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영국 에든버러에서 10개월 동안 16명을 연쇄살인 한 버크와 헤어의 끔찍한 범죄는 여론을 자극해, 공리주의자 윌리엄 벤담 등에 의해 추진되었지만 한 번 기각되었던 해부 관련법이 통과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들의 이야기는 여러 번 영화와 연극으로 각색되었다. 사진은 2010년 영국에서 개봉한 블랙 코미디 영화 <버크와 헤어(Burke & Hare)>의 포스터 장면. <스타 트랙>의 스코티 역으로 국내에 이름을 알린 사이먼 페그와 <반지의 제왕>에서 골룸 역을 맡았던 앤디 서키스가 주연을 맡았으나 흥행에는 실패했다. 출처: IMDb
1829년 1월28일 영국 에든버러에서, 2만5000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범죄자 윌리엄 버크가 교수형에 처해졌다. 10개월 동안 16명을 살해한 윌리엄 버크와 그 일당 윌리엄 헤어는 악당임이 틀림없었지만, 짧은 동안에 엄청난 수의 목숨을 빼앗은 이유는 남달랐다. 그들은 돈을 목표로 했지만, 피해자들은 그렇게 부유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살인을 통해 돈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살인을 저지르고서 그 시체를 해부학 실습실에 파는 방식을 통해.
당시 에든버러는 스코틀랜드 계몽운동의 중심지였다. 철학자 존 로크의 영향을 받은 철학자 프랜시스 허친슨은 글래스고대학에서 도덕 철학을 가르치면서, 영국 경험론의 절정에 선 철학자 데이비드 흄과 자유주의 경제학의 선구자 애덤 스미스를 이끌었다.
계몽운동의 지적 토양을 바탕으로, 에든버러는 의과학의 중심지로 거듭났다. 스코틀랜드 임상의학을 이끌었던 알렉산더 먼로 부자(父子), 혈관 계통에 관한 근대적 수술 기법을 정립한 존 벨, 세포 이론의 선구자였던 존 굿서 등이 당시 의학 기술의 총아였던 해부학 강의를 바탕으로 근대 의학 교육과 연구에 매진하고 있었다. 잉글랜드의 의과대학은 입학과 수학에 상당한 사회적 지위가 요청되는 신학 전공을 선결 조건으로 내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의학에 큰 뜻을 품었던 당대의 청년들이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로 몰려든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진화론의 아버지 찰스 다윈이 에든버러에서 유학 생활을 하며 의학을 공부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 해부학 교수들은 각자 해부학 실습실을 운영했기 때문에 카데바, 즉 해부학 실습용 시신의 수요가 급증했다. 당시 스코틀랜드 법은 범죄자, 범죄피해자, 고아, 신원 미상의 시신만을 대상으로 해부를 허가했다. 그러다 보니, 수요가 공급을 월등히 초월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각국에서 몰려든 유학생에 힘입어 에든버러는 대도시로 탈바꿈해가는 중이었지만, 19세기 초 에든버러의 인구는 10만 명 안팎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에서, 시신을 비정상적인 경로로 제공하는 일들이 발생했다.
‘해부용 시신’ 돈벌이 위한 끔찍한 연쇄살인
무덤 도굴꾼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무덤에서 시신을 도굴해 해부학 실습실에 팔아 넘겼다. 그렇지만 이를 금지하는 법은 없었다. 시신은 사적 재산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를 도굴한다고 하여 법으로 제재할 근거가 마땅찮았다. 물론 유족이나 마을 사람들에게 들키면 사적 제재나 복수를 당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1832년 해부학 법(Anatomy Act)이 제정되어서야 시신 도굴과 매매를 처벌할 수 있는 기준이 마련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누가 시신을 도굴하고, 심지어 판매하리라 생각이나 했겠는가. 여기에 마침표를 찍었던 것이 버크와 헤어 일당이 벌인 연쇄살인 사건이었다.
이들은 시신 도굴을 넘어 직접 시신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선택했다. 처음은 의도적인 것이 아니었다. 헤어의 집에 하숙하던 사람 한 명이 병으로 급사하자, 손실을 슬퍼하던 그들은 시신을 해부학 실습실에 파는 방법을 떠올렸다. 시신을 빼돌린 그들은 당시 400명에 가까운 제자를 가르치던 유명한 해부학 교수 로버트 녹스에게 시신을 팔았다. 이것이 수입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 둘이 실제로 범죄를 저지르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세기 연쇄살인범 버크와 헤어.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이 사건은 세간의 화제가 되어 “버크”는 한동안 시신을 만들기 위한 살인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었고, 버크, 헤어, 녹스의 이름이 들어간 민요가 에든버러에 유행했다. 의과학 발전의 선두에 서 있던 해부학자 녹스는 이후 버크 일당 사건을 사주한 괴짜 의사로 기억되었다. 버크는 교수형에 처해져 시신이 해부학 실습실에 기증되었다. 덕분에 그의 뼈가 에든버러 의과대학 해부학 박물관에 남게 되었다. 버크 일당 사건은 런던에서 벌어진 비슷한 사건(‘런던의 버크’)과 함께 해부학 법이 통과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사건이 남긴 가장 큰 영향은 처음으로 인간 신체가 상품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었다는 데에 있다.
사람을 대상화하는 것, 또는 철학자 칸트의 표현을 빌자면 인간을 수단으로서 대하는 일은 인류의 탄생과 함께 계속 이어져 왔다. 전쟁 포로를 노예로 삼는 것이 대표적인 인간 대상화의 사례다. 원시 부족의 결혼 풍습에도 여성 또는 여성의 재생산 능력을 수단으로 다뤘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미 없어진 지 오래지만, 고대의 주술이나 그 한 형태인 식인 풍습에서도 신체의 대상화를 방식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신체가 주체성 또는 영혼과 분리되어 그 자체로 상품이 되는 일은 이전에 찾아보기 어려웠다. 근대 제국주의 국가의 노예제도는 노예 노동력을 매매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는 점에서 신체 자체의 매매에 도달한 것은 아니었던 탓이다. 하지만 19세기 초, 의학은 자본에 신체를 상품으로 바라볼 수 있는 렌즈를 제공했다.
신체 각부의 상품화와 인종 차별의 연쇄
비슷한 시기 남아프리카 코이족의 일원이었던 사라 바트먼의 사례가 당시 진행되고 있던 신체의 상품화에 더 적실한 예를 제시해 줄 수 있을 것이다. ‘호텐토트 비너스’라는 별칭으로 불렸던 그는 노예로 잡혀와, 영국 해군 외과의였던 윌리엄 던롭을 주인으로 섬기고 있었다. 당시 유럽인은 코이족을 “인간과 원숭이 사이 잃어버린 고리”로 여겨 ‘호모 몬스트로시스 모노키데이’(Homo Mostrosis Monorchidei, 괴물 같은 고환을 지닌 인간)라는 학명을 붙였다. 코이족의 생식기와 엉덩이가 유럽인의 눈에 과도하게 발달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던롭은 1810년 런던으로 이주하면서 바트먼에게 부를 약속했다. 약속을 믿었는지 그를 따라온 바트먼은 파티에서 맨몸으로 구경거리가 되어야 했다. 유럽인들은 그를 구경하기 위해 찾아왔고, 그들 중에는 과학자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사슬에 묶여 비참한 대우를 받던 바트먼은 결국 프랑스 서커스로 팔려갔다. 5년 동안 전시품 취급을 받은 그는 정체불명의 감염병으로 25세에 사망했다.
사라 바트먼은 프랑스 서커스로 팔려가 <괴물 쇼(Freak Show)>에 전시되었다. 그의 신체적 특징은 열등 인종의 과학적 증거로 제시되었다. 그는 신체 각부가 교환가치를 띠기 시작한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그림은 영화 <블랙 비너스>의 한 장면. 2010년 압둘라티프 케시시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여전히 끝나지 않은 사라 바트먼의 슬픔을 이야기한다. 출처: IMDb
조르주 퀴비에(1769~1832)는 고생물학을 이끈 전설적인 프랑스 동물학자였다. 근대 생물 분류학을 정립한 스웨덴 식물학자 린네의 작업을 계승해 발전시킨 그는 동물을 4부문 15군으로 나눈 분류표를 작성하고, 저서 <동물계(The Animal Kingdom, Distributed According to its Organisation)>를 남겼다. 하지만 그는 업적 못잖게 오점도 남겼다. 그는 바트먼의 사례를 통해 과학적 인종 차별에 일조했다.
그는 한 저서에서 “유럽인의 타원형 얼굴, 직모, 오뚝한 코는 문명과 미를 상징하며, 그 천재성, 용기, 활력을 드러낸다”라고 적었다. 그런 그의 눈에 아프리카인의 외형은 열등함의 지표였다. “턱의 돌출, 두꺼운 입술은 원숭이와 직접적인 연결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이들은 야만의 상태에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
조르주 퀴비에(1769~1832).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그가 바트먼을 놓쳤을 리 없다. 생전에 바트먼을 관찰한 퀴비에는 돈을 주고 신체 각부를 세밀하게 관찰하여 기록을 남기려 들었다. 그의 특징이 인종적 열등함과 과발현 한 생식능력을 보여주는 증거라면서 말이다. 바트먼은 거절했다. 결국, 바트먼 사후에 퀴비에는 그의 시신을 사들여 해부했다. 그의 신체적 특징에 열등함의 가치가 부여되었고, 그의 신체는 차별과 멸시의 대상이 되었다. 부족의 특징인 둔부지방경화증(Steatopygia)이 사냥감 동물을 장기간 추적하여 포획하는 데 필요한 열량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 알려진 것은 최근의 일이다. 바트먼의 신체는 파리 인체박물관(Mus?e de l’Homme)에 전시되어 있다가, 식민, 인종 차별 반대의 운동이 목소리를 드높인 2002년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반환, 매장되었다.
신체 상품화의 직접적인 예시는 아니나, 비슷한 일이 일제 강점기에도 벌어진 적이 있다.[1] 1920년대 이 땅에서 광범위하게 실시되었던 혈액형 분류 조사는 일본인이 조선인보다 인종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로 활용되었다. 1901년 오스트리아 면역학자 칼 란트슈타이너는 적혈구가 다른 사람의 혈청으로 응집되는 것을 발견해 에이(A), 비(B), 오(O)형 식으로 혈액을 분류했다. 이에 기초해 독일 내과 의사 둥게른, 폴란드 생물학자 힐슈펠드는 1919년에 저명한 의학 학술지 <랜싯>에 ”인종별 혈액의 혈청학적 차이”라는 논문을 발표해 인종의 우열을 혈액형으로 구분했다.
그들의 인종계수는 진화한 민족일수록 B형보다 A형이 많다는 가설에 근거하고 있었다. 영국(4.5), 프랑스(3.2), 이탈리아(2.8), 독일(2.8)과 비교해 흑인(0.8), 베트남(0.5), 인도(0.5)는 인종계수가 낮았던 것이다. 논문은 인종계수가 2.0 이상이면 유럽형, 1.3~2.0에 속하는 아라비아, 터키, 러시아 등은 중간형, 1.3 미만은 아시아-아프리카형으로 분류했다.
1922년 기리하라 논문의 혈액형 조사 결과를 재구성한 일본인, 조선인의 혈액형 분포표. 혈액이 물화되어 실체적 가치를 띠게 된 역사적 사례이다. 출처: 대한의사학회 논문
경성의학전문학교 외과학교실 기리하라 교수와 제자 백인제는 1922년 7월 <동경의사신지>라는 학술지에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ABO식 혈액형 분류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과 지역별 조선인의 인종계수를 비교한 논문은 일본인(1.78)은 중간형, 조선인(0.83~1.08)은 아시아-아프리카형에 속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전남(1.41)만 중간형에 속했는데, 기리하라는 이를 일본과 조선의 역사적, 언어적 유사성을 보여주는 증거일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의학이 활용된 방식을 보여준다. 또한, 혈액이라는 신체 일부가 인간 존재와 분리되어 그 자체로 가치를 부여받는 과정의 일환이었다.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이다지도 욕될까
인류학자 레슬리 샤프는 이런 신체의 대상화, 상품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생물 의학 기술(biomedicine technology)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2] 이전에도 의학의 대상화하는 응시의 문제는 프랑스 철학자 푸코의 저작을 통해 제기된 바 있다. 해부의 기술이 생물 의학에 가져온 인식론적 전환은 새로운 형태의 지식과 그를 통한 사회정치적 권력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했다. 푸코의 시각을 아프리카 남부의 식민지화 과정에 대입한 버차트의 연구는 신체적 외형에, 특권화된 해부학에, 주체성의 구축에 의학의 인식이 가져온 변화를 실증적으로 제시했다.[3] 그만큼 의학적 실천 속에 이미 인간 신체의 대상화가 깊이 내재해 있는 것이다.
물론 치료를 위해서 신체를 대상화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의료진이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기 위함이기도 하며, 헌혈이나 장기 기증 등은 신체를 대상화하지 않으면 이뤄질 수 없는 헌신이다. 그러나 세계대전에서, 그리고 그 이후 여러 방면으로 확대된 생물 의학 기술은 “삶과 죽음, 인간과 기계, 주체와 타자”의 경계를 허물기 시작했다. 이제 생물 의학은 타인의 신체를 넘어 자신의 신체까지도 상품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의료화된 신체는 “물화, 고립, 맥락의 상실, 추상화”를 거치며 그 고유성을 상실하고 상품화의 흐름에 빠져들게 된다. 이런 신체의 상품화, 분절화는 “비인간화의 더 진전된 형태이다.” 의학은 잘 벼려진 칼이지만, 그것은 사람을 살릴 수도, 신체를 그저 한낱 상품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슬픈 역사가 떠오르는 이유는 최근 번지고 있는 ‘미투’(#MeToo) 고백 때문이다. 서지현 검사가 1월 말 안태근 전 검사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폭로하면서 불이 붙은 한국의 미투 고백은 검찰을 넘어 문화예술, 대학, 언론, 종교, 의료, 기업까지 번지고 있다. 글을 준비하던 와중에 안희정 전 충남지사 사건까지 접했다. 개인적으로 호감을 느끼고 있던 정치인이던 터라, 그 충격이 더하다.
국내외 공히 미투 고백이 폭로하는 사건들에 대해서는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전용하기 위한 남성의 권력 남용이라는 분석이 제시되고 있다. 그 말을 정신분석학을 경유해 좀 더 풀어보자면, 남성이 지닌 대상화 시선의 권력을 사회가 정당화하며, 이를 작동시킬 수 있는 위계적 구조를 통해 욕망의 회로가 작동하여 여성을 단지 자신의 성적 욕망의 해소처로 “대상화” 해 온 사회의 치부가 드러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다시 칸트의 말로 돌아간다. 그는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는 것이 윤리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인간만이 윤리의 자기 입법을 해낼 수 있는 자율적 존재라는 사실이 인간에게 존엄성을 부여하며, 이 존엄성이 인간을 수단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윤리 법칙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남성 권력자가 여성을 자신의 성적 욕망의 수단으로 삼아온 과거들이 들춰지고 있는 지금, 같은 방식으로 신체를 수단으로 삼아왔던 내 지적 토양의 치부가 너무도 부끄럽게 다가온다.
[참고문헌]
[1] 정준영. 피의 인종주의와 식민지의학: 경성제대 법의학교실의 혈액형인류학. 의사학. 2012;12:513-549.
[2] Sharp LA. The commodification of the body and its parts. Annu Rev Anthropol. 2000;29:287-328.
[3] Buchart A. The Anatomy of Power: European Construction of the African Body. Pretoria: University of South Africa, 1998.
김준혁/치과의사,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대학원생(의료윤리학)
junhewk.kim@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