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은 환경으로 남아 있지 않고, 우리의 건강을 위협하는 요소로 다가온다. 사진 출처 월페이퍼플레어
기후 위기가 ‘진짜’ 위기이고 이에 따라 당장 인류의 삶이 위협에 처해 있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 되었지만, 이것을 의료와 연결해서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많지는 않은 것 같다. 기후 문제는 전 지구적 차원의 일이고 의료는 다분히 개인적 수준에서 작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일 텐데, 사실 환경 문제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미칠 영향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둘은 생각보다 가까운 문제다.
환경은 그대로 환경으로 남아 있지 않고, 우리의 건강을 위협하는 요소로 다가온다. 아마 기후 위기를 정말 실감하게 되는 것은 극심한 기후 변화보다는, 그로 인하여 몸이 아프게 될 때다. 그렇다면 기후 위기를 포함한 환경 문제와 의료는 생각보다 밀접하다.
기후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모든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지만, 꼭 떠올려 보아야 할 것은 환경 정의라는 개념이다. 아직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환경 정의 개념이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많은 기관과 문헌이 환경으로 인한 이득과 피해가 공정하게 배분되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하고 있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환경으로 인한 이득과 피해는 보통 불공평하게 나누어진다는 의미다. 이것은 환경만 놓고 보았을 때 이해가 쉽지 않다. 기후에 지역 차가 있을 수 있지만, 그런 자연 현상을 불공평하다고 말하는 것은 이상한 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건강을 붙여 놓고 살펴보면 환경으로 인한 이득과 피해가 불공평하다는 말이 직접 다가오는 표현이 된다. 아동, 노인, 기저질환자 등 건강 취약자에게 급격한 기온 변화나 미세먼지 증가 등으로 인한 질병 발생의 위험이 더 크다. 부유한 이들은 환경 오염이 진행되었거나 온도 변화가 커진 지역에서 떠날 것이고, 남아서 피해를 감내해야 하는 이들은 저소득 가정이다. 외국인 공동체와 같은 소수자 지역사회는 애초에 환경 조건이 나쁜 곳에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이것은 해당 지역사회의 건강 관련 지표를 악화시키는 중요 요인으로 작동한다. 게다가 환경으로 인해 건강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부유하고 건강한 사람들은 그로 인한 손해를 보충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취약 계층은 그렇지 않다.
그렇기에 환경 정의는 의료와 떼어 놓을 수 없는 개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기후 위기나 환경 오염 문제는 또한 의료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의료의 문제라면, 그 해결을 위해 의료가 작동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인과관계 때문에 환경 문제가 의료의 틀에서 다루어지는 것은 쉽지 않다. 쉽게 말해서, 환경 요인이 질병을 일으킨 직접적인 원인인지 증명하기가 무척 어렵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러 이유로 질병이 하나의 원인으로 인해 발생한다는 생각의 틀을 머릿속에 가지고 있다(단일원인 인과라고 부른다). 우리가 흔히 겪는 질병이 감염병이나 외상이라서 그런 탓도 있다. 감염병은 세균이나 바이러스라는 명확한 원인 물질이 존재한다. 외상은 사고나 충격이라는 명확한 원인 외력이 존재한다. 모든 질병도 이런 하나의 원인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일상적인 경험에서 쉽게 도출된다.
그러나 많은 질병은 여러 요인이 작용하여 발생한다. 당장 감염병만 해도, 세균이나 바이러스만으로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감염된 사람의 면역력이 세균을 이겨내는 데 충분하다면(보통 이전에 걸린 적이 있거나 예방접종을 받은 경우일 텐데) 세균이라는 명확한 원인 물질이 있다 해도 질병은 발생하지 않는다. 하물며 환경으로 인한 질병 발생은 여러 요인이 상호작용하는 상황을 상정하는 것이 옳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위해선 환경 요인이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흡연과 폐암의 관계가 그랬다. 지금은 누구나 흡연으로 인해 폐암이 발생한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50년 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부정했다. 당연히 담배 회사가 그 선두에 있었다.
1999년 영화 <인사이더>는 담배 회사에서 일하던 연구 책임자가 온갖 압력에 시달리면서도 내부고발자가 되어 건강에 해로운 물질을 담배에 넣는 회사의 행태를 폭로하려고 노력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이런 ‘환경 요인’과 질병과의 연관성에 관한 논쟁과 고발, 분쟁은 오랜 역사를 지닌다. 출처 다음 영화
흡연과 폐암의 인과관계
담배가 폐암을 일으키는지 보려면, 특정 시점에서 사람들에게 담배를 나누어 준 다음 계속 담배를 피운 사람과 담배를 피지 않은 사람을 추적 관리하여 결과의 차이를 비교하면 된다. 명확하게 인과관계를 제시할 수 있는 방법이지만, 담배의 경우 적용하기 어렵다. 일단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연구자가 생각하는 물질을 과학 연구라고 하여 대상자에게 지속 노출시키는 것은 연구 윤리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또 그 결과가 분명히 나타나려면(예컨대 흡연 집단에서 폐암 발생률이 증가하려면) 몇십년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대상자를 추적하는 일은 현실에서 쉽지 않다.
영국의 리처드 돌과 브래드포드 힐은 1950년 <영국의학학술지>에 실린 ‘흡연과 폐암’(Smoking and Carcinoma of the Lung) 논문에서 흡연과 폐암의 관련성을 분석하였다. 전설로 남은 두 연구자는 이 논문에서 흡연과 폐암 발생 증가가 연결되어 있음을 보이기 위해 선구적인 시도를 했다. 다수 환자의 자료를 무작위로 수집하여 선택에서 편향이 나타나지 않도록 하고, 폐암 발생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다른 요소들을 맞추어 최대한 통제하려 했다. 논문은 담배 사용량 증가와 폐암 발생률 증가가 강한 상관관계가 있음을 보였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담배가 폐암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데 충분하지 않았다.
주지하는 것처럼, 상관관계는 두 일이 동시에 발생했다는 것만을 의미한다. 돌과 힐은 분명, 흡연량의 증가와 폐암 발생의 증가가 동시에 일어났음을 밝혔다. 하지만 그것으로 담배가 폐암의 원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어렵다. 그저 두 사건이 우연히 같이 일어났을 수도 있다. 심지어 폐암이 증가해서 사람들이 많이 피게 된 것이라고 (예컨대 질병으로 인한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말할 수도 있다.
추가적인 증명이 필요했고 돌과 힐은 의료인 6만명을 대상으로 흡연 관련 설문지를 보냈다. 4만명이 답변을 보냈고 그들은 4년 반 동안 이들을 추적하였다. 비흡연자 집단에서 폐암으로 인한 사망률은 1000명당 0.07이었으나, 애연가 집단에서 폐암으로 인한 사망률은 1000명당 1.66으로 증가하였다. 거의 20배 차이가 난다는 것을 확인하였던 것이다.
이런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미국 공중위생국은 흡연과 폐암의 관계를 분석하기 시작하고, 이것은 1964년 미국 공중위생국장 보고서 발표로 이어졌다. 보고서는 문헌 7천개 이상을 검토하고 150명 이상에게 자문을 받아 흡연이 남성 폐암의 원인임을 발표하게 되었다. 이들은 다수 연구가 흡연과 폐암의 강한 상관관계를 보이고 있으며 일관된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 폐암이 흡연과 특정한 관련성을 보인다는 점, 흡연과 폐암의 시간적 선후관계가 인정된다는 점, 용량 반응 관계(흡연량의 증가에 따라 폐암 발생도 증가)가 보인다는 것, 담배에 발암물질이 포함되어 있다는 실험적 결과와 합치한다는 것을 근거로 하였다.
1965년에는 힐이 ‘환경과 질병: 상관인가 인과인가’(The environment and disease: Association or causation?)라는 논문을 발표하며 미국 공중위생국장 보고서의 결과를 흡연과 폐암을 넘어 일반 질병으로 확산한다. 환경과 질병의 인과관계 설정에 있어 힐은 이후 ‘힐의 범주’라고 불리게 된 조건을 제시하였다. 연관성의 강도, 일관성, 특이성, 시간적 선후관계, 양적 관계, 생물학적 타당성, 기존 지식과의 일치, 실험적 입증, 이전 상황과의 유사성. 힐이 제시한 이 아홉 가지 범주가 완전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들 범주를 활용하여 환경 요인과 질병의 인과관계를 살피곤 한다.
1956년 돌과 힐의 논문 ‘흡연과 관련된 폐암과 다른 사망 원인’(Lung cancer and other causes of death in relation to smoking)에 실린 용량반응관계 그래프. 다른 질병과 달리 폐암은 흡연량과 명확한 양적 상관관계를 보인다. 출처: Doll and Hill (1956)
가습기 살균제 피해 보상 왜 못받나
기후 위기도 문제지만, 당장 환경적 요인으로 인한 건강 문제를 겪는 사람들이 있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가습기 살균제 사건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가습기에 첨가하여 사용하라고 만들어졌던 살균제에 포함된 성분이 세포에 독성을 나타냈으며, 가습기를 통해 미세 분자로 바뀐 이들 성분은 사용자의 폐를 손상시켰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지원 종합포털 자료에 따르면 2023년 4월 30일 기준 등록된 사망자만 1814명에 이른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폐렴이 점차 퍼지다가 2011년에서야 역학조사로 가습기 살균제가 그 원인이 밝혀지게 되었지만, 정부의 뒤늦은 대처와 기업의 질병 인과성 부인, 은폐 시도로 피해자들은 아직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2022년 4월, 가습기 살균제 제조사들은 피해구제 조정위원회의 피해조정안을 거부하였고, 피해자별로 진행되는 손해보상청구 소송은 인과관계 입증의 부담을 다분히 피해자에게 지우며 장기화하여 이중의 어려움을 피해자에게 안기고 있다.
이런 대사건에 우리가 지닌 생각의 틀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 지 딱 잡아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가습기 피해 인과가 인정받지 못하는 모습에서 1950년대의 흡연과 폐암의 연관성 논쟁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그리고 이 모습은 앞으로 계속 나타날 여러 환경 관련 건강 문제에서도 반복될 것이라는 불안감이 지워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거꾸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환경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시작이 되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환경 문제를 건강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면, 그것이 불평등하게 해악을 입힌다면, 그리고 그 해결을 위하여 우리에게 의학과 의료를 통한 이해가 필요하다면, 이 문제를 의료에서 함께 이야기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김준혁/연세대 교수·의료윤리학자 junhewk.kim@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