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골 마을에 도착한 버스를 시작 지점에서 비춘 영화는 곧바로 온라인 강의로 넘어간다. 가운데 위치한 강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비록 많이 접하던 프로그램의 모습은 아니지만, 코로나19 시대 이후 모두가 익숙해진 실시간 온라인 회의의 바로 그 광경이다. 검은색으로 채워져 있는 강사의 화면으로 카메라는 점점 더 다가가고, 곧이어 고통에 빠진 상태에서 소설 <모비 딕>에 관한 에세이를 어떻게든 읽으려 하는 무지막지한 거구의 인물이 등장한다. 영화 <더 웨일>의 시작 장면이다.
272kg의 몸에 발생한 여러 문제를 치료받지 않은 채로 버텨 온 주인공 찰리는 곧 자신에게 죽음이 닥치리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동안 거리를 둬 온 딸을 만나려 한다. 그는 동성 애인과의 생활 때문에 부인과 여덟 살 딸을 버린 적이 있으며, 그 이후로 딸과의 관계는 다시 회복되지 못한 상태다. 딸은 주변의 모두를 상처 입히려는 듯 굴고, 심지어 엄마도 딸을 어떻게 하지 못해 거진 포기한 상태다. 남은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찰리는, 딸이 좋은 삶을 살 수 있다는 작은 확신이라도 얻고 떠나려 한다.
동명의 연극은 대런 애러노프스키 감독의 손으로 재탄생했고, 영화는 소설 <모비 딕>처럼 운명과의 싸움, 그리고 구원의 문제를 놓고 씨름한다. 그리고 영화는 너무도 훌륭하게 그 결말을 성취한다. 영화의 의미를 다시 검토하는 데에 이 자리가 그렇게 적절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또는 다른 분들이 그에 관해선 이미 여러 번 뛰어나게 말씀해 주셨으므로) 나는 여기에서 이 영화를 의료인문학적 관점에서 읽고자 한다. 무엇보다 영화가 대결하고 있는 대상을 여기에선 병으로 이해할 것이다.
기억하시겠지만 <모비 딕>은 주인공 이슈미얼이 백경, 모비 딕을 향한 에이해브 선장의 복수에 휘말려 그것을 관찰한 뒤 내놓는 긴 넋두리다. 소설 마지막 에이해브는 모비 딕에게 작살을 던지고, 그 줄에 휘말려 죽는다. 소설은 자연과 인간, 운명과 선택, 또는 무자비함과 의지의 대결을 그리고 있는 것으로 읽히곤 한다. 인간에겐 하나도 관심 없을 모비 딕이 자신에게 계책을 거는 악마라고 꿈에서도 부르짖는 에이해브의 열정을 허튼소리라고 부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아마 우리도 그런 열망으로 세상을 살고 있을 테니까. 그렇다면 영화는? 주인공은 무엇과 싸우고 있는가?
일차적으로는 그의 몸일 것이다. 정신적 허기를 해소하지 못한 주인공의 폭식은 엄청난 체중과 심혈관계 이상이라는 귀결을 가져오고, 찰리는 자신의 몸을 어찌하지 못하여 마지막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어떻게든 자신의 존재 증명을 남기려 하고 있다. 연극 원작인 탓도 있겠지만, 영화 전체는 그다지 넓지 않은 찰리의 집 안을 벗어나지 않고 진행된다. 하지만 찰리가 혼자서 존재론적 위기에 처할 때 (즉, 자기 삶이 부정당함을 볼 때) 배경음악은 그곳이 마치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인 것처럼 시청자들을 현혹한다. 그렇다. <더 웨일>의 방은 모비 딕을 사냥하러 가는 피쿼드호다. 그리고, 그 앞에서 ‘고래’와 가장 가까운 모습으로 보이는 것은 당연히 화면을 가득 채우는 거대한 찰리의 몸이다. 찰리는 자기 몸과 싸우고 있다. 이런 서사, 우리가 흔히 접해 왔다. 우리도 스스로의 몸과 싸우는 일을 여러 번 경험해 왔으니까. 다이어트, 금연, 금주, 내려오는 눈꺼풀을 억지로 부여잡고 밤을 버티는 일까지, 모두 자신과 싸우는 일이다. “더 웨일”의 고래를 몸이라고 생각하면 영화는 단순하다. 주인공이 폭식과,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심혈관 질환과 싸우는 이야기.
하지만 그렇게 이해하면 굳이 이 영화를 볼 필요가 없어진다. 몸과 싸우는 이야기는 소설, 논픽션, 영화에 걸쳐 넘쳐흐르고, 굳이 이 영화가 그런 부분에 있어서 설득력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무엇보다 주인공이 딱히 몸과 싸우지 않는다. 게다가 나는 이 영화의 마지막을 보면서 오열했는데, 그런 이야기라면 나는 이상한 사람이 된다.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자. 이 접근을 위해, 우리에겐 사회적 병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필요하다.
영화 <더 웨일>은 찰리 역을 맡은 브랜든 프레이저의 호연과 함께 아카데미상 2개 부문 수상 등 좋은 결과를 얻어냈다. 많은 이들이 젊었을 적 미남 배우로 영화계에서 혹사당한 다음, 이혼 후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아들을 키우는 프레이저 본인의 삶과 영화를 겹쳐 보았다. 출처: 다음 영화
사회적 병이란 무엇인가
지난번 개략적으로 설명했던 것처럼, 다분히 생물학적 차원에서 구성되는 질병이나 개인적, 경험적 차원에 위치하는 질환과 달리 사회적 차원에서 나타나는 병의 문제가 있다. 한편으론 질병이나 질환을 사회가 악화시키는 경우들이다. 일상에서 가장 쉽게 접하는 예가 과로로 인한 질병, 더 나아가 과로사다. 개인에게 충분한 휴식을 보장하지 않으며 계속된 긴장을 요구하는 사회적, 직업적 환경에서 유전이나 다른 이유로 그가 가지고 있던 소인이 악화하여 급성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일 같은 것이다. 또는 사회적 환경의 차이로 인해 인구 집단에서 질병이 다르게 나타나는 현상도 있다. 일반적으로 고소득층보다 저소득층에서, 부촌보다 빈민촌에서 여러 질병이 더 많이, 더 심하게 나타난다. 쉽게는 충치나 잇몸질환 같은 것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명백히 저소득층과 빈민촌에서 충치도, 잇몸질환도 많이 나타나니까.
다른 한편으론 사회적 상황이나 요인으로 인하여 병이 되는 것도 있다. 사회는 어떤 것이 문제인지 문제가 아닌지 규정하며, 문제라고 규정된 것 중 개인의 몸에 나타나는 것은 병의 꼬리표가 붙는다. 예를 들어 우생학을 살펴보자. 아시는 것처럼 우생학은 인구 전체(주로 어떤 나라 국민)의 유전적 성향을 증강하려는 노력을 말한다. 이를 위해 두 가지 방법을 우생학은 취한다. 하나는 우월한 이들의 결혼과 출산을 장려하는 것, 다른 하나는 열등한 이들의 결혼과 출산을 금지하는 것. 다른 것도 문제지만, 여기에서 가장 큰 문제는 사회가 ‘우월’과 ‘열등’의 기준을 정한다는 데 있다. 나치 독일이 유대인과 집시의 피를 열등하다고 결정하였을 때, 민족은 사회적 병이 되었다.
장애나 유전 질환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으로 말할 수 있다. 장애로 개인의 삶이 불편할 수는 있다. 그러나 장애인은 비장애인에 비해 열등한가.
아니다. 그런데도 사회가 특정한 민족, 장애, 심지어 언어나 능력을 ‘열등’한 것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개인의 문제로 귀속할 때, 사회는 불명확한 근거로 이런 요인들을 병으로 만든다. 이것 또한 사회적 병이다. 나는 이런 사회적 병을 ‘우환’(憂患)이라고 부르려 하는데, 환(患)이라는 글자가 근심, 병, 재앙을 모두 의미하는 한편, 우(憂)라는 글자는 병과 고통, 괴로움을 모두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병이란, 개인의 차원을 넘어선 문제들, 재앙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몸과 마음의 괴로움을 가리키는 것이며, 그로 인해 우리는 앓는다.
혐오와 배제의 세상에 작살을 던져라
<더 웨일>에서 찰리는 표면적으로 식욕을 통제하지 못해 초고도 비만이라고 표현할 범위도 넘어선 몸 상태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왜 그런 상태에 빠졌는가. 그의 연인을 용납하지 않았던 사회가, 신이 그의 연인을 죽음으로 몰고 갔기 때문이다. 그의 사랑이 그의 연인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와 연인의 관계가 용납될 수 없는 병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의 삶이, 우환이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화가 상대하는 고래는 찰리의 생물학적 신체가 아니다. <더 웨일>의 모비 딕은 그를 혐오와 배제의 대상으로 만드는 세상이다. 원소설의 모비 딕과 마찬가지로, 세상은 개인에겐 별 관심이 없다. 개인을 일부러 죽이려고 드는 것도, 그에게 원한 감정이나 악의에 가득 찬 계략이 있어서 그를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 무관심함으로 인하여 우리는 죽는다. 세상의 거대한 물결에 누군가는 망망대해에 빠져 외롭게 스러져 간다. 그 불편부당함, 강자라고 더 큰 어려움을 주지 않고 약자라고 보호해 주지 않는 그 공평함 앞에 우리의 삶을 위한 노력은 무용해진다. 그리하여 에이해브가 이길 수 없는 상대임을 앎에도 증오의 작살을 쳐들 때, 우리는 그를 응원할 수밖에 없다.
영화는 찰리와 딸이 함께 에이해브의 작살을 쳐들어 세상에 던지는 모습을 격정적으로 그려낸다(물론 영화엔 작살도, 싸움도, 심지어 격렬한 움직임도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더 웨일>을 통해 본다. 세상은 승리할 것이다. 개인의 작은 몸짓은 그 거대함에 자그마한 흠집을 내는 정도밖에 할 수 없다. 그러나 그 흠집들이 언젠가 세상을, 거대한 고래를 쓰러뜨릴 것이다. 우리를 포위한 우환은 어떻게 하기가 쉽지 않다. 멀게는 4·3부터 가깝게는 이태원까지, 넓게는 조선인의 피를 열등한 것으로 규정한 일제부터 좁게는 유전공학을 둘러싼 여러 실천까지, 세상은 그 무심함으로 개인의 권리를 빼앗고 그를 질식시킨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무용해 보이는 작살들을 던질 때, 그 병들은, 우환은 언젠가 쓰러질 것임을.
김준혁/연세대 교수·의료윤리학자 junhewk.kim@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