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50만년의 인간 진화를 보여주는 두개골 화석. 왼쪽부터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남아공, 250만년 전), 호모 로돌펜시스(케냐, 190만년 전), 호모 에렉투스(인도네시아, 100만년 전),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 페트랄로나(그리스, 35만년 전), 호모 사피엔스(남아공, 4800년 전). 미 국립자연사박물관 제공
오늘날 인간 활동에 기인한 기후변화의 급속한 진행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위기 의식을 부르고 있다. 그런데 먼 옛날 인류의 조상도 기후변화로 하마터면 멸종될 뻔했다는 논쟁적 연구 결과가 나왔다.
현생 인류가 출현하기 훨씬 전인 90만년 전 인류의 조상이 기후 변화에 따른 대규모 인구 감소로 멸종 직전의 위기를 맞았었다는 것이다. 기후 변화의 양상은 지금과는 정반대인 지구 냉각이었다. 원인도 지금과는 다른 자연 현상에 의한 것이지만 기후변화와 인류 생존의 관계를 진화유전학의 기법을 통해 규명해 봤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중국과학원 상하이연구소가 중심이 된 중국과 이탈리아 과학자들은 93만년 전 네안데르탈인과 현생 인류의 공통 조상이 재생산력이 있는 인구 기준으로 1280명선까지 급감했으며, 이런 병목 현상은 11만7천만년 이상 지속됐다고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에 발표했다.
1280명은 당시 추정 인구의 98.7%에 해당한다. 100명 중 1명 정도만이 살아남은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처했다는 얘기다. 물론 재생산력이 없는 어린이와 노인까지 합친 전체 인구 수는 더 많았을 것이다.
연구진은 또 인구 급감으로 근친교배가 이뤄지면서 유전적 다양성의 65.85%가 손실되는 결과를 빚은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인구는 81만3천년 전 무렵부터 다시 늘어나기 시작했다.
인구 10만명을 1천명으로 줄인 기후변화
이번 연구의 착안점은 인류의 유전적 다양성이 다른 영장류에 비해 낮다는 사실이었다. 유전적 다양성이 낮다는 건 현생 인류의 진화가 그만큼 적은 인구 집단에서 시작됐다는 걸 시사한다.
어떤 연유로 그런 역사의 궤적을 밟게 됐을까?
중국 연구진은 10여년 연구 끝에 개발한, 인구 규모의 변화 과정을 추정할 수 있는 돌연변이 분석방법을 이번 연구에 활용했다. 연구진은 이 기술에 피트콜(FitCoal=Fast Infinitesimal Time Coalescent)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연구진은 이 기법을 이용해 전 세계 50개 인구 집단(아프리카 10개, 비아프리카 40개) 3154명의 DNA 염기서열을 분석했다. 그 결과 지난 100만년의 인구 진화 모델을 몇개월 단위로 나눠 재구성할 수 있었다.
여러 모델 중 오늘날 인류의 유전적 다양성과 가장 잘 일치하는 모델은 93만년 전 멸종에 가까운 인구 감소 사건 시나리오였다. 이에 따르면 인구가 급감하기 직전 인류 조상의 인구는 9만8천명이었으며, 재생산력이 있는 인구가 1280명선으로 급감한 뒤에는 11만7천년 동안 인구 규모에서 별다른 변동이 없는 병목 기간을 보낸 것으로 나타났다.
빙하가 확장돼 해수면 온도가 내려가고 가뭄이 길어지는 등의 기후변화가 인구 급감을 불러왔다. 사진은 알래스카 빙하
연구진은 이런 장기간의 인구 병목 현상은 인류 조상의 화석 기록과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약 700만년 전 아프리카에서 다른 유인원과 갈라진 인류 조상은 100만년 전 뇌의 진화를 겪은 뒤 흩어지기 시작했다. 일부 집단이 유럽와 아시아로 퍼져 각각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으로 진화했지만 현생 인류의 조상은 그대로 아프리카에 남았다.
연구진은 지난 수십년 동안 발굴된 고인류 화석 중에 95만~65만년 전의 것이 상대적으로 적게 나왔는데, 이는 유골을 남길 수 있는 인구가 적었기 때문이라는 걸 시사한다고 말했다.
연구진은 이 시기 인구 급감의 원인을 기후 변화로 꼽았다. 지질학적 증거로 볼 때 플레이스토세 초기와 중기 전환기에 해당하는 이 기간은 빙하가 확장돼 해수면 온도가 내려가고 가뭄이 길어지면서 지구가 더 추워지고 건조해진 시기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닉 애쉬턴 대영박물과 연구원(고고학)은 뉴욕타임스에 “당시 기후 재난이 세계적으로 발생했다면 다른 곳에 있는 인류 사촌들의 인구도 급감했어야 하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았다”며 “현생 인류의 조상인 인구 집단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다른 재난이 있었을 것”이라고 반론을 제기했다.
초기 인류가 불과 도구를 사용하고 있는 모습(상상도). 영국자연사박물관 제공
염색체 융합과 함께 마지막 공통조상 출현
연구진은 이와 함께 기후 재난으로 인한 인구 병목 현상과 마지막 공통조상의 진화적 분화가 시기적으로 서로 연관돼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대부분의 유인원 염색체는 24쌍인 반면 인간의 염색체는 23쌍이다. 연구진에 따르면, 이는 인구 감소 후 인류 공통조상 집단에서 두개의 염색체 융합 현상이 일어나면서 당시 규모가 작았던 인류의 조상 전체로 빠르게 확산됐을 수 있다는 걸 시사한다.
연구진은 인구 병목 현상 기간과 비슷한 90만~74만년 전에 인간 염색체의 융합 현상이 나타났으며, 그 주인공은 2번 염색체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2번 염색체는 인간 염색체 중 2번째로 큰 염색체로 약 2억4300만개의 DNA 염기쌍으로 이뤄져 있다. 이 시기에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 등을 포괄하는 인류의 마지막 공통조상이 출현했고 77만5천년~55만년 전에 이들의 종 분화가 이뤄졌다.
연구진은 “24쌍의 염색체를 가진 인간은 모두 멸종하고, 23쌍의 염색체를 가진 소수의 고립 개체군만이 살아남아 대를 이어갔다”고 말했다. 연구진은 80만년 전 인구가 단기간에 20배로 다시 급격히 증가한 데도 기후 변화가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했다.
연구진이 개발한 인구 규모 추론 방법에 쓰인 핵심 공식. 오른쪽의 그림은 고대의 극심한 인구 병목 기간 중 인류의 조상 인구가 외부로부터의 위협에서 살아남기 위해 함께 맞서는 모습을 상징한다. 중국 상하이영양보건연구소(CAS) 제공
“병목 현상 증거는 아프리카에 국한”
미국 프린스턴대 조슈아 애키 교수(진화인류학)는 사이언스에 “새로운 통계 기법을 활용해 우리 혈통의 결정적 시기에 대한 통찰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인류 진화사의 퍼즐 몇 조각을 더 채워준 연구”라며 “병목 현상의 증거는 꽤 설득력이 있는 것같다”고 말했다.
이번 연구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과학자도 있다. 독일 막스플랑크진화인류학연구소의 스페판 시펠스 박사(유전학)는 뉴욕타임스에 “해안에 도달하는 잔물결만 보고 큰 호수 한가운데 떨어진 돌의 크기를 추정하는 것과 약간 비슷하다”고 말했다. 논리적 비약이 심하다는 지적이다.
같은 연구소의 자넷 켄소 박사(전산생물학)는 사이언스에 “병목 현상에 대한 유전적 증거는 아프리카에서만 강력하다”며 “흥미로운 연구이지만 더 자세히 조사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
지식이 늘어날수록 궁금한 것도 많아진다.
연구진은 “이번 연구는 당시 인류의 조상이 주로 어디에 살았는지, 기후변화의 재앙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병목 기간 동안의 자연선택이 진짜로 인간 두뇌의 진화를 촉진했는지 등 많은 질문을 불러일으킨다”며 인간 진화 연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부여했다.
*논문 정보
DOI: 10.1126/science.abq748
Genomic inference of a severe human bottleneck during the Early to Middle Pleistocene transition.
곽노필 선임기자
nop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