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로의 비너스는 불완전하기에 눈부시다. 위키피디아
나는 짧은 시간이나마 치과대학생들에게 질환과 장애를 가르친다. 짧은 시간인 이유는 본격적으로 해당 주제를 다룰 만큼 강의 시수를 대학에서 허락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학생들은 학년이 더 올라가면 질병을 치료하고 장애를 가진 환자를 대하는 의학적 방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생물학적 질병이 개인에게 미치는 경험인 질환을, 신체적, 정신적 손상이 사회적 조건과 맞물려 개인에게 강제하는 장애의 우환을 배우지 못한다. 따라서 나는 오늘도 나의 부족함을 한탄하며 학생들이 질환과 장애라는 단어에라도 익숙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한순간도 쉬지 않고 강의자료에 있는 내용을 설명한다.
잠깐, 가르친다는 나는 질환과 장애에 관해 제대로 알고 있는가? 이미 아픔의 경험은, 질환은 여러 경우를 통해 감내해 왔으므로, 지금도 견디고 있으므로 어느 정도는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장애에 관해서 내가 이야기해도 괜찮은가? 나에게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가?
솔직해져야 한다. 내겐 자격이 없다. 나는 장애 경험을 오롯이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장애로 인하여 발생하는 문제와 배제, 멸시와 모멸, 무시와 한계를 경험해 본 적이 없다. 나는 언제나 장애를 나의 의학적 응시로 바라보았을 뿐, 그것이 나의 삶의 조건이 되리라고 진심으로 믿어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장애를 돌본다는 것에 관한 생각은 내 머릿속 한구석에 깊이 박혀 있다. 그것은 아마 내가 수련의 때 장애인 환자를 처음 만났을 때, 이후 전문의로서 삶에서 여러 번 장애를 가진 아이의 치과 치료를 맡아야 했을 때, 그들의 부모를 상담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의 한계와 부족함을 인정해야 했을 때, 이후 (언제가 끝일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연구자이자 교사로서 장애학의 질문들이 나를 괴롭힐 때 내가 내릴 수 있는 최선의 답이 돌보는 자로서 나의 정체성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마음은 언제나 불편하다. 지금, 일라이 클레어의 “눈부시게 불완전한”을 읽고 있을 때처럼.
장애는 나쁜 것인가?
일라이 클레어는 뇌성 마비를 가졌으며 자신을 젠더퀴어(생물학적 성별과 젠더 정체성이 일치하지 않으며, 젠더 정체성을 남녀가 아닌 다른 상태로 정의)로 정체화하는 작가, 활동가다. 그는 1999년에 쓴 ‘망명과 자긍심: 교차하는 퀴어 장애 정치학’으로 이름을 알렸다(해당 저서는 2020년 전혜은과 제이를 통하여 번역되었다). ‘망명과 자긍심’은 부제가 잘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성소수자 문제와 장애 인권 문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상황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를 다룬 글로 많은 사람을 끌어들였다.
그다음으로 소개된 그의 책이 ‘눈부시게 불완전한: 극복과 치유 너머의 장애 정치’다. 하은빈이 옮긴 이 책은 우리가 당연히 선한, 좋은 일이라고 가정하는 치유라는 개념을 문제 삼는다. 그 작업은 이 책의 해제를 쓴 김은정의 ‘치유라는 이름의 폭력’을 통해서도 최근 다루어진 바 있으나, 아직 사람들에게 쉽사리 다가갈 수 있는 생각은 아닌 것 같다. 질병이나 장애는 그 당사자에게도 괴로운 것이므로, 치유는 당연히 좋은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주도권을 잡고 있다. 의사로서 처음 사회적 정체성을 형성한 나 또한 (고등학생 때까진 오랫동안 정체성 유예 상태에 있었다고 말해야 한다) 치유는 좋은 것이라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일라이 클레어의 ‘눈부시게 불완전한’ 표지. 2017년에 쓰인 책이기에 책 제목은 이미 국내의 여러 책에서 ‘눈부신 불완전함’의 어형으로 언급됐다. 이번 역서의 제목은 “불완전한”이라는 형용사의 관형사형을 취해 무언가를 꾸미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불완전한 것은 무엇인가? 아마, 우리 모두의 삶이며, 그런 불완전성과 취약성을 눈부신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의 인식일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 책의 개념들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도식적으로 나누는 쪽을 택한다. 이런 설명을 클레어 본인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것 같다. 얽혀 있는 것들을 그렇게 나누면 안 된다고 말할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다소 무리한 접근이라도 시도할 필요가 있다.
애초 이 논의 계열의 출발점에 있는 장애부터 보자. 장애는 나쁜 것인가? 그렇지 않지만, 한편으론 그렇기도 하다. 흔히 우리가 상정하는 장애의 나쁨은 장애가 만들어 내는 차이가 나쁜 것이라고 상정하는 데에서 나온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농인의 듣지 못함은 청인의 들을 수 있음에 대해서 나쁜 것인가. 척추 손상으로 인한 걷지 못함은 걸을 수 있음에 대해서 나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인간은 생활을 영위하고 활동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취한다. (너무 사소한 예일지 모르나) 나는 키가 작고(겨우 160cm를 넘는다) 민첩함과는 거리가 먼 데다, 쉽게 땀을 흘리고 그로 인하여 고갈되는 탓에 구기 종목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 최근에는 피부 문제 때문에 햇빛 아래 오래 있을 수도 없다. 따라서 그것은 내가 즐길 수 있는 것과 아주 거리가 멀다. 그렇다면 나는 ‘평범한’ 남성, 그리고 그들이 사회생활을 위해 택하는 소통의 방식 중 하나를 취할 수 없으므로 어떤 장애 상태에 있다고 말해도 틀리지 않는다(어릴 때는 축구와 농구였고, 이 나이가 된 지금도 왜 골프를 치지 않냐는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듣게 되니까 말이다). 그로 인하여 놓친 것도, 잃은 것도 상당히 많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나쁨은 아니다. 나에게는 어떤 잘못도, 문제도 없다. 그저 다른 삶을 살 뿐.
한편 장애는 나쁘기도 하다. 내 말보다는 책에 등장하는 표현을 가져오는 것이 낫겠다. “그건 사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이 잘못되었고 망가졌다는 전제에 저항해야 하죠. 하지만 나와 함께 사는, 사람 미치게 하는 이 망할 놈의 만성 통증은 건강의 변주도, 자연스러운 신체적 차이도 아니에요.”(98쪽) 그의 집중력을 깨뜨리고, 심지어 어떤 활동도 못 하게 만드는 극심한 만성 통증은 나쁘다. “저는 제 몸과 전쟁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었어요. 그렇다고 해서 암세포들이 자기 뜻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았죠.”(113쪽) 자신을 끝없이 불려 나가며 시시각각 몸을 위협에 빠뜨리는 암세포는 나쁘다. “휠체어는 포기할 수 없는 내 몸의 일부야. 하지만 감기에 걸릴 때마다 나를 죽일 수도 있는 이 폐 두 짝은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어디서 바꿔 오고 싶어.”(113쪽) 정확히 어떤 상태인지 책에 쓰여 있지 않으나, 이 진술을 한 사람의 폐 손상은 나쁘다.
따라서 무디게나마 이렇게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타인과의 차이를 만드는 장애는 나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삶에 관한 이정표로, 새로운 경험의 통로로 ‘눈부시게’ 다가올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삶을 살아낼 수 없도록 만드는 장애는 나쁜 것이다. 문제는 장애는 하나이며, 이렇게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는 경우가 별로 없다는 데에 있다.
치유는 이미 없어져 버린 원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망가진 것들을 애도하고 새로운 것들이 피어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픽사베이
치유는 좋은 것인가?
나는 치유에 대해서도 같은 구분을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모양과 형태, 크기, 기능의 다양성을 축소하고 인간을 정상화하는 도구”로서 치유(127쪽), 그것은 나쁜 것이다. 그것은 의학이라는 지식/권력을 통해 삶을 특정한 형태로 고정하고, 그에 맞지 않는 형태는 억압하거나 도려낸다. 그것이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것의 그림자에 불과한 희망”을 키워내는 역할을 할 때(106쪽), 치유는 폭력이자 비난받아야 마땅한 나쁜 것이 된다. “생명을 살리고, 생명을 조작하고, 어떤 생명을 다른 생명보다 우위에 두고, 수익을 창출하는” 치유는 악의 한 형태라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173~174쪽). 치유라는 이름으로 자행되어 온 수많은 악행이 있다. 우생학은 치유의 다른 이름이 아니었던가. 그러므로 치유는 나쁘다.
또 많은 경우 치유는 불가해한 희망과 연결되어 있으며 비장애 중심주의를 통해 작동한다는 진단은 결코 틀리지 않다. 장애가 나쁘지 않다고 말하는데, 왜 우리를 고치려 하는가? 라는 질문은 언제나 타당하다.
그러나 그것만이 치유는 아니다. 우리 몸과 마음은 취약하며 자연은 꿈꾸는 것처럼 우리에게 안온한 고향이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위험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삶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친다. 생은 삶이 할퀴고 찢은 흔적들을 치유하며 어떻게든 버티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치유 없는 삶은 없으며, 치유는 생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실천이다.
따라서 필수적인 치유와 나쁜 치유를 구분해야 한다. 나는 나쁜 치유가 우리가 특정한 상태를 ‘원래’, ‘자연’, ‘이상’으로 상정할 때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치유가 원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가정하곤 한다. 상처, 외상, 감염이 치유된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생기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무심코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치유 과정은 그렇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피부가 아무는 과정은 새로운 세포들이 자라 상처 부위를 채우는 것이다. 미생물이나 바이러스에 의한 감염과 싸우는 과정에서 많은 면역 세포들은 죽고, 자신의 흔적을 남겨 이후 다시 같은 녀석을 상대하기 위한 준비를 한다. 치유 전과 치유 후에 우리 몸은 같지 않다. 그저 겉으로 보기에 같아 보일 뿐이다.
문제는 우리가 겉보기의 유사성을 동일성으로 가정한 다음, 치유가 마치 어떤 순수함으로의 회귀라고, 이전의 깨끗한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여기는 데에 있다. 이때 장애를 ‘치유’하는 것은 장애 없는 어떤 ‘깨끗함’을 가정하여 그것을 말소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게 된다.
그것을 당사자가 원할 때라면 그나마 낫다. 하지만 당사자가 싫다고 거부하거나 필요 없다고 말할 때도 돕겠다며 치유를 말할 때, 치유는 어그러지기 시작한다. 더구나 우리에겐 아직 해결할 수 없는 수많은 질병과 장애들이 있다. 그런 상황에서 억지로 ‘치유’를 말할 때, 치유는 도움이 아닌 삶을 억압하는 기제가 된다.
그러므로 말하자. 치유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치유는 이미 없어져 버린 원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망가진 것들을 애도하고 새로운 것들이 피어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고. 클레어가 생태계의 손상을 보면서 말하는 것처럼. “그러나 훼손은 비가역적인 것이다. 어떤 생태계는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가 없다. 회복하는 데 몇 세기가 필요한지 알 수 없고, 어쩌면 벌어진 상처에 반창고를 붙이는 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109쪽) 치유에 대한 환상을 버릴 때, 삶의 필수로서 치유가 다시 다가온다.
김준혁/연세대 교수·의료윤리학자 junhewk.kim@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