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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과학 과학

만일 내가 뿌린 씨를 내가 거둘 수 없다면…

등록 2017-06-30 19:57수정 2017-06-30 23:14

[토요판] 최정규의 우울하지 않은 과학
(4) 기술이냐 제도냐
고구마의 도입으로 오랫동안 유지되던 평등주의적 질서가 깨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뉴기니 고산지대 엥가 부족의 사례는 기술이 사회제도를 변화시키는 동력이라는 낯익은 가설을 뒷받침하는 사례라 할 만하다. 사진은 엥가 부족 모습. 위키피디아
고구마의 도입으로 오랫동안 유지되던 평등주의적 질서가 깨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뉴기니 고산지대 엥가 부족의 사례는 기술이 사회제도를 변화시키는 동력이라는 낯익은 가설을 뒷받침하는 사례라 할 만하다. 사진은 엥가 부족 모습. 위키피디아

농경의 시작은 인류의 역사에서 혁명적인 일이었음에 분명하다. 어떤 이들은 초기에는 어땠는지 몰라도 농업이 결국에는 잉여를 가져다주었고 인구를 증가시켰으며, 거대 국가와 문명의 토대가 되었다고 말했다. 다른 이들은 농업의 시작이 불평등과 생태계 파괴로의 문을 연 계기였다고 개탄하기도 했다. 농업은 누구의 눈에는 인류의 번영을 위한 축복의 계기였고, 또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저주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농업을 바라보는 시각은 서로 달라도, 농경의 시작이 인류 역사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혁명적 사건 중 하나라는 점에는 아마도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인류는 왜, 어떻게 농부가 되었을까?

농업은 지금으로부터 약 1만1000년 전에 처음 등장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시기는 지구상의 마지막 빙하기가 막 물러갔을 때이다. 농업의 최초 흔적은 현재 중동 지방(시리아·레바논·요르단·이스라엘 지역)과 터키 남부 지역에서 발견됐다. 이 지역은 동쪽으로는 페르시아만으로 이어지는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주변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는 지중해 동부 요르단 강 유역을 아우르는데, 그 모양이 초승달을 닮았다 해서 “비옥한 초승달”이라고 불린다. 이곳에서 밀과 보리를 경작하는 농부들이 출현했다.

마르크스, “기계방아가 자본주의 낳았다”

농경의 등장 전후로 큰 변화들이 있었다. 우선 이 시기는 인류가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않고 정착해 살기 시작한 거주형태의 변화와 맞물려 있다. 또한 무엇보다도 사적 소유권이 자리잡게 된 시점도 농업의 등장 시점과 어느 정도 일치한다. 그래서 농업과 정착, 그리고 사적 소유 이 세 가지는 하나의 묶음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시점에 따라 혹은 장소에 따라 이 선후 관계가 달리 나타나기도 하지만, 대체로 큰 틀에서 보면 이 셋은 서로 보완적인 관계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인류 사회의 불평등의 씨앗도 이 세 가지와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데 많은 인류학자와 고고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농업이 생산성을 증대시켰다고 보면 모든 게 간단히 설명된다.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를 생각해보자. 인류가 농업이라는 생산 방법을 채택하게 됨에 따라 인류의 생산력은 증대했고, 비로소 인류는 이른바 ‘잉여’를 갖게 되었다. 겨우 먹고사는 데 그쳤던 이전과 달리 잉여가 발생했고 사적 소유라는 게 생겼고 이로부터 일 안 하고 남이 일한 것을 착취해서 살아가는 지배계층이 등장할 수 있었다. 요약하자면, 새로운 생산기술이 나타나 생산력을 증대시키고, 그에 따라 새로운 경제적 (지배) 관계가 발생하게 된다는 가설하에서 만들어진 시나리오이다. 기술이 사회제도를 변화시키는 주된 동력이라는 관념은 매우 익숙한 관념이다. 카를 마르크스는 <철학의 빈곤>에서 손방아(맷돌)가 지주와 농노로 이루어진 봉건제를 낳았고, 기계방아가 자본가와 노동자로 이루어진 자본주의를 낳았다고 말했다.

인류학자들의 연구에서도 이러한 관념에 잘 들어맞는 사례가 자주 등장한다. 심스 올리버는 미국 중부지역 평원에 살던 인디언 부족에 말이 도입되면서 평등했던 관계가 위계적인 관계로 변하게 되는 과정을 추적했다. 그에 따르면 말의 도입은 버팔로 사냥을 수월하게 만들었고, 버팔로의 이동 경로를 따라 부족도 함께 이동하는 거주 패턴을 가능하게 했다. 말이 도입되면서 정착해 생활하던 부족들에 비해 거주지를 옮겨다니며 사냥을 주업으로 삼았던 부족들이 더 강성해졌다. 다른 부족을 습격해서 말을 획득하는 능력이야말로 용맹함의 척도이고 지도력의 척도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말은 부의 축적 수단으로 등장했고, 말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부와 권력이 결정됐다.

또 다른 예로 폴리 위즈너는 뉴기니 고산지대 엥가 부족을 연구하면서, 오랫동안 유지되어 오던 평등주의적 질서가 고구마의 도입으로 인해 균열이 생기면서 불평등하게 변하는 과정을 보여준 바 있다. 이 연구에 따르면, 고구마 경작이 가져온 높은 생산성이 사회적 변화의 중심에 있었다.

농업·정착·사적소유는 보완관계
불평등의 씨앗도 세가지와 연관
고구마 도입이 평등 깬 뉴기니 사례
“기술이 제도 변화의 동력” 가설 토대

초기 농부 생산성, 수렵·채취에 뒤져
기후·토양 맞아도 ‘자발적 전환’ 적어
농사짓기 포기한 바텍 원주민 해프닝
환경·인구 아닌 규범·제도가 더 중요

하지만 간명해 보이는 이 가설은 몇몇 사례에서는 잘 들어맞을지 몰라도, 적어도 농경의 출발을 설명하기에는 힘든 것 같다. 인류는 농부가 되기 훨씬 전부터 야생 상태에서 곡물이 어떻게 자라는지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는 데 많은 이들이 동의한다. 다만 본격적으로 농부가 되겠다는 선택을 하지 않고 있었을 뿐. 농부로의 전환을 꺼렸던 이유는 농업이 처음 등장했을 당시, 그 대체 방식으로서의 수렵 및 채취에 비해 생산성이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고인류학자들의 연구를 보면, 초기 농업은 수렵·채취 방식에 비해 훨씬 더 고된 작업이었는데도, 같은 시간을 일했을 때 얻어지는 칼로리의 양은 높지 않았던 것 같다. 사냥을 하고 열매를 따 먹던 시절에 비하면, 허리 부러지도록 일하고 얻는 영양소도 다양하지 못했다.

페르시아만에서 요르단강 유역에 이르는 ‘비옥한 초승달’ 지역 이외에도 농경이 독자적으로 등장한 곳은 꽤 있다. 하지만 이들 지역에서도 ‘자발적으로’ 농업으로 전환한 사례가 거의 없음을 보여주는 연구가 잇따르고 있다. 사진은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의 농사 현장 모습. 위키피디아
페르시아만에서 요르단강 유역에 이르는 ‘비옥한 초승달’ 지역 이외에도 농경이 독자적으로 등장한 곳은 꽤 있다. 하지만 이들 지역에서도 ‘자발적으로’ 농업으로 전환한 사례가 거의 없음을 보여주는 연구가 잇따르고 있다. 사진은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의 농사 현장 모습. 위키피디아
‘제도의 실패’를 보여주는 바텍 사례

카를레스 보익스와 프랜시스 로젠블루스는 고고학자들의 유골 분석 결과를 요약하면서, 초기 농부들의 신장이 수렵·채취를 기반으로 살았던 이들에 비해 작았음을, 그리고 영양상태가 안 좋았음을 드러내주는 흔적들을 보았다. 빈혈 때문인 것으로 추정되는, 뼈에 나타난 병변현상이나 골 질량 손실의 증거들, 그리고 치아를 둘러싸고 있는 에나멜의 부족 등이 그 증거였다. 샌타페이연구소의 새뮤얼 볼스는 현존하는 수렵·채취 부족들과 손도구를 이용해 농업을 하고 있는(그래서 초기 농부들과 유사하다고 여겨지는) 농부들의 노동생산성을 계산해 보았다. 한 시간의 노동으로 얻어낼 수 있는 열량으로 비교해본 결과, 이들 농부들의 생산성은 수렵·채취 부족민들의 생산성의 63%밖에 되지 않았다.

물론 초기 농업의 경우, 노동생산성에서는 수렵·채취에 비해 떨어졌더라도 토지를 집약적으로 사용했을 터이니 토지 단위 면적당 생산성은 더 높았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풍부했던 토지를 광범위하게 이용하는 기술(수렵·채취)을 포기하고 토지 절약적인 기술(농업)을 채택한 것은 적어도 경제학적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이러한 증거들을 토대로, 잭 할런은 1992년 저서 <작물과 인간>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왜 농업을 도입했을까? 주당 20시간만 사냥하면 나머지 시간을 즐길 수 있는데도, 굳이 태양볕 아래서 고생해야 했던 이유가 뭘까? 영양소도 풍부하지 못하고 또 공급도 안정적이지 않았던 작물들을 얻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일해야 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농업이 도입된 이래 기아, 질병, 전염병이 등장했고, 밀집된 공간에 사느라 생활환경도 극히 안 좋아졌을 텐데도?” 성경은 하나님이 자신과의 약속을 어긴 아담에게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살리라”는 벌을 내리면서 “들에서 나는 곡식을 먹어야 할 터인데,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리라 (…) 이마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얻어먹으리라”고 말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농사란 그만큼 고된 일이었을 거란 증거다.

지금까지 발견된 바에 따르면 지구상에서 농경이 독자적으로 등장했던 곳은 비옥한 초승달 지역 외에도 중국, 멕시코, 북부 페루, 고지대 뉴기니, 서부 아프리카 사헬 지역, 북미 동부 등 7개 지역 정도이다. 그 외 지역의 농경은 다른 곳으로부터의 정복이나 교류 혹은 농부들의 이주의 결과라는 말이다. 유사한 기후조건과 토양조건을 가졌더라도, 야생 작물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면서 혹은 화전 농법을 사용하면서 농사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가졌더라도, 실제로 ‘자발적으로’ 농부로 전환한 부족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예를 들어, 1770년 오스트레일리아 북단 케이프 요크에 도착했던 제임스 쿡 선장은 그 지역이 토레스 해협 건너 뉴기니와 다르지 않아 보이는데도, 뉴기니에서와 달리 오스트레일리아 대륙 북단에 거주하던 원주민들이 농사를 짓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고 의아해했다고 쓰고 있다.

따라서 농경은 높은 생산성 때문에 자연스레 시작된 것은 아니었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보는 쪽으로 견해가 모아지는 듯하다.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게끔 만들어 준 (선행)요인으로서 환경과 인구가 아니라, 규범과 제도에 주목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농경이란 기술적 지식만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이미 지식은 충분했다) 제도적 조건이 갖춰질 때 비로소 시작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오래전 인류학자인 커크 엔디컷은 말레이시아 수렵·채취 부족인 바텍 원주민들 사이에서 벌어진 해프닝을 보고한 적이 있다. 이야기인즉슨, 바텍 주민 두 사람이 농사짓는 법을 전수받아 볍씨를 뿌리고 농사를 시작했는데, 추수가 가까워질 즈음 다른 마을 주민들이 와서 맘대로 곡식을 추수해 가더라는 것이다. 벼농사를 지어보겠다던 이 두 사람은 몇 년 거푸 동일한 일이 생기자 결국 농사짓기를 포기하고 마을을 떠났다고 한다. 이는 농경의 도입 실패는 기술의 실패가 아니라 제도의 실패였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바텍 원주민들은 자연자원은 누구도 소유하지 못하며, 가족의 필요를 넘어서는 잉여는 다른 이와 나눈다는 규범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마을 주민들은 두 사람의 벼도 마찬가지로 간주했던 것이다.

농사란 추수 때까지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고, 그 동안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농사란 당시 기술로는 손을 엄청 필요로 했기에 일년 내내 노력을 기울여도 좋은 결과가 나올지 확실하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더 심한 불확실성은 제도적 요인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땀 흘려 만들어낸 생산물이 내게 돌아오리라는 보장이 없으면 1년 내내 쏟아부은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 버린다. 요컨대, 인류가 농경을 시작하려면 바로 그런 점에서 확실한 보장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농사가 제대로 될지 불확실성은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최소한 내가 뿌린 씨는 내가 거둘 수 있다는.

사적 소유가 농경에 선행했다

터키 서부지역에서 클라우스 슈미트가 발굴한 유적지인 괴베클리 테페와, 현재의 시리아 부근에서 앤드루 무어가 발굴한 아부 후레이라 유적지는 인류가 농부가 되는 이른바 ‘제도적’ 경로를 보여주고 있다. 이 둘은 농경이 시작되기 전부터 오랫동안 정착촌을 이루고 있었던 증거와 함께, 집집마다 야생 곡물을 보관할 식량창고를 갖는 등 상당한 정도의 사적 소유가 갖춰졌음을 보여주는 유적들이다. 경제학자인 대런 아제모을루는 그의 책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괴베클리 테페에서 발견된 초기 의식용 건물을 보면서 이 지역에서는 농경이 도입되기 이전부터 불평등이 상당히 진전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내기도 했다. 그리고 불평등하에서 엘리트층이 착취를 손쉽게 하기 위해 저장이 가능한 곡물 생산으로의 이전을 강제했다고까지 주장했다. 이 두 곳에서 발견되는 사적 소유의 흔적들이 얼마나 불평등의 심화를 말해주고 있는지의 여부는 여전히 논란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곳에서는 농경사회로의 전환 이전에 이미 이를 위한 제도적 여건으로서의 사적 소유가 꽤 진전되어 있었음을 말해준다.

새뮤얼 볼스와 필자는 고고학적 증거를 토대로 수리 모형을 짠 후 이를 기초로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농업과 사적 소유의 진화를 재현해본 적이 있다. 우리의 시뮬레이션 결과는 다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1) 농업의 발생이 1000번 시행에 31번 일어날 정도로 쉽지 않았던 사건이었고, (2) 그 31번의 이행은 모두 사적 소유권과 함께 진화했으며, (3) 사적 소유가 농경에 선행해 농업생산을 이끌더라는 것. 말하자면, 아부 후레이라에서 나타났음직한 모습이었다. 농경의 시작을 둘러싸고 나타나는 여러 사회적 변화는 생산기술과 사회적 제도와 관련한,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식의 문제이다. 그런 점에서 기술과 제도의 상호작용을 깊이 생각해볼 기회를 준다. 인류학자들은 수렵·채취 사회에서 주로 발견되는 평등적 관계와 공유의 규범이 어떻게 유지되었고, 어떻게 해체되면서 위계와 사적 소유와 불평등으로 이어지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들을 보여주고 있다. 말하자면 기술은 그대로인데, 규범 등의 제도가 변하고 새로운 제도가 새로운 기술 도입으로의 길을 열 가능성들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제도의 변화에 대해 좀 더 이해할 수 있을 때, 인류가 농부가 되는 과정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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