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지역에 널리 분포하는 흰꼬리사슴 집단 내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장기간 순환하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인수공통감염병인 코로나19 바이러스의 감염 위험은 사람한테만 있는 건 아니다. 동물도 마찬가지다.
미국 캐리생태계연구소가 기계학습을 이용해 예측한 것을 보면 유전적 관계가 가장 가까운 영장류와 박쥐, 여우, 꽃사슴, 너구리, 마카크, 천산갑, 반달가슴곰, 재규어 등이 감염 위험이 큰 동물이다.
실제로 지난해 덴마크에서는 밍크가 집단감염된 것으로 드러나 수백만마리를 살처분했고, 미국 15개주에서는 야생 흰꼬리사슴이 감염된 것으로 나타났다. 올해 들어선 1월 홍콩에서 반려동물인 햄스터가 델타 변이에 감염된 것으로 드러나 수천마리를 살처분했다. 동물원에 있는 사자, 호랑이, 고릴라 등도 사육사를 통해 감염된 사례가 잇따랐다.
코로나19의 동물 감염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인수공통감염 바이러스의 경우 사람과 동물 사이를 오가면서 새로운 변종을 출현시킬 가능성 때문이다. 무방비 상태인 동물 집단이 새로운 변종 바이러스의 저수지가 될 수 있다.
최상위 감염 위험 동물군에 속하는 흰꼬리사슴은 그런 저수지 후보 중 하나다. 흰꼬리사슴은 북미 전역을 포함해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넓게 분포해 있는 대표적 발굽동물(유제류)이다.
지난해 중반 이후 자취를 감춘 알파 변이가 흰꼬리사슴 집단 내에서 장기간 순환하며 변이를 계속하고 있고, 흰꼬리사슴에서 사람으로 다시 바이러스가 전염될 수도 있음을 시사하는 연구가 잇따라 나왔다.
원조 코로나19 바이러스에 17개의 변이(8개는 돌기 단백질에 발생)가 생기면서 전염성이 40~80% 더 강해진 알파 변이는 2020년 9월 영국에서 처음 등장했다. 이후 빠르게 확산되기 시작하자 세계보건기구는 그해 12월18일 알파 변이를 우려변이로 지정했다. 알파 변이는 팬데믹 발생 이후 최초로 지정된 우려 변이였다. 2021년 4월엔 미국 신규 감염자의 60% 이상이 알파 변이에 감염됐을 정도로 우세종으로 올라섰다.
그러나 델타 변이의 등장과 함께 4~5월에 정점을 찍고 이후 빠르게 감소해 6월 이후에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감염 사례 보고가 없었다. 한국의 경우엔 2021년 6월8일이 마지막 감염 사례였다.
2021년 5월3일~8월15일 노르웨이에서 검출된 알파 변이와 델타 변이의 비율. 6월을 지나면서 우세종이 알파에서 델타로 급변했다. 국제감염병저널(2021.12.10.)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연구진은 2021년 가울과 겨울 사냥에서 잡힌 흰꼬리사슴 93마리에서 채취한 코 면봉을 분석한 결과 전체의 19%인 18마리가 코로나19 양성반응을 보였다고 사전출판 논문집 ‘메드아카이브’에 발표했다.
그런데 이 가운데 7개 표본의 전체 게놈을 해독한 결과 5개는 당시 우세종이었던 델타 변이였으나, 나머지 2개는 이미 퇴출된 것으로 알려진 알파 변이였다.
사슴에서 알파 변이를 검출한 때는 많은 나라에서 마지막 감염 사례가 나온 지 반년이나 지난 11월이었다. 연구진은 이는 알파 변이가 오랫동안 펜실베이니아 사슴 집단 내에서 순환해왔음을 시사한다고 밝혔다.
두 개의 알파 변이도 구조가 서로 달랐다. 이는 두 바이러스가 각기 다른 시기에 사람으로부터 전파됐음을 뜻한다.
델타 변이 역시 두개의 다른 그룹으로 나눌 수 있는 것으로 보아 두번의 종간 전파가 있었을 것으로 연구진은 추정했다. 델타 변이의 게놈은 당시 사람들한테서 검출된 것과 일치했다.
이번 연구는 사슴의 코로나 감염이 일회성이거나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는 걸 말해준다. 연구진은 그러나 그 이상의 유추해석에 대해선 경계했다.
코로나19 바이러스 알파 변이의 전자현미경 채색 사진. 녹색 부분이 세포와 결합하는 돌기(스파이크) 단백질이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이어 며칠 뒤 캐나다 연구진이 2021년 11~12월 온타리오주 사냥꾼들에 희생된 300마리의 흰꼬리사슴에서 채취한 면봉을 분석한 연구 결과를 사전출판논문집 ‘바이오아카이브’에 발표했다. 이 연구에선 전체의 6%가 코로나19에 양성반응을 보였다.
연구진은 이 가운데 5개의 표본에 대해 전체 게놈 서열을 해독했다. 그 결과 이전에 본 적이 없던 독특한 변이를 발견했다. 최초의 코로나19 바이러스와 비교해 총 76개의 변이를 가진 바이러스였다. 돌연변이 중 일부는 이전에 사슴, 밍크 등에서 발견된 것과 같았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사슴에서 검출된 바이러스가 미시간주 감염자들의 것과 매우 비슷했다는 점이다. 2020년 11~12월 온타리오 남서부에서 채취한 것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2020년 초가을 미시간 지역의 사람과 밍크에서 채취한 것과도 비슷했다.
이는 2020년 하반기 이후 기존 바이러스에서 갈라져 나온 새로운 바이러스 계통이 그동안 탐지되지 않은 채 진화해 왔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정확한 전파 경로는 불분명하다. 인간에서 사슴으로 직접 또는 밍크를 거쳐 전파됐을 수도 있다.
더 주목할 만한 것은 2021년 가을 온타리오의 한 감염자한테서 채취한 바이러스가 사슴에서 채취한 것과 매우 흡사했다는 점이다. 연구진은 “이 사람은 사슴과 밀접하게 접촉해 왔다”고 밝혔다.
당시 온타리오주는 코로나 양성반응을 보인 모든 사람들의 바이러스 샘플에 대해 게놈 해독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사람과 비슷한 바이러스를 보유한 감염자는 찾지 못했다. 연구진은 이 사례만으로 사슴에서 사람으로 바이러스가 전파됐다는 증거를 삼을 수는 없지만, 이 바이러스가 사람들 사이에서 진화했을 가능성은 낮다고 밝혔다. 인간한테서 사슴으로 넘어온 바이러스가 진화를 거쳐 다시 인간으로 전파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얘기다.
연구진은 그러나 이번 연구에서 발견한 것은 초기 징후일 뿐이며 이 새로운 바이러스 계통이 사람들한테 큰 위험을 초래한다는 증거는 없다고 연구진은 덧붙였다.
두 연구는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사람뿐 아니라 사슴 집단에서도 장기간 순환하고 있을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숙주가 많을수록 바이러스가 진화할 기회는 더 많아진다.
곽노필 선임기자
nop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