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내 미생물이 풍부하게 포함된 대변을 모아 저장하는 ‘미생물 저장고’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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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점에서 1300km 떨어진 북위 78도의 노르웨이령 스발바르제도의 스피츠베르겐섬 산악지대에는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라는 이름의 종자 보관소가 있다.
기상이변과 이에 따른 작물 피해, 식물 질병 확산, 그리고 전쟁 등 인간에 의한 대규모 작물 파괴 등으로 인해 발생할지도 모를 농작물 멸종으로부터 종을 안전하게 지켜내고 종 다양성을 보존하기 위해 2008년 문을 연 곳이다. 현대판 노아의 방주로도 불리는 이곳에는 현재 전 세계 100여개 기관에서 기탁한 120만여점의 종자 표본이 보관돼 있다.
스발바르저장고에서 영감을 얻은 과학자들이 미생물에서도 비슷한 성격의 저장고를 만드는 데 나섰다. 스위스의 바젤대와 로잔대, 취리히대, 그리고 미국의 럿거스대 연구진이 중심이 돼 ‘미생물 저장고’(Microbiota Vault)라는 이름으로 추진하고 있는 이 프로젝트는 스발바르저장고와 마찬가지로 미생물의 다양성을 보존하고 필요땐 꺼내서 질병 치료 등에 쓰기 위한 것이다.
미생물 저장고의 영감을 준 노르웨이의 스발바르국제종자저장고 전경.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2의 뇌로 불리는 장내 미생물
미생물은 지구 생명 역사에서 등장한 최초의 생명체 집단이다. 오늘날에도 지구 생명체 피라미드의 저변에서 전체 생태계를 지탱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박테리아, 고세균, 바이러스, 균류 등 다양한 미생물 중에서도 과학자들이 구축하려는 미생물 방주의 1차 수집 대상은 인간의 장내 미생물이다. 장내 미생물은 인체의 신진대사에서부터 중추신경계, 면역 체계에 이르기까지 인체의 거의 모든 생명 활동 영역에 영향을 끼친다. 특히 장과 뇌 신경계는 장내 미생물을 매개로 서로 긴밀하게 영향을 주고받는 ‘장뇌축’을 이루고 있다. 그런 점에서 장내 미생물군을 제2의 뇌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 몸속에 서식하고 있는 박테리아(미생물) 수는 총 39조개로 추정한다. 인간 세포 수 30조개보다 1.3배나 많다. 장내 미생물의 총 무게는 약 2㎏이다.
대변 표본은 영하 80도의 저장고에 냉동 보관된다. swissinfo.ch에서 인용
영하 80도에서 냉동 보관
과학자들은 이를 위해 세계 각지로부터 장내 미생물이 풍부하게 포함된 대변 표본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11월 에티오피아 어린이 대변을 비롯해 지금까지 라오스, 푸에르토리코, 페루 등에서 대변 표본이 시범 저장고가 있는 스위스로 반입됐다. 수집한 표본의 절반은 현지에서 보관하고 나머지 절반만 저장고로 보낸다.
현재 시범 저장고는 프로젝트 공동책임자인 아드리안 에글리 교수가 소속돼 있는 스위스 취리히대(UZH)에 있다. 프로젝트팀이 저장고를 스위스에 둔 것은 장기간 보관을 위해선 정치적으로 안정적이고 중립적인 나라에 있을 필요가 있다는 판단에서다.
스발바르종자저장고의 보관 온도는 영하 18도이지만, 미생물저장고는 영하 80도의 극저온에서 냉동 보관하고 있다. 에글리 교수는 스위스 언론 인터뷰에서 “박테리아 중 어떤 것은 20분마다 분열할 정도로 분열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박테리아를 빠르게 얼릴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20세기 후반 도시화가 진전되면서 사람들의 장내 미생물 다양성은 감소하고 면역 질환은 증가했다. 글로리아 도밍게즈-벨로 교수
장내 미생물 다양성, 아마존 원주민이 미국인의 2배
과학자들이 미생물의 방주를 구상하게 된 것은 장내 미생물의 다양성이 감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생물 다양성이 감소하면 인체에 유익한 미생물군을 이용할 수 있는 선택의 범위가 그만큼 줄어든다.
이들은 미생물 다양성이 줄어든 데는 산업화, 도시화의 영향이 크다고 말한다. 산업화, 도시화가 염소 처리된 물, 가공식품, 항생제, 방부제, 위생상태 개선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미생물 다양성을 약화시켰다는 것이다.
제왕절개 분만도 장내 미생물 다양성 감소에 상당한 역할을 한다. 제왕절개 분만은 아기가 엄마의 산도를 통과하면서 엄마로부터 다양한 미생물을 전달받는 기회를 차단한다.
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자연 환경에서 사는 남미 원주민의 장내 미생물 다양성은 도시에 사는 미국인의 2배에 이른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의 ‘조용한 멸종’은 질병에 대한 인체의 저항력을 약화시킨다.
미국 럿거스대 글로리아 도밍게즈-벨로 교수(미생물학)는 올해 초 열린 한 심포지엄에서 “도시화로 장내 미생물 다양성이 감소하면서 20세기 후반 이후 면역 질환이 증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남미 아마존 원주민의 장내 미생물 다양성은 미국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의 2배다. Maria Gloria Dominguez-Bello/Rutgers University–New Brunswick
2차 수집 대상은 발효 미생물
미생물 저장고 아이디어는 그를 비롯한 럿거스대 과학자들이 2018년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에서 처음 제안했다. 이후 이들은 이듬해 타당성 조사를 통해 실행 가능하고 유망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우선은 스위스에 본거지를 두고 시범 저장고 구축에 들어갔다.
미생물 저장고 프로젝트의 두번째 주요 수집 대상은 치즈, 요거트와 같은 발효 식품이다. 연구진은 대변뿐 아니라 유익균이 풍부한 발효식품 표본도 일부 수집했다.
프로젝트팀이 지금까지 수집한 대변 표본은 약 3000개다. 대부분은 도시에 사는 스위스인의 것이라고 한다. 프로젝트팀은 2024년까지 예정돼 있는 시범저장기간 동안 세계 각지에서 2천개의 대변 표본을 추가로 수집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 기간 중 해동과 시퀀싱(염기서열 해독)을 계속하면서 미생물을 장기간 보관하는 데 가장 적합한 냉동 기술이 무엇인지 찾아낼 계획이다.
과학자들이 꼽은 미생물 저장고 후보 가운데 하나인 스위스의 옛 군용 벙커. microbiota.org
스위스 군용 벙커가 유력 저장고 후보
목표는 10만개 이상의 표본을 저장할 수 있는 저장고를 구축하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현재 알프스에 있는 옛 군사용 벙커를 유력한 미생물저장고 후보로 보고 있다. 정치적으로 안정돼 있는 노르웨이도 후보지 가운데 하나다. 그때까지 표본을 냉동 보관하기 위한 자금 100만달러는 확보한 상태다.
프로젝트를 이끄는 과학자들은 미생물 저장고가 생물다양성 보존을 위한 세계적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인체 장내미생물 연구를 강화하는 한편 이로운 장내미생물을 공유하는 데까지 발전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곽노필 선임기자
nop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