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과 경쟁을 이야기할 때 우리가 쉽게 떠올리는 게 육상 경기다. 하지만 우리의 삶에는 온전히 내 것이어서 나만 사용할 수 있고 또 남으로부터 영향 받지 않을 것을 보장받을 수 있는 트랙이란 게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의 간섭 행위가 있더라도 그것이 실제로 누가 누구를 간섭해서 생긴 일인지가 제3자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경우도 많다. 사진은 8월 초 영국 런던에서 열린 2017 세계육상선수권대회 남자 100m 예선경기 장면. 연합뉴스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구질구질하게 이타성이니 도덕이니 이런 얘기는 필요 없다고. 어차피 사람들은 자기 보존을 제일로 치기 미련이고 따라서 이기적일 수밖에 없으며, 그랬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라고. 따라서 이를 가지고 왈가왈부할 게 아니라 이기심이 갖고 있는 엄청난 힘을 잘 활용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냐고.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자기 이익을 챙기려고 하는 욕구가 삶을 얼마나 역동적이고 진취적으로 만드는지 모르냐고. 근대 사회가 성취해낸 엄청난 부의 증대와 진보가 그 증거 아니냐며. 그 누구도 아니고 나 자신을 위해 노력하는 것, 그럼으로써 결과적으로 물질적 진보를 이루어내는 것이야말로 이른바 새로운 도덕 아니겠냐고.
러시아 태생의 소설가 아인 랜드가 1957년 쓴 <아틀라스>라는 소설은 이러한 관점을 잘 보여준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모두 자신의 이기심을 밀고 나가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고, 기업가 정신을 통해 “진정한”(!) 진보를 이뤄내는 사람들로 그려진다. 이에 반해 소설 속에서 평등을 이야기하고 사회 정의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뒤처져 있으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의 발목을 잡고 불만만을 털어놓는, 그러면서도 진취적 기업가들이 힘겹게 이뤄놓은 성과물에 눈독만을 들이는 ‘악당’들로 그려진다. 아인 랜드의 눈에 이타주의는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 타인의 힘에 빌붙어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논리일 뿐이고, 그러한 의미에서 도덕이 아니라 악으로 비친다.
맨더빌, “탐욕은 우리 사회 번영의 기초”
또 다른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이타성이니 도덕이니 하는 것은 모두 지배계급이 사람들을 체제 내에 머물도록 만드는 계략이며 통치도구가 아니냐고. 도덕이란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에게 자신의 신분에 맞게 살며 나서지 말라는 명령 아니냐고. 올바름이라는 게 뭔지는 모르겠으나, 지금까지 그랬듯이 그것은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을 옥죄는 도구 아니었냐고.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남을 위해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고 명령하면서, 다수의 대중들이 스스로의 이익에 관심을 갖는 것을 죄악시하고, 정작 지배자 자신들은 그로부터 이득을 얻어내는 것 아니냐고.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 이주한 버나드 맨더빌은 18세기 초반 대표작 <꿀벌의 우화>에서 당시 도덕주의자들을 겨냥해 “도덕이란 사람들을 다루기 쉽게 바꾸어 쓸모있게 만들고자 솜씨 좋은 정치인들이 꺼내들면서 비롯된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야심가에게 더 큰 이득이 돌아가도록,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을 쉽고 확실하게 다스릴 수 있도록 꾸며낸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했다. 맨더빌의 주장에 따르면, 지배계급이 사회를 유지해올 수 있었던 비밀은 “사람들을 설득하여, 욕구에 빠지는 것보다 욕구를 이겨내는 게 낫고, 저만 생각하는 것보다 모두를 걱정하는 게 훨씬 좋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었다. 맨더빌이 보기에 이것이야말로 이른바 도덕의 본질이었다. 그는 “우리를 사회적 존재로 만들고 모든 형태의 거래와 고용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은 예외없이 악”이고(도덕이 아니라!), 악으로서의 “탐욕이야말로 우리 사회 번영의 기초”라고 주장했다.
누군가는 또 이렇게 말했다. 이타성이니 도덕이니 하는 것 모두 옛날얘기 아니냐고. 좁은 사회 그리고 소규모의 전통 사회 속에서야 구성원들간에 공유된 목적이 중요했을 수 있고, 또 연대와 이타주의적 본능에 의존해야만 사회의 질서가 유지되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 상태에 머물렀더라면 우리는 여전히 좁은 사회에 갇혀 살 수밖에 없었을 것 아니냐고. 서로의 목소리가 들리고, 서로를 지켜볼 수 있는 좁은 사회에서나 어울리는 도덕률은 거대한 사회에서는 더 이상 어울리지 않을 뿐 아니라 거대한 사회로의 전환을 가로막는 방해 요소 아니겠냐고.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1988년 저작 <치명적 자만>에서 이러한 견해를 피력했다. 그는 “모든 사람을 이웃으로 여겨야 한다는 명령에 대한 복종은 확장된 질서의 성장을 방해했을 수도 있으며, 현재 확장된 질서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서로를 이웃으로 취급하지 않음으로써, 서로의 관계에서 연대감과 이타주의의 질서 대신에 개인의 소유와 계약의 질서와 같은 확장된 질서의 규칙을 적용함으로써 이득을 얻는다”고 주장했다. 이보다 훨씬 앞선 시대에 데이비드 흄도 “관용이나 애정은 고결하여 사람들이 거대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게 하며, 또한 애정은 대부분의 사회에 모순된다”고 했다.
이에 덧붙여 누군가는 또 이렇게 말했다. 이타심이라는 충동은 사회의 기초로 삼기에는 너무나 미약하고 불안정한 것 아니냐고. 이타심을 전제로 사회를 구상했다가 사람들이 자기애의 유혹에 넘어가서 낭패를 보면 어쩌려고 그러냐고. 오히려 그것보다는 사람들이 어떤 동기를 갖든 상관없이 잘 작동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만들고, 굳이 이타심이 없더라도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법적·제도적 장치만 잘 갖출 수 있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이기적인 사람들이 자기 이익을 추구하도록 보장하고, 이익만 차리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피해 주지 않도록 혹은 피해를 준다면 가격을 통해 그만큼의 대가를 치르도록 보장하는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니냐고.
이러한 관점은 경제학자들에게서 흔히 발견된다. 어디까지가 내 것이고 어디까지가 남의 것인지를 잘 정의해주는 소유권이 갖춰지고, 이를 보장해주는 국가가 존재하며, 경쟁 메커니즘만 잘 구비되면, 각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더라도 사회적으로도 가장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1986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제임스 뷰캐넌은 1975년에 나온 <자유의 한계>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과일가게 주인을 개인적으로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의 처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다. 아마 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그가 극도로 가난에 허덕이는지, 엄청나게 부자인지 혹은 그 중간 어디쯤 있는지에 대해서 알지 못하며 또 알 필요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효율적으로 거래를 이루어내는데, 그것은 우리가 모두 각자의 소유권에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찰스 슐츠도 <사적 이익의 공적 사용>이라는 책을 통해 “시장과 같은 제도는 연민, 애국심, 동포애 그리고 문화적 연대감과 같은 감정을 필요 없게 만든다”고 했다.
정말 그럴까? 이타성은 거대한 현대 사회에는 더 이상 어울리지 않으며, 역동적인 이기심에 기반한 경제적 활동이 얻어낸 물질적 성취의 발목을 잡는 낡은 감정에 불과할까? 그리고 이타성이란 누군가가 누군가를 착취할 때 교묘히 사용하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불과할까?
어쩌면 앞에서 펼친 주장들이 잘 들어맞는 예는 육상 경기일 것이다. 육상 경기에서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가장 좋은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남을 이기기 위해서 열심히 해야 한다. 그것이 0.1초, 0.01초라도 기록을 줄일 수 있는 유일한 길이고, 그것이 육상 전체의 발전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 육상 경기에서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만 있으면 된다. 트랙이 잘 구별되어 옆 트랙 경기자의 경기를 방해하지 않아야 한다(즉 트랙의 소유권이 잘 정의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혹시나 발생할 수 있는 간섭 행위를 적발하기 위해 심판과 카메라가 지켜보아야 한다(즉 소유권이 제대로 행사되는지를 보장해주는 법적 제도가 존재해야 한다). 육상 경기라면 경쟁 메커니즘이 효율적으로 작동하고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만으로도, 공정하면서도 최선의 결과가 보장될 수 있을 것이다. 육상 경기라면 서로를 겨루는 경기자들 사이에서의 연대, 이타성, 도덕 따위는 경쟁을 그르칠 뿐이며, 공정치 못한 결과를 낳을 뿐일 것이다.
아인 랜드의 소설 <아틀라스> 표지. 아인 랜드는 이타주의를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 타인의 힘에 빌붙어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논리일 뿐으로 본다. 위키피디아
‘외부성’은 어디에나 존재
우리는 때때로 너무 쉽게 세상을 스포츠 경기로 비유하곤 한다. 하지만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세상 일이 스포츠 경기처럼 돌아가지는 않는 것도 분명하다. 계속 육상 경기의 예를 들자면, 현실의 경주에서는 곳곳에 트랙이 지워져 있다. 지워져서 다시 그리면 되는 게 아니라 트랙 자체가 잘 정의될 수 없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서로의 간섭 행위가 있더라도 그것이 실제로 누가 누구를 간섭해서 생긴 일인지가 제3자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경우도 많다.
최근 노키즈존을 둘러싼 논쟁에서도 드러나듯이 하나의 장소를 이용하는 데에도 소유권을 가진 자와 그것을 이용하려는 자 사이에 갈등이 생길 수 있고, 이용자들 사이에서도 갈등이 벌어질 수 있다. 이런 경우에는 온전히 내 것이어서 나만 사용할 수 있고 또 남으로부터 영향 받지 않을 것을 보장받을 수 있는 트랙이란 게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서로 크고 작은, 그리고 좋고 좋지 않은 영향을 계속 주고받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의 경쟁만으로 좋은 해법이 나올 수 있을지는 그리 자명하지는 않다. 경제학 교과서에 나오는 과수원과 양봉업자의 관계에서도 잘 나타나듯이, 두 주체 사이에 서로 영향을 차단해주는 벽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에는 (경제적 영역에서조차도) 나의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 속에서 시장을 통하지 않은 채 상대방에게 영향을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도처에 있다. 경제학자들의 단어를 사용해서 말하자면 “외부성”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리고 각자가 자기 이익을 최대로 얻고자 하는 노력이 언제나 사회적으로도 최선의 결과를 낳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시장을 거치면 그리고 그 시장이 경쟁적으로 잘 작동하면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의 추구가 사회 전체의 효율성을 담보할 수 있다는 경제학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이더라도, 우리의 삶의 영역에서는 시장이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할 수도 없는 상황이 많다. 그래서 자기 이익만을 추구할 때보다는 조금 손해보더라도 자신을 절제할 때 사회적으로 (그래서 결과적으로 그 개인들에게도) 더 큰 이득을 줄 수 있는 죄수의 딜레마와 같은 상황이 도처에 있다. 서로 자기 이익만을 차려 물고기를 더 많이 잡으려 할 때 어장이 고갈될 위험에 처하게 되는 어부들의 비극이나, 자기 이익만을 차려 공유지에서 소의 꼴을 공짜로 가능한 한 많이 먹이려 할 때 목초지가 황폐화할 것이라는 공유지의 비극과 같은 상황은 몇몇 소규모 지역 공동체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엘리너 오스트롬이 <공유의 비극을 넘어>에서 주장하듯이, 이러한 죄수의 딜레마적 상황에서 시장적 해법보다, 그리고 국가적 해법보다, 당사자들 사이에서의 상호 감시와 상호 협력이 딜레마를 극복하는 데 더욱 효과적일 수 있다. 이러한 협력적 해법은 낡은 해법도 아니다. 요차이 벤클러가 <펭귄과 리바이어던>에서 잘 보여주었듯이,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의 발전과정은 이타적 협력을 통해 죄수의 딜레마와 같은 상황을 잘 극복해온 본보기이다. 협력적 해법은 정보기술 시대에 들어서면서 점점 더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다른 한편, 앞서 맨더빌이 신랄하게 지적했던 것처럼 이타주의가 지배자의 (감추어진) 착취의 도구로 사용된 경우도 분명 존재한다. 우리 사회에서도 이른바 이타주의라는 도덕적 강요가 누군가의 일방적 희생만을 요구하는, 그래서 그들의 목소리를 잠재우는 지배의 도구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지 않았는가. 과거 고도 성장기 노동자들은 성장이라는 목표 아래 일방적으로 “이타주의적” 희생을 강요당해왔고, 현재에도 열정페이라는 이름 아래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
18세기 초반 <꿀벌의 우화>를 쓴 버나드 맨더빌은 “우리를 사회적 존재로 만들고 모든 형태의 거래와 고용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은 예외없이 악”이라며 도덕을 정면으로 겨냥했다. 위키피디아
약자들간의 연대의 언어 될 수도
이타성에 기반한 협력이 죄수의 딜레마와 같은 상황에서 헤어나올 수 있는 해법이 되기 위해서는 그로부터 얻는 이득 또한 비교적 공평하게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개인들간의 평등한 지위가 확보되는 것이 필수적일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이타적 협력은 어느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일방적으로 나타나는 동정의 감정도 아니고 자선의 문제도 아니다. 죄수의 딜레마에서의 협력적 해법이란 동등한 개인들 사이에서 자발적 참여가 보장될 때 적용되는 이야기여야 하고, 그러할 때 이타적 협력은 강자에 대한 복종의 언어로서가 아니라 약자들간의 연대의 언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논의들이 이기심에 기초한 사회를 이타성에 기초한 사회로 대체해야 한다거나 하는 문제는 아니다. 그리고 이타적 협력의 문제의 출발은 “이렇게 해야 한다”라는 의미의 규범이 아니라 사람들이 실제로 “이렇게 한다”라는 의미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과연 여전히 현대 사회에서도 이타적 협력이 필요하고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가이다. 이는 우리의 삶의 영역 중 얼마나 많은 부분이 죄수의 딜레마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는가에 달려 있는 문제일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영역은 애정과 우애를 기초로 한 좁은 범위의 삶의 영역뿐 아니라 노사관계와 팀생산, 디지털 재화의 생산 등 시장의 심장부 곳곳에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