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의 해부도 중 하나. 측두부, 팔과 등, 엉덩이의 근육을 보여주고 있지만, 인물은 하늘과 땅을 가리키면서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외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해부학적 지식이 하늘(지식)과 땅(사실)을 연결할 수 있다는 베살리우스의 의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지난번에 미처 다 하지 못했던 질병 이야기를 더 해보려 한다.
앞선 칼럼에서 질병의 실재론과 구성주의를 살폈다. 다시 간단히 정리해보면, 실재론은 “저기 있는 사물은 진짜 있다”라고 주장하며, 구성주의는 “저기 있는 사물은 우리가 그러한 것이라고 정한 것일 뿐이다”라고 주장한다.
추상적인 표현은 어려우니 맛있는 사과를 가지고 이야기한다면, 실재론은 “여기에 진짜 사과가 있다”라고 말하고, 구성주의는 “여기엔 우리가 ‘사과’라고 부르는 감각의 집합(빨간색, 새콤달콤한 맛, 바삭거리는 식감 등)이 있을 뿐, 진짜 무엇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라고 말한다.
인간의 관점에서만 볼 땐 사실 이런 주장은 철학자의 말장난처럼 보인다. 하지만 다른 동물의 관점을 취해보면 상황은 달라진다. 박쥐는 어두운 동굴에서 살기에, 가시광선 대신 초음파로 세상을 본다(이 사례는 토머스 네이글이라는 철학자가 쓴 논문에서 유래한다). 아니 ‘들어서 본다’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박쥐가 보는 사과는 우리가 보는 사과와 같을까? 아마 상당히 다를 것이다. 적어도 박쥐에겐 사과는 빨갛지 않을 것이다. 초음파로 ‘본’ 사과는 아주 다르진 않더라도 형태도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우리가 레이더로 보는 사물이 눈으로 보는 것과 다른 것처럼). 그렇다면 인간의 ‘사과’와 박쥐의 ‘사과’ 중 무엇이 더 사실에 가까운가?
우리가 보고 냄새 맡고 만져서 확인하여 “여기 있다”라고 믿은 사물은 그저 인간 종의 편견으로 확인한 사물의 특징을 조합한 것일 뿐이다. 즉, 이 사물들이 어떻게 있는지, 정말 어떤지 우리는 영영 알 수 없다. 따라서 오히려 “저기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고, 그것은 그저 우리의 합의일 뿐이다”라고 말하는 구성주의가 더 사실에 가깝다고 말해야 한다.
하지만 의학에선 이런 태도는 위험해서 채택하기 어렵다. 건강이나 질병이 그저 우리의 합의일 뿐이라면 그것은 다른 ‘합의’를 채택하는 데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간단히 말해 현재 의학이 취하는 치료법은 그저 합의일 뿐, 실제 질병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따라서 어떤 질병에 대해 어떤 치료법을 택해도 된다.
의학의 역사는 이런 다양한 질병과 치료법에 대한 주장 중 환자에게 더 도움이 되는 것을 취사선택해 온 과정을 보여준다. 특히 현대 의학은 그전까지 난립하던 의심스러운 의학들 대신 병리생리학적 지식, 즉 정상 신체와 병든 신체의 세포, 기관, 작용을 비교하여 질병 문제를 신체 각부에 위치시키고, 그 해결책을 통계적 기법을 통해 확인해 나가는 방식을 택해 실용적 측면에서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다.
물론 현대 의학이 백퍼센트의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 중 가장 많은 사람을 치료하는 방법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여기에 구성주의를 가져오면, 이런 지식은 그저 의사들의 합의일 뿐 실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노력은 그저 의사들의 자리를 보전하기 위한 일이라고, 심지어 내 손을 대면 모든 병이 낫는데 왜 약을 먹고 수술을 하느냐고 누군가 주장해도 반박할 말이 없게 된다.
실재론(적어도, 이전의 실재론)을 택하자니 그것은 현실과는 거리가 있는 순진한 편견을 노출하는 셈이다. 구성주의를 택하자니 이롭고 해로운 지식을 가릴 방법이 없어진다. 이것은 환자와 사회에 문제를 가져온다. 다행히도 이런 상황에 대한 흥미로운 대답을 과학기술학이 제공하고 있다.
아네마리 몰은 의학을 연구 주제로 삼아 인류학적 연구를 하는 학자다. 의학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라는 말이 바로 다가오지 않으실 것 같다. 인류학적 연구는 학자가 자신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문화권에 가서 현장 연구를 통해 해석하는 것을 의미한다. 몰은 병원을 자기 현장 연구의 장소로 삼았다. 그는 의료인과 환자가 질병과 치료를 어떻게 다루는지 관찰하는 연구를 수행했다. 그 결과물이 국내에도 2022년 번역되어 소개된 ‘바디 멀티플’이라는 책이다.
몰의 ‘바디 멀티플’. 의학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으로도, 인식론에 관한 흥미로운 고찰로도 모두 뛰어난 책이다. 알라딘
몰은 병원에서 동맥경화증이 다루어지는 방식을 관찰한다. 그리고 흥미로운 결과를 내놓는다. 병원의 구역마다 ‘동맥경화증’이 다른 형태를 취한다는 것이다. 상담실에서 동맥경화증은 다리의 통증이다. 하지만 병리과에서, 동맥경화증은 현미경을 통해 관찰된 혈관 내막의 두꺼워짐이다. 문제는 통증과 혈관의 변화가 꼭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환자는 통증을 호소하는 곳에서 혈관의 두꺼워짐이 관찰된다. 하지만 통증이 없었는데도 사망 후 부검에서 전신의 혈관이 두꺼워진 것이 관찰되거나, 통증이 심한데도 혈관의 변화가 관찰되지 않는 환자도 있다.
왜 진료실과 병리과의 동맥경화증은 다른가? 몰이 내린 답은 실천의 차이에 있다. 우리는 어떠한 증상들에 ‘동맥경화증’이라는 이름을 붙이며, 그런 증상을 일으키는 신체의 어떠한 변화는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접근하는 실천이 장소마다 다르다. 진료실에서 의사는 환자에게 경험한 통증을 물어보고 촉진 등을 통해 검사한다. 병리과에서 의사는 환자에게 묻지 않는다. 의사는 조직 슬라이드를 현미경으로 본다. 두 실천의 차이는 다른 두 가지의 동맥경화증을 만들어낸다. 문진(질문을 통한 검사)이라는 실천은 동맥경화증을 통증 경험의 유무로 빚어낸다. 현미경을 통한 시각화라는 실천은 동맥경화증을 혈관 조직의 변화로 빚어낸다.
여기에서 빚어낸다는 표현을 썼는데, 과학기술학자들은 ‘번역’이라는 표현을 쓴다. 이 말은 최근 작고한 브뤼노 라투르라는 과학기술학자가 사용한 것으로 이후 널리 퍼졌다. 어떤 병을 가진 환자가 병원에 왔을 때, 의사는 그에게 여러 질문을 던지고 신체 검사를 하여 그의 상태를 동맥경화증으로 번역해 낸다. 같은 환자가 수술받거나 어떤 이유로 사망한 후 부검할 때, 그의 조직은 슬라이드가 되어 병리과로 옮겨지고 의사는 그 관찰을 동맥경화증으로 번역해 낸다. 여기에서 신체의 상태와 질병의 결정 및 치료법은 의사가 사용하는 도구와 지식을 통해 매개되고,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옮겨진다. 의학에서 번역은 구체적인 신체를 추상적인 의학 지식으로 옮기는 역할을 한다. 여기 있는 어떤 몸의 상태를 우리가 쌓은 의학적 규정으로 변환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는 관점은 실재론과 구성주의 한쪽을 선택해야 할 필요성을 지운다. 여기 있는 사물은 사용하는 도구와 지식으로 매개되어, 인간들의 합의로 옮겨진다. 실천(도구나 지식)이 다를 때, 사물은 얼마든지 다른 것으로 표현될 수 있다. 그러나 여러 다양한 것으로 구성될 수 있다고 하여, 저기에 무엇이 없다고 말할 이유는 없다.
질병의 진단은 그저 현미경을 들여다보는 행위가 아니다. 픽사베이
내가 자신 있는 치과의 예로 다시 말해보자. 이전, 충치 진단이 왜 치과마다 다른가를 이야기했었다. 그것은 치과의사가 미생물로 인한 치아 표면의 변화 어디까지를 충치라고 말할 것인가에 따라 달라진다고도. 이게 어느 정도는 맞지만, 그렇다고 하여 현실에 대한 온전한 그림은 아니다. 빠진 것은 치과의사의 실천이다. 충치를 검사함에 있어서 치과의사는 어떤 기구와 지식을 통해 접근하는가? 심지어 치과의사는 어떤 ‘몸’(치과의사의 시력 등)을 통해 충치에 접근하는가? 이들 요소가 충치를 다른 방식으로 규정하는 데, 아니 ‘번역’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예컨대 탐침(어느 치과나 가면 트레이에 치과용 거울과 함께 올려져 있는 뾰족한 검사 기구다)으로 충치를 검사하면, 치과의사는 치아 표면이 탐침의 뾰족한 끝으로 긁히는지 확인한다. 긁히지 않으면 치아의 해당 부위엔 충치가 없다. 긁히면? 그곳에 충치가 ‘있다’. 한편 방사선 사진으로 충치를 검사하면, 치과의사는 치아에서 색깔이 진해진 부분을 찾는다. 치아는 단단한 물질이기 때문에 방사선이 잘 통과하지 못하고, 따라서 방사선 사진에서 하얗게 나온다. 하지만 충치가 생겨 치아 표면이 약해지면, 방사선이 통과하기 쉬워져 방사선 사진에서 더 검은색으로 나오게 된다.
즉, 치아 표면의 변화는 치과의사의 다른 실천으로 인해 다른 방식으로 ‘번역’되고, 여기에 우리는 ‘충치’라는 이름을 붙인다. 치과의사들이 환자와 그 치아를 다른 방식으로 대하기에, 충치는 다양한 방식으로 옮겨질 수 있다. 치의학은 ‘치아의 약해짐’이라는 현상을 포착하기 위한 다양한 방식을 개발해 왔고, 이런 여러 방식은 충치가 하나 아닌 방식으로 규정되는 것을 허락한다.
여기에서 방식이라고 말한 치과의사의 실천에는 여러 가지가 포함된다. 탐침과 방사선 사진만을 예로 들었지만, 치과의사의 실천에는 그의 배경, 전공, 삶의 궤적이 반영된다. 소아치과 수련을 받은 나와, 치과보철과 수련을 받은 내 친구의 치과적 실천은 다르고, 이는 환자의 질병 상태를 다르게 결정하는 이유가 된다.
심지어 의료 제도와 의학적 가치도 의사의 실천을 구성하는 요소다. 우리나라처럼 치료 행위 하나하나에 치료비를 매기는 방식(행위별 수가제라고 한다)을 취하는 국가에선, 확인되는 질병의 양은 늘어난다. 아무래도 많은 ‘치료’를 하는 것이 의료인 자신이든, 병원이든, 심지어 국가에도 이득이 되니까. 한편 다른 나라처럼 지역사회에 몇 명의 환자를 의사의 책임으로 배정하고, 치료를 많이 하는 것과 무관하게 정해진 금액을 의사에게 준다면(인두제라고 한다) 진단되는 질병의 양은 아무래도 줄어들게 된다. 이쪽에선, 치료하지 않으면 문제가 되는 신체 변화만을 질병으로 ‘번역’하기 쉽다.
어느 쪽이 옳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처럼 치료를 많이 하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는 신체 변화에 빨리 개입하는 것도 어떤 면에선 장점이 있다. 외국처럼 가능한 한 유지, 관리를 택하는 것도 당연히 장점이 있다. 여기에서 살펴야 하는 것은 질병을 번역하는 실천의 다양성과, 그에 따른 질병의 차이다. 무엇보다 실천을 다양하게 만드는 것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요소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도.
우리는 질병 실재가 없다고 말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다종다양한 실천 때문에, 생각보다 훨씬 다양한 방식으로 규정될 수 있다. 즉, 질병의 진단은 그저 실험실에서 현미경을 들여다보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사회문화적, 경제적, 의료적, 의학적 영역들이 실천을 통해 빚어낸 결과물이다.
김준혁/연세대 교수·의료윤리학자 junhewk.kim@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