 희생양으로 삼을 만한 이를 형벌에 처함으로써 신의 분노를 가라앉힐 수 있다고 믿었다. 잘못된 믿음은 왜곡된 신념으로 비화했다. 집단 광기에 사로잡힌 군중들이 유대인을 집단 학살했다. 마녀사냥은 15세기 초부터 시작되어 소빙하기의 추위가 가장 심했던 16세기 말~17세기가 전성기였다. 당시 종교 재판으로 20만~50만명의 사람이 죽임을 당했다. 그 대부분이 늙은 여성이었다.
낙인과 혐오를 앞세워 사회적 약자인 유대인과 마녀를 그토록 많이 죽여도 기아와 전염병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종교적 권위가 약화되었다. 이와 함께 급격한 인구 감소로 농노가 부족하여 봉건제도가 무너졌다. 도시에서는 귀족이 아니어도 돈이 많으면 신분이 높아질 수 있는 사회적 격동기에 들어섰다.
흑사병 발생지에서 출발한 배가 항구에 들어오면 검역을 하기 시작했다. 흑사병 환자를 격리하고 위생 상태를 개선하는 등 과학적 대응으로 조금씩 어려운 상황을 극복해 나갔다. 신에게 의존하지 않는 인간의 합리성이 중요시되는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다. 근대 시민 의식이 형성되어 프랑스 대혁명으로 발전했다. 자유로운 탐구 정신은 과학 기술의 기반을 닦았고 이어 산업 혁명이 일어났다. 소빙하기 어려운 삶의 조건은 유럽인들이 위험한 대양을 건너 신대륙을 향하도록 했다.
중세 온난기는 살 만했지만, 사회적 변화가 거의 없었기에 암흑시대였다. 소빙하기는 비참했지만, 합리적으로 극복하는 과정에서 그 전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을 꿈꾸고 만들어낸 시기였다. 과학, 농업, 산업 분야에서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났고 정의, 자유, 평등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근대 사회로 진입한 것이었다.
우리는 미래를 볼 수 없지만, 우리에게는 과거가 있다. 과거는 우리에게 비슷했던 사례, 패턴, 원칙을 알려 준다. 인류는 어려움에서도 가능성을 붙잡고 희망을 현실로 바꿔나갔다. 그 희망은 따뜻한 햇볕 아래 있지 않고 차가운 어둠 속에 있다는 사실을 역사가 알려준다.
경희사이버대학 기후변화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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