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퍼 유전자가위로 불리는 유전자 편집 기술을 이용한 농산물의 품종 개량 연구가 활발한 가운데, 유럽에서는 유전자 가위 농작물에도 지엠오 규제를 적용해야 한다는 유럽최고법원의 결정이 나왔다. 사진은 다양한 농작물들.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크리스퍼 유전가 가위’로 불리는 유전자 편집 기술로 생산한 농산물은 기존 ‘유전자 변형 유기체(GMO, 지엠오)’에 적용되는 규제에서 예외적인 면제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유럽 최고법원의 결정이 나왔다. 유전자 편집 농산물도 지엠오처럼 까다로운 규제와 안전성 심사 대상임을 밝힌 이번 법원 결정에 대해 유럽 지역의 생명공학 연구그룹과 기업들은 크게 반발했으며 환경단체들은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유럽연합의 최고법원 격인
유럽사법재판소는 25일(현지시각) 유전자 편집 기술로 개발된 신품종 농작물이 ‘2001 지엠오 지침(2001 GMO Directive)’이 규제 대상으로 삼는 ‘지엠오’에 해당하며, 따라서 그 규제를 그대로 받아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2001년에 제정돼 유럽연합 내에서 지엠오 규제의 기본 법령으로서 효력을 지녀온 ‘2001 지엠오 지침’은 자연적으로 생성되지 않은 유전자 돌연변이 유발(mutagenesis)에 의해 생산되는 농산물을 유전자 변형 유기체, 즉 ‘지엠오’로 규정하고 있으며, 지엠오 농작물은 인체 건강과 환경 영향의 위험성을 평가받고 규제받는 절차를 따르도록 정해두고 있다. 다만 예외적인 면제 대상도 있는데, 방사선을 쪼여 일부러 변이들을 무작위로 일으키고서 그중에서 우수 형질의 개체를 골라내어 신품종을 개발하는 방사선 육종법처럼 2001년 이전에 이미 널리 쓰이며 오랜 안전성 기록을 갖춘 변이유발 기술들은 규제 대상에서 면제하고 있다.
그동안 농산물 신품종을 연구·개발하는 연구그룹과 기업들은 유전자 편집 농작물이 방사선 육종에 의한 농작물과 마찬가지로 지엠오 규제 대상에서 면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유전자가위 기술은 농산물 자체의 유전자에 변이를 일으키기에, 다른 생물 종의 외래 유전자를 농작물에 집어넣어 유전형질을 바꾸는 기존의 지엠오 기술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또한 규제 대상에서 제외된 방사선 육종법이 무작위 돌연변이를 일으키는 데 비해, 유전자가위 기술은 목표로 삼은 유전자 변이를 정확하게 일으키기에 훨씬 예측 가능한 기술이라는 주장을 펴왔다.
유럽사법재판소의 이번 결정은 이런 기술적인 근거를 세세히 따지는 대신에 유럽 지역에서 지엠오 규제 정책의 근간이 되는 ‘200년 지엠오 지침’의 틀 안에서 유전자가위 농산물의 규제 여부를 해석하고 판단했다. 즉, 유전자가위를 이용한 농작물 품종 개량 기술이 방사선 육종법과는 달리 2001년 이후에 새롭게 등장한 신기술이기에, ‘인체 건강과 환경에 대한 역효과의 방지’라는 ‘2001 지침’의 목표에 부합하게 사전예방원칙에 따라 규제 대상이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다음은 유럽사법재판소가 공개한 결정문 요지의 주요 대목이다.
“우리 법원은 이 새로운 돌연변이 유발 기술[유전자 편집 기술] 사용에 따른 위험성이 형질전환으로 만들어지는 지엠오의 생산과 방출에 따른 위험성과 유사하다고 입증될 만하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변이유발을 통한 생물체 유전물질의 직접 변형은 외래 유전자를 생물체에 집어넣을 때(형질전환)와 유사한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으며, 또한 기존 변이유발 방법으로 만든 유전자변형 변종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신종 변이유발 기법들이 유전자변형 변종들을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공통의 위험성에서 볼 때, 신종 변이유발 기법으로 얻은 생물체를 ‘지엠오 지침’의 적용 범위에서 배제하는 것은 이 ‘지침’이 추구하는 목표, 즉 인체 건강과 환경에 대한 역효과의 방지라는 목표를 훼손할 것이며, 이 지침이 시행하고자 하는 사전예방원칙을 지키기 힘들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지엠오 지침’은 이 지침이 채택된 이후에 등장한 변이유발 기법에 의한 생물체에도 적용될 수 있다.” (
유럽사법재판소 결정문 요지에서)
유럽사법재판소의 이번 결정은 프랑스 정부가 유전자 편집 농작물을 지엠오 규제에서 면제 대상으로 규정하는 법령을 마련하자 프랑스 지역 소농단체 등이 연합해 소송을 제기하고, 이어 2016년 프랑스 정부가 유럽사법재판소에 ‘2001년 지엠오 지침’과 유전자 편집 농작물에 관한 해석과 판단을 의뢰한 데 따른 것이다.
한편, 미국에서는 유전자가위 농작물에 대해 유럽과는 다르게 규제 완화에 우호적인 정책을 보여왔다. 지난 2016년 4월 미국 농무부(USDA)는 유전자가위 기술로 만든 변색 방지 버섯이 지엠오 규제 대상이 아니라는 결정을 내려 주목을 받은 바 있다. 미국과학아카데미(NAS)도 유전자가위 기술이 유전공학의 정밀도를 높여 지엠오를 넘어서는 유망한 신육종 기술로 떠오르고 있다고 평가하는 유전공학 작물 기술 현황 보고서를 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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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등 과학저널의 뉴스 보도를 보면, 이번 결정에 대해 연구자들은 유럽 지역에서 유전자가위 농작물 연구가 크게 위축될 것으로 우려했다. 유전자가위 농작물에 지엠오 규제가 그대로 적용된다면 안전성 심사 과정에서 수천만 달러의 비용이 필요해지고, 이에 따라 이런 비용 부담을 감당할 수 있는 거대기업만이 유전자가위 기술을 지니게 될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됐다. 관련 기업과 연구자들이 유럽 바깥으로 옮겨갈 것이라는 우려 섞인 전망도 있었다. 환경단체인 지구의친구(FOE)는 크리스퍼 유전자 편집 기술을 비롯해 유전공학으로 만든 모든 생산품은 인체 건강과 환경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평가를 받아야 하며 규제를 따라야 한다면서 이번 결정에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바이오안전성정보센터의 장호민 전문위원은 “엄격한 지엠오 심사·규제와는 달리 유전자가위 농작물에는 완화된 정책이 시행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른 결정으로 받아들여진다”라며 “국내에선 유전자가위 농작물에 대해 뚜렷한 공식 기준이 아직 마련되지 않았는데, 이제 국내에서도 관련 논의가 시작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유전자가위 농작물에 지엠오 규제를 적용할지, 그 규제를 그대로 적용하지 않는다면 어느 선에서 어떻게 규제가 이뤄져야 할지에 관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유전자가위 기술이 일으키는 유전자 변이의 정도가 경우에 따라 달라지기에 규제의 정도로 경우에 따라 달라져야 하고, 또한 최근에 유전자가위 기술로 인해 생기는 의도하지 않은 변이에 관한 여러 연구도 발표되고 있기에 이런 문제는 안전성 측면에서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에 대해서도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오철우 선임기자
cheolwo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