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최정규의 우울하지 않은 과학
(3) 효용함수라는 신화
(3) 효용함수라는 신화
경제학 이론의 발전 과정은 가치판단을 개인의 주관적 선택의 영역으로 돌림으로써 이른바 윤리적인 문제를 회피하는 길을 택한 편이다. 하지만 개인으로부터 출발하면서도 눈앞의 사적인 이해를 실현하는 데에만 골몰한 개인을 넘어설 수 있는 여지는 존재한다. 사진은 아이쿱생협 회원들이 친환경 농산물의 직거래를 통해 ‘윤리적 소비'의 실천을 다짐하는 퍼포먼스를 하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정보·소득 등 ‘조건’ 차이 눈감아
취향이 일종의 ‘데이터’라는 태도
가치판단 없이 선택 자체 존중 뜻 근대 자유주의적 세계관 반영된 결과
전통·관습으로부터의 해방 계기도
개인의 주관적 선택 강조함으로써
경제학은 윤리적 판단 회피 경향 취향은 가치판단의 대상이 아니라는 말 이제 “효용함수를 가지고 장난치지 않는다”는 말을 이와는 조금 다른 측면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이 말을 좀더 근본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원하는 것이 서로 다른 경우라도 누가 어떤 것을 좋아하든 그것을 그 자체로 받아들여야지, 왜 그것을 좋아하는지, 그것을 좋아하는 게 옳은 일인지 등등의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설령 개인들 간에 무엇을 원하는지를 둘러싸고 차이가 있더라도 그 차이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말자는 것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게리 베커는 1974년 조지 스티글러와 함께 쓴 ‘취향에 관해서라면 논의해서는 안 된다’(De gustibus non est disputandum)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로키산맥이 어쩌다 거기에 있게 되었는지를 가지고 논쟁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 우리는 취향에 대해서 논쟁하지 않는다. 취향이건 로키산맥이건 모두 거기 있으며, 내년에도 거기에 있을 것이고, 누구의 눈에도 그렇게 보인다.” 이러한 주장을 조금만 더 밀고 나가 보자. 이러한 입장은 ‘원하는 것’, ‘달성하고자 하는 목적’ 그 자체에는 고상함도 저급함도 없으며, 옳고 그름이라는 가치판단의 대상도 아니라는 얘기일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돼지의 취향이나 소크라테스의 취향은 너무나도 다르겠지만 어떤 것은 저급하고 어떤 것은 고상한 것이라는 등의 얘기는 하지 말자는 것이다. 누구는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고 누구는 힙합을 좋아할 때, 두 취향은 가치판단의 대상이 아니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일종의 ‘데이터’처럼 취급하자는 얘기다. 누가 무엇을 좋아하는지에 대해 제3자가 가치판단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척이나 자유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만큼(혹은 딱 그 정도로만) 진보적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A를 B보다 좋아한다고 했을 때 “왜 A를 더 좋아해?”라고 질문을 하는 경우, 그가 그러한 선호를 갖게 된 이유가 궁금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대부분 “네 선택은 이상해” 혹은 “네 선택은 옳지 않은 것 같아”라는 가치판단을 전제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고기를 먹지 않아”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왜 그래?”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단순한 호기심 때문일 수도 있지만, “네 취향은 이해를 할 수 없구먼”이라는 부정적인 가치판단이 깔려 있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판단에는 옳은 선택이라는 게 있고 옳지 않은 선택이라는 게 있으며, 선택이 옳지 않다면 그것은 바로잡아야 할 대상으로 보겠다는 인식이 깔려 있는 셈이다. 누군가의 선택에 대해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혹은 “그러한 선택이 바람직한 것일까?”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 것은 (무관심해 보일지 몰라도) 그 사람의 선택을 가치판단하지 않고 그 자체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그러한 선택이 음식에 대한 것이든, 자신의 진로에 대한 것이든, 배우자 선택에 대한 것이든, 혹은 성적 취향에 관한 것이든, 그 판단에 대해 제3자가 어떠한 가치판단도 하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의 선택 그 자체에 대한 존중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애덤 스미스 <도덕감정론>의 메시지 거칠게 말하면, 첫번째 해석은 사람들이 제대로 선택을 하려면 적어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기회 및 조건을 평등하게 갖출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반면, 두번째 해석은 스스로 내린 선택에 대해 제3자가 가치판단을 하지 말 것을 주문함으로써 개인의 선택을 그 자체로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서로 강조점이 달라 미묘한 차이는 있어 보이지만 두 가지 해석 모두 경제학이 지니고 있는 근대 자유주의적 세계관을 잘 드러내준다. 19세기 초반 찰스 다윈은 비글호를 타고 5년 동안 세계를 여행하던 중 마지막 방문지였던 남미에서 그곳 노예들의 비참한 삶의 모습을 목격했고 “비참한 생활상이 태생적인 원인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제도 때문이라면, 우리의 죄악은 엄청난 것이다”라고 썼다. 앨버트 허시먼은 이러한 시각, 즉 불행이 신의 뜻도 아니고 개인의 본성 때문도 아니고 사회적 제도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은 근대에 이르러 비로소 확산되기 시작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사회 문제를 바라볼 때, 개인이 원하는 것이 다르다는 사실로 문제를 귀착시키지 말고, 조건의 문제로 그리고 제도의 문제로 바라봐야 한다는 관점은 이러한 시각의 연장선 상에 있다. 더 나아가 개인의 선택에 대해 옳다 그르다 말하지 않고 그 자체로 긍정해야 한다는 인식이 개인을 종교와 전통, 그리고 관습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계기가 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하고, 내 재산을 쌓아 나가고, 내가 바라는 삶의 전망을 수립하는 일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그동안 나의 선택을 둘러싸고 가해졌던 관습과 규범, 종교, 그리고 계급 이데올로기의 영향으로부터 탈피해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이 가능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만 이야기하고 나면 여전히 뭔가 찜찜한 구석이 남아 있을 수도 있겠다.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서 가치판단을 하지 않고 그 자체로 받아들인다면, 뭔가 중요한 도덕적인 문제를 도외시하는 것은 아닐까? 앞의 논리를 그대로 밀고 나가 보면, 누군가의 목적에 대해서 그것이 고차원적인 목적인지 혹은 저급한 목적인지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을 것이며,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기로 했기에, 선택에 대한 윤리적 판단은 불가능해져 버린 셈이다. 라이어널 로빈스는 그의 1935년 저서 <경제학의 본질과 의미에 관한 에세이>라는 책을 통해 이러한 입장을 일관되게 견지해나간 결과, 선호에 대해 묻지 않는 경제학과, 목적 그 자체가 옳은지의 여부를 따져야 하는 윤리학 사이에는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어떠한 연결고리도 없다”고 단언하게 되었다. 정녕 이 말을 받아들인 채 여기서 멈춰야 하는가? 아무튼 경제학 이론의 발전 과정을 되짚어보면, 가치판단의 문제를 개인의 주관적 선택의 영역으로 돌리고 제3자의 “간섭” 대상이 아니라고 간주함으로써 이른바 윤리적인 문제를 ‘외부’로 내치는 쪽을 택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경제학과 윤리학 사이에는 정말 어떠한 연결고리도 없을까? 이제 우리 앞에는 스스로 좋고 나쁨을 판단하고, 스스로 좋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선택을 내릴 수 있고, 그 선택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을 지는 개인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개인들은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선택을 내리는 것을 방해하는 제약(그것이 타인의 가치판단이든 혹은 경제적, 제도적 여건이든)에 저항한다. 이처럼 자율적인 개인으로부터 출발하게 되면 도덕적인 고려, 윤리적인 고려가 들어설 여지는 사라지게 되는가? 윤리적 가치판단은 언제나 개인을 ‘억압’하는 것일 수밖에 없는가? 개인을 넘어서 저 멀리 존재하는 윤리를 사고하는 게 아니라, 개인들 스스로 자신의 행동에 대한 도덕적 평가를 수행하는지를 확인해보면 어떨까? “효용함수를 가지고 장난치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갖는 자유주의적 태도를 견지하면서도 도덕을 이야기할 수 있는 여지, 개인으로부터 출발하면서도 눈앞의 사적인 이해를 실현하는 데에만 몰두하고 있는 개인을 넘어설 수 있는 여지가 있는지가 관건이다. 바로 이것이 애덤 스미스가 <도덕감정론>이라는 책을 통해 하려고 했던 작업이다. 다음 언젠가는 이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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