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은 단지 자원을 배분하는 기제만이 아니라 거래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문화적·이데올로기적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며, 그 영향력은 다분히 양면적일 수밖에 없다. 사진은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한 시장 진열대 모습. 위키피디아
1980년대 초반 일군의 경제학자들은 사람들의 행동을 얼마나 잘 예측할 수 있는지를 보기 위해 일련의 행동 실험들을 시작했다. 이를 위해 간단한 상황을 주고 어떤 의사결정을 하는가에 따라 현금 보수가 결정되도록 하면서 사람들의 행동을 관찰했다(대부분의 실험은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예를 들어 베르너 귀트라는 경제학자는 다음과 같은 실험적 상황을 놓고 사람들의 의사결정 과정을 지켜봤다. 서로의 신원을 모르게 조치를 한 후 두 사람씩 짝을 짓고 한 사람에게(이 사람을 A라고 부르자) 일정액의 현찰을 주면서 이 금액을 상대방(이 사람을 B라고 부르자)과 어떻게 나눌지를 결정하도록 한 것. B에게는 이 과정을 지켜본 후 A가 내린 분배 결정을 수락하거나 거절할 수 있게 했다. A의 결정을 B가 수락하면 A의 결정에 따라 두 사람이 돈을 나눠 갖게 되지만, B가 거절하면 두 사람은 한 푼도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만일 사람들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몫의 크기에만 관심을 갖는다면? 결과는 자명할 것이다. A가 자신에게 만원을 주든 5천원을 주든 10원을 주든 B는 이를 거절하지 않을 것인데, 수락하면 그만큼 몫이 돌아오지만 거절하면 한 푼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A의 입장에서 이를 알고 있다면 A는 B에게 최소한만을 건네준 채 나머지 전부를 자기가 갖도록 분배 결정을 할 것이다. 그리고 B는 이를 무조건 수락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결과는 한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귀트 연구팀의 보고에 따르면, A의 역할을 맡은 사람들은 상대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황인데도 대부분 50 대 50의 분배 결정을 내렸다. 상대방에게 20~30% 이하를 건네주겠다는 분배 결정은 빈번히 거부당했다. 미국, 슬로베니아, 일본(도쿄),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행한 실험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서로 친한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이런 결과가 나왔다면 그런대로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겠지만, 상대방의 신원을 알지 못하는, 즉 익명의 낯선 사람을 대상으로 한 실험을 통해 얻은 결과였기에 그만큼 더 관심을 끌었다. 이를 계기로 사람들이 의사결정을 할 때(모르는 상대와의 관계에서라도) 자신의 이익만이 아니라 공정함의 여부도 중요하게 고려하는 게 아니냐는, 또한 상대방이 지나치게 불공정하다고 느낄 때는 자신에게 돌아올 몫을 포기하면서까지 그 불공정함을 응징하려는 게 아니냐는 해석이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장에 통합됐느냐가 행동 좌우
90년대 말 조지프 헨리치라는 인류학자(당시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 인류학과 박사과정 학생이었다)는 페루 남동부 지역 아마존 인근에 거주하는 전통적 수렵채취 부족 마치겡가를 대상으로 현장조사를 준비하다가 지도교수로부터 위의 실험 이야기를 전해듣고 마치겡가 사람들에게 이 실험을 해보면 어떻겠냐는 아이디어를 냈다. 대부분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행해졌던 이전 실험들과 달리 현장실험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전통적 방식에 따른 소규모 공동체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결과를 얻을 수 있는지를 비교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흥미롭고 의미있는 아이디어였다. 몇 달 후 헨리치가 가져온 결과는 기존의 결과와 사뭇 달랐다. 마치겡가 사람들은 평균적으로 주어진 액수의 15%만을 상대방에게 전달했고, 20% 이하를 전달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10개의 제안 중 오직 한 건만 거절됐다고 한다. 외지인들과의 접촉이 별로 없다고 알려진 이 작은 부족 공동체 주민들에게서 공정한 배분이 거의 나타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불공정함에 대한 응징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결과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던 모양이다. 아무튼 이 결과에 관심을 갖게 된 쟁쟁한 인류학자와 경제학자들이 모였고, 이들은 이 실험을 15개의 수렵채취 부족으로 확대해 실시해보기로 했다고 한다.
이렇게 꾸려진 연구팀이 보고한 바에 따르면, 수렵채취인들로부터 얻은 결과는 보통 미국이나 유럽의 대학생들로부터 얻은 결과와 비교했을 때 몇 가지 점에서 달랐다. 우선 15개의 수렵채취 부족들은 얼마의 비율로 돈을 나누고자 하는지, 그리고 불공정한 제안이 있을 때 이를 응징하려고 하는지 등을 둘러싸고 매우 상이한 행동패턴을 보였다. 이들의 연구에 따르면 부족들 간의 차이를 설명해줄 수 있는 두 개의 요인이 있었는데, 이들 부족의 주요 경제활동에서 타인과의 협력이 중요할수록, 그리고 이들 부족의 경제활동이 시장에 통합돼 있는 정도가 높을수록 공정함에 대한 고려가 강하게 나타나더라는 것이다.
가족 단위로 경제활동을 수행하고 친족 범위를 넘어선 협력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페루의 마치겡가 사람들의 행동은, 고도의 협력이 요구되는 작살 고래잡이가 주업인 인도네시아의 라말레라 사람들의 행동과 크게 달랐다. 그리고 시장 거래가 실생활에서 별로 의미가 없는 탄자니아 지역의 하드자 사람들은 공정함에 대해 그다지 고려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 반면, 가축을 사고파는 거래가 일상화돼 있는 케냐 지역의 오르마 사람들은 상대방에게 평균 44% 정도를 건네줌으로써 이들이 의사결정에서 공정함을 중요하게 고려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주요 경제활동에서 협력의 비중이 높은 경우 공정함에 대한 고려가 중요해진다는 것은 우리의 상식과도 부합한다. 하지만 시장 거래가 실생활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는 부족일수록 공정함을 중시한다는 결과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시장에 노출될수록 자신의 이득을 챙기려 할 텐데, 그렇다면 시장에 통합된 사회일수록 덜 넉넉하고, 소규모 공동체 생활을 하는 집단이 좀 더 넉넉한 분배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은 아닌가?
상업이 야만적 본성을 잠재운다?
시장에 노출되어 있는 집단일수록 공정함에 대한 추구도 더 높게 나타난다는 이야기는 18세기 일군의 사상가들의 논의 속에서 등장했던 “온화한 상업”(혹은 달콤한 상업, doux commerce)이라는 주장을 연상케 한다. 몽테스키외나 콩도르세 같은 학자들은 상업이 사람들의 야만적인 본성을 차분하고 세련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이들뿐 아니라 당시 많은 사상가들 사이에서는 상업을 통해 오만한 사람들이 나긋나긋하고 복종하는 성격을 갖게 될 뿐 아니라, 정직함과 사리분별력, 그리고 말과 행동에서의 조심스러움을 배워나가리라는 생각이 퍼져 있었던 것 같다. 당시 유행했던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상업에서의 성공을 위해 사람들은 상대방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살펴야 하고, 정직하게 거래에 임해야 하며, 상대방을 화나게 만들면 자신의 평판에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시장에서의 거래를 통해 사람들은 근대 시민에 걸맞은 심리적·도덕적 성향을 체득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공정함이라는 관념은 상업의 진전에 따라 사람들이 갖게 되는 심성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온화한 상업”이라는 예측과 달리 현실의 시장(혹은 자본주의의 발전)은 파괴적이었고, 맹목적이었으며, 비도덕적이었다. 노동자들의 열악한 지위 속에서 불평등의 문제는 심화되어만 갔고, 독점이 진전되면서 불공정함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혹은 공동체 파괴가 가속화되면서 이러다가는 사회의 토대가 무너지는 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나타내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온화한 상업이라는 주장은 점차 설득력을 잃고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시장의 진전에 따라 불가피하게(!) 따라오게 된 부작용과는 별도로, 앞서의 실험 결과는 시장 자체가 가져오는 일련의 도덕적 효과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할 기회를 제공해준다.
시장은 단지 자원을 배분하는 기제만이 아니라 거래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여기서 시장의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영향력은 양면적이다. 한편으로, 거래에 참여함으로써 사람들은 시장 거래에 내재하는 추상적 원리들에 차츰 동의하게 된다. 거래에 참여하는 사람들 모두를 동등한 개체로 간주해야 한다는 인식이 생기고(원리상 시장에 참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지위 고하란 없다), 낯선 사람과의 거래에도 익숙하게 된다(낯설다고 혹은 이런저런 차별적 이유가 있다고 거래 안 하면 나만 손해다). 더 나아가 상품 교환의 언어는 얼굴색과 성별, 그리고 종교적 차이로 거래의 상대를 차별적으로 결정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이는 때로는 강력한 힘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예를 들어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인권운동사에서 유명한 1960년 그린즈버러 연좌농성에서의 구호는 얼굴색에 관계없이 자신들을 소비자로 인정하라는 것이었다). 터무니없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경우(앞서 든 실험에서처럼, 자신이 노력해서 얻은 돈도 아니면서 분배비율을 결정할 권리를 가졌다고 해서 지나치게 자신에게 유리한 배분비율을 결정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분노를 살 것이라는 사실을 거래의 경험을 통해 배울 수도 있다. 어쩌면 추상적 원리로서의 시장은 낯선 사람과의 접촉을 넓히면서 그 과정에서 자유와 평등 그리고 정의를 익혀나가는 장소이며, 사람들은 거기서 익명의 상대와 거래할 때에도 정직하고 공정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사실을 익히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시장의 실제 모습은 사람들에게 공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가르치기도 한다. 앤드루 쇼터 연구팀은 앞서 언급한 것과 동일한 실험을 다른 상대방과 두 차례 반복하게 하면서, 첫 번째 의사결정으로부터 낮은 수익을 얻은 사람들은 두번째 게임에 참여하지 못할 것이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이들이 확인한 것은 이런 조건을 내걸었더니 상대방에게 낮은 몫을 건네주겠다고 제안하는 사람의 수가 많아졌고, 낮은 몫을 제안받더라도 이를 수락하는 경향이 높아지더라는 것이었다. 이 연구는 경쟁에 빠져들면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소 불공정해도 된다는 생각이 실험 참가자들 사이에서 공유되기 시작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경쟁이 이전에는 불공정하다고 여겨졌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해준 셈이다.
원시적 충동의 억제? 유대감의 상실?
시장에 노출된 사람일수록 공정하게 행동한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 처한 상황이 시장 거래(경쟁)의 일환임을 인식하는 순간 사람들은 공정함이란 잠시 미뤄둬도 되는 도덕적 가치라고 스스로를(그리고 타인의 행동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시장의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효과는 그 추상적 원리와 현실의 모습 속에서 갈등하며 미결정인 채 남아 있다.
고립된 채 외부인과 단절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친족 범위를 넘어선 익명의 상대에게 공정한 태도를 갖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도덕적 가치라고 간주할 수 있는 것들, 예를 들어 공정성에 대한 추구뿐만 아니라 타인의 이익을 부당하게 침해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 그리고 자신에게 어느 정도 손해가 가더라도 공공의 이익을 높이는 방향으로 행동하는 것 등은 그 자체로 시장과 잘 어울리는 자유주의적·도덕적 가치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들은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행위적 심성들이다. 하지만 이와 다른 범주의 도덕적 가치들은 없는가? 시장의 확대에 따라 사람들 간의 유대, 연대 그리고 공동체적 가치 등이 낡은 것으로 간주되거나 점차 쇠락해가는 것을 우려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이에크 같은 이들은 유대와 공동체적 지향을 가리켜 “원시적 충동”이라 칭하면서, 인류가 근대에 이르러 이 충동을 억제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거대하고 복잡한 사회로의 도약이 가능했다고 보았지만, 이와 달리 리처드 세넷 같은 이들은 시장의 확대로부터 초래된 유대감의 상실과 개인의 고립화야말로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을 절망에 빠뜨리는 요인이라고 보았다. 동일한 것을 가리켜 어느 누구는 자유의 획득이라고 말하고 어느 누구는 고립감과 절망을 이야기한다. 어떻게 보면, 시장과 도덕성과의 관계는 결국에는 시장이 과연 인간들의 삶에 어울리는 체계인가를 묻는 문제가 되고, 이것은 다시 인간은 어떤 존재이며 어디서 행복을 찾는가라는 질문으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
외지인과의 접촉이 거의 없다고 알려진 페루 남동부 지역 아마존 인근의 마치겡가 부족 공동체 주민들에게선 공정한 배분이 거의 이뤄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불공정에 대한 응징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