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A.I 포스터
많은 판단과 업무를 기계에 의존하고 있는 시대
‘머리는 빌릴 수 있다’는 YS 발언 새삼 주목 받는다
‘머리는 빌릴 수 있다’는 YS 발언 새삼 주목 받는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머리는 빌릴 수 있어도 건강은 빌릴 수 없다”는 말과 “인사가 만사다”라는 말을 즐겨 썼다. 긍정적으로 해석하자면 적재적소에 최적의 인재를 등용해 책임을 맡겨야 하고, 최고지도자는 그런 인재를 고를 수 있는 ‘통찰력’을 갖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발언이라고 볼 수 있다. 국가 최고지도자가 모든 것에 정통해서 처음 방문한 자리에서 전문가들에게 명령을 내려 “위대한 OOO 동지께서 교시하시었다”라고 떠받드는 것이나, 실무자가 결정할 수 있는 일까지 만기친람으로 챙기는 통치 스타일과는 대조적인 면모다. 하지만 김 전대통령은 재임 기간인 1997년 사실상 ‘국가 부도’인 ‘IMF 사태’를 초래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머리를 빌린 결과”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피하기 힘들다.
“판단의 어느 영역까지를 전문가나 외부에 위탁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국가 최고지도자나 재벌 총수같은 사람만이 아니라 어느덧 우리 모두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상황이 됐다. 이미 우리는 많은 판단과 업무를 외부, 특히 나보다 잘 할 수 있는 기계에 의존하고 있다. 들고 다니는 또하나의 두뇌라고 말할 수 있는 스마트폰과 인터넷 덕분이다. 기억과 계산, 정보 분야는 이제 기계에 위임했다. 전화번호, 주소, 일정 등은 기계가 전담하고 있으며, 길 찾기나 금융상품 및 맛집 선택 등 판단의 영역도 기계의 추천에 따르고 있다.
기계는 날로 똑똑해져가고 있다. 구글이 지난해 인수한 딥마인드는 컴퓨터 스스로 학습하는 능력을 갖추고, 응용력을 발휘하는 단계에 도달했음을 학술지 <네이처>의 논문을 통해 알렸다. 컴퓨터에 1980년대 아타리가 만든 비디오게임 ‘스페이스 인베이더’의 기본적 작동 원리를 입력하고 실행하도록 했더니, 나머지 48개 비디오게임에 대해서도 컴퓨터가 스스로 게임하는 법을 배워 프로게이머 수준의 능숙함에 도달했다는 내용이다. ( ▶ 관련 네이처 기사 )
모르는 외국어 단어나 문장도 컴퓨터와 인터넷의 도움으로 그 뜻을 쉽게 알 수 있다. 외국 여행중 스마트폰으로 식당 메뉴판을 촬영하면 글자를 인식해 한글로 변환해주는 앱도 있다. ‘구글 번역’은 80개 언어를 상호 번역해준다. 한국어 등 일부 언어는 아직 정확도가 떨어지지만, 사용 데이터가 늘어날수록 정확도가 개선되는 구조다. 여러 해 전 ‘세계화시대니 외국어를 배워야 한다’는 트렌드에 맞서 한 동료는 “앞으로는 기계가 알아서 번역을 해줄텐데 그걸 내가 애써 배울 이유가 없다”고 일축하기도 했다.
번역가들은 인터넷 덕분에 번역 작업이 매우 수월해졌다고 말한다. 인터넷의 사전 데이터베이스가 종이 사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해지고, 사용자들이 참여하는 다양한 용례 풀이 덕분에 과거 사전에서 알 수 없어 막막해하던 단어의 고유한 뜻풀이나 특수한 의미를 쉽게 찾을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번역가들은 인터넷시대에 모국어 구사력이 더 중요해졌다고 말한다.
번역가 이강룡씨는 번역을 하면서 한국어의 중요성을 깨닫고 한국어 학습에 집중하다가 글쓰기에 관한 책을 여러 권 펴내고 아예 글쓰기 교육 전문가로 나선 경우다. 이강룡씨는 “번역할 때 저자가 하고자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아는 건 그리 어렵지 않지만, 이를 자연스러운 한국어로 섬세하게 표현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번역하면서 ‘베개 커버’라고 쓰는 사람이 있고, ‘베갯잇’이란 말을 쓰는 이가 있다.
번역가들의 이야기는 사고와 판단 기능의 상당 부분을 기계에 위임할 수 있게 된 세상, 우리는 어떤 능력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지에 대한 통찰을 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머리는 빌릴 수 있다”는 발언은, 스마트폰과 인공지능 시대에 새로운 화두를 던진다.
이중언어 교육의 권위자인 캐나다 토론토대학의 언어학자 짐 커민스(Jim Cummins) 교수가 예화로 제시한 ‘자전거 이론’은 흥미롭다. 커민스는 이중언어 교육 상황에는 4가지 유형이 있다고, 이를 자전거에 빗대어 말한다. 현지어 단일언어만을 사용하는 사람을 외발자전거(monolingual)로, 이중언어를 쓰는 사람을 두발 자전거(bilingualism)로 구분한다. 두발 자전거는 다시 세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큰 바퀴와 작은 바퀴 자전거(부분적 이중 언어 사용 : partial bilingualism), 두 바퀴가 같은 자전거(고도 이중언어 사용 : proficient bilingualism), 두 바퀴가 펑크 난 자전거(이중 제한적 이중 언어 사용 : double-limited bilingualism)다. 가장 이상적 형태는 두 바퀴가 같고 튼튼하게 작동하는, 우리가 현실에서 만나는 자전거이지만 외국어 학습에서 완벽한 이중언어 구사자가 되는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현실적으로는 ‘제대로 작동하는 하나의 바퀴’가 있어야 동력 전달과 조향성이 갖춰진다는 게, 이중언어 교육에서 모국어 구사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론이다.
대통령이 “머리는 빌릴 수 있다”고 말하던 세상에서 이제는 누구나 “머리를 빌리면서 사는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번역을 기계가 대신 처리해주더라도, 제대로 된 문장과 표현인지를 판단하고 수용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여전히 사람의 몫이다. 세밀한 작업은 위탁할 수 있지만, 기계에 맡길지 그 결과를 어느 정도 신뢰할지를 결정하는 판단력과 통찰력은 앞으로도 인간의 몫이다. 번역 환경이 수월해질지수록 한국어 능력이 중요해지는 것처럼, 기계 처리와 인공지능이 발달할수록 인간 고유의 사고력과 통찰력이 중요해진다. 2개 이상의 두뇌를 굴리려면, 제1 두뇌가 제대로 작동해야 한다.
구본권 사람과디지털연구소장 starry9@hani.co.kr
김영삼 전 대통령. 탁기형 선임기자
나카지마 카즈코 편저(2010), <이중언어와 다언어의 교육>, 이미숙 외 번역(2012), 한글파크 (원 출처: Jim Cummins(1996) “Negotiating Identities: Education for Empowerment in a Diverse 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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