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에런이 그리고 해럴드 코언이 색칠한 그림 ‘장식용 패널과 함께한 에런’. 해럴드 코언 누리집 갈무리
인공지능(AI)이 내놓은 결과물도 창작물일까? 그렇다면 저작권은 누구에게 있는가? 오래된 질문이지만 올해 들어 갈등과 의문이 증폭되고 있다. 인공지능의 스토리 생산에 반발하고 인공지능 생성 이미지에 자신들의 얼굴과 목소리가 무단 도용될 가능성이 있다며 ‘디지털 초상권’을 요구하고 있는 할리우드 작가·배우 파업의 배경이기도 하다.
2022년 9월 작가 크리스 카시타노바는 그래픽 노블 ‘새벽의 자리야’를 미국 저작권청에 등록했다. 창작 순간 발생하는 저작권은 등록을 하면 분쟁이 발생했을 때 권리 방어가 용이하다. 그러나 ‘새벽의 자리야’가 그림 그리는 인공지능 미드저니를 이용한 결과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미국 저작권청은 일단 등록을 보류했고 올해 2월 ‘제한적 등록’을 결정했다. 미드저니가 출력한 이미지들의 저작권 등록을 거부하되, 이미지들의 배열, 대사, 스토리 등 그래픽 노블의 구성은 카시타노바의 창작이기 때문에 등록을 받겠다는 것이었다. 카시타노바와 미드저니 쪽은 저작권이 일부 인정됐다며 나쁘지 않은 결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저작권청의 결정은 행정처분이기 때문에 아직 판례로 확립되지는 았았다. 그래도 지금까지 나온 미봉책 중에서는 당장 적용하기에 가장 적합한 듯하다. 배우를 스캔해서 인공지능으로 만든 장면이나, 인공지능이 출력한 대본은 저작권 보호 대상이 아니라고 한다면? 할리우드 거대 영화사들이 지금보다는 배우와 작가들의 분노에 좀 더 귀를 기울일 성싶다. 현재 문화 상품을 제작하는 데 널리 쓰이는 인공지능 기술들은 기존 작품들이나 배우의 연기를 입력받아 ‘학습’한 뒤 명령에 따라 출력물을 산출한다. 출력과 입력단 양쪽에서 갖가지 문제가 제기되는 건 당연하다. 그렇다면 ‘창작 인공지능’은 창의적이고 또 독창적인가? 이미 오래전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했던 창작 인공지능이 있었다.
창작 인공지능 에런(AARON·아론)은 현재까지 등장한 모든 인공지능을 통틀어 가장 장기간 작동한 인공지능이다. 에런을 제작한 해럴드 코언(1928~2016)은 영국의 추상화가였다. 코언은 1961년 파리 비엔날레, 1966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영국대표단으로 선정되는 등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지만 이미지를 예술 작품으로 만드는 근원이 무엇인지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그러던 차에 1968년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 시각예술과의 초빙을 받아들였고 그곳에서 제프 래스킨을 만나 교류를 시작했다.
래스킨은 1978년 애플에 합류해 스티브 잡스보다 먼저 매킨토시 개발 프로젝트를 이끈 인물이다.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에 있을 당시 래스킨은 예술가인지 엔지니어인지 알 수 없는 음악대학원 학생 겸 시각예술과 조교수였는데, 그때 코언에게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배워보라고 권유했다. 그 시기에 이미 독일 슈투트가르트공과대학의 게오르크 네스와 프리더 나케, 미국 벨 연구소의 마이클 놀이 기하학적 수식과 난수 발생기로 플로터(plotter, 정보를 도면화하는 출력 장치)를 제어해 작품을 만드는 컴퓨터 미술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알고리즘 미술’의 시작이었는데 창안자 3인 모두 컴퓨터 공학자였다.
1960년대 태동기에 컴퓨터 미술에 뛰어든 코언은 수학적 대상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이전의 알고리즘 미술과 달리, 소박하고 삐뚤빼뚤한 선에서도 예술성을 찾을 수 있는지, 찾을 수 있다면 그런 선들이 보여주는 특성은 무엇인지 관심이 있었다. 코언의 연구는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고, 1971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컴퓨터 학회에서 펜이 달린 플로터가 부정형 선을 그리며 그림을 완성하는 모습을 시연하기도 했다. 그해 미국 스탠퍼드대학 인공지능연구실로 옮겨갔다. 존 매카시를 위시한 기라성 같은 연구자들과 연구를 마치고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로 돌아온 1973년부터 코언은 자신이 개발한 시스템을 인공지능 에런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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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에런이 그리고 해럴드 코언이 색칠한 그림 ‘장식용 패널과 함께한 에런’. 해럴드 코언 누리집 갈무리
에런의 프로그램 소스코드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코언이 발표한 글과 설명을 종합하면, 에런은 전문가가 지닌 지식과 경험을 컴퓨터에 축적해 문제 해결 능력을 갖추게 하는 ‘전문가 시스템 방식 인공지능’이었고, 이는 1970년대 들어 각광받기 시작한 인공지능 개발의 최신 방법론이 적용된 결과였다. 추상화가인 코언이 선을 긋는 규칙을 코딩하면, 에런이 이에 따라 선을 그은 다음 상황을 재평가한 뒤 다시 규칙을 적용하는 방식이었다. 규칙이 얼마나 만족스럽게 적용됐는지는 화가 코언이 판단했다. 예술가의 미적 감각이 특정한 논리적 규칙으로 잘 변환될 수 있는지 알아보는 실험이기도 했다.
에런이 정식으로 탄생한 1973년부터 코언이 타계한 2016년까지 에런과 코언의 미술은 함께 변화했다. 그림들은 흑백의 불규칙 도형 위주였다가 1980년대에는 나무나 사람을 함께 그리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코언은 사람의 머리 부분을 그리는 데만 4천개의 규칙이 필요하다고 했다. 코언 말년에 화풍은 다시 불규칙 도형 위주로 전환됐다.
2011년 인터뷰하는 코언. 해럴드 코언 누리집 갈무리
채색 방식도 진화했다. 초창기에는 에런이 그림을 그리면 코언이 손으로 색칠했지만, 작성 언어를 범용 프로그램인 시(C)에서 규칙들을 관리하기 편한 리스프(LISP)로 바꾼 1990년 무렵에는 에런이 알아서 색칠할 수 있었다. 그 뒤로도 코언은 터치스크린을 이용하는 시도를 하는 등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에런을 계속 개량했다.
고도로 발달한 전문가 시스템이라는 점에서 에런은 인공지능의 전형적인 사례다. 에런은 다른 그림을 ‘학습’한 적이 없으며 40여년에 걸친 동작 기간 동안 매번 새로운 그림을 그렸다는 점에서 창의적이다. 그렇다면 에런은 독창적일까? 코언의 유족이 에런의 작동 정지를 결심할 정도로 에런과 코언은 분리할 수 없는 단짝이었다.
인간과 인공지능의 관계, 작동 방식은 다양하다. 그러나 최근 생성형 인공지능 결과물의 창의성·저작권을 논의하면서 생성형 인공지능에 국한된 문제를 모든 인공지능의 문제인 것처럼 거론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인공지능을 보조도구로만 보거나 거꾸로 마치 인공인격체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다. 기술 변화가 심한 상황에서 이런 단편적인 논의는 아쉬운 대목이다.
이관수 과학 저술가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과학사 및 과학철학협동과정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가톨릭대학교 교양교육원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 동국대학교 다르마칼리지에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