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 ‘변신’ 초판 표지 삽화. 출처: 위키피디아
11월 초, 백신 접종과 치료제의 개발 소식에 설레면서 ‘드디어 코로나19가 지나가는가’ 하고 생각했던 나의 어리석음을 뒤돌아본다. ‘위드 코로나 1단계’의 시행은 잠시간의 즐거움을 주었을지 모르나, 확진자와 위중증 환자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크기로 늘어났다. 더구나, 오미크론 변이 소식이 들려오면서 현재의 확산 추세를 계속 견디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판단에 따라 정부는 다시 문을 걸어 잠그는 선택을 내렸다. 다시 사회적 거리두기의 시간이 돌아왔다.
이 2년간, 문을 열고 잠그는 행위를 반복했던 시간을 무엇으로 이해할까. 우리는 사건을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므로, 사태를 설명해 줄 이야기를 찾는다. 2020년 초, 코로나19가 전 세계로 퍼져 나가던 시점에는 소더버그 감독의 영화 ‘컨테이전’이 그런 역할을 했다. 2020년 후반에는 격리 상황에서 사람들의 행동 양상을 보여준 카뮈의 소설 <페스트>가 많이 읽혔다. 지금은? 나는 열었던 문을 다시 걸어 잠근 현재를 하나의 비극으로, 또는 하나의 기이(grotesque)로 보여주는 소설을 꼽고 싶다. 카프카의 중편 ‘변신’이다.
‘변신’은 첨예화하던 자본주의 속 고립되어가는 개인의 실존적 조건을 그린 환상소설이 아닌가, 이 소설이 팬데믹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타당한 질문이다. 하지만, ‘변신’은 다른 무엇보다도 사회적 거리두기에 관한 이야기이며, 어쩔 수 없이 타인들로부터 격리된 개인의 심리에 관한 소설이다. 주인공의 변신이 감염병으로 인해 초래된 것이라고 말해도 나는 좋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해석은 완전히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변신’에서 팬데믹 속 삶의 조건을 읽은 책으로 브뤼노 라투르의 <나는 어디에 있는가?>가 있다.[1] 이 책에서 라투르는 ‘변신’의 주인공이 처한 조건이 코로나19로 격리된 사람들의 조건을 잘 보여주고 있음을 지적한다. 마치 벗어날 수 있고 언제든 갈아탈 수 있을 것처럼 생각했던 삶의 공간이라는 환상을 그는 공격한다. “우리는 여기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이 온도, 이 대기, 그리고 예전엔 우리가 돌볼 필요 없이 그저 ‘그 안에’ 우리 자신을 들보처럼 ‘자리매김하기’만 짊어지겠다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85쪽) 라투르는 코로나19에서, 기후 재앙에서 벗어나 살 수 있는 다른 삶의 공간은 없으며, 이 지구에서 살기 위해 우리가 변해야 한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외친다.
하지만 라투르의 책은 독해가 어려워서 선뜻 권하기 쉽지 않다. 따라서, 이 자리를 빌어 ‘변신’에 관한 새로운 해석을 전하려 한다. ‘변신’은 말한다. 현대 사회는 이미 우리를 격리 상태에, 사회적 거리두기 상태에 몰아넣고 있었다. 코로나19는 그것을 깨닫게 한 계기, 그야말로 변신일 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코로나19 박멸이 아니라(물론 바이러스는 어떻게든 해결해야 할 테지만),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던 거리두기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슬기로운 거리두기 생활’이라고 이름하려 한다.
그레고리 잠자는 어느 날 침대에서 일어났더니, 자신이 갑충(커다란 벌레로 읽히지만, 카프카 본인이 잠자=곤충이라는 해석을 경계하여 출판사에 표지에 벌레 그림을 넣지 말라고 강조한 바 있다)으로 변했음을 깨닫는다. 당장 출근하려 하지만,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는 그는 어쩔 줄 모른다. 잠자는 방을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버릇처럼 문을 잠근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출근 시간인 일곱 시를 조금 넘기자마자 출근하지 않는 그를 독촉하려 지배인이 찾아오고, 결국 모두가 그의 변신 사실을 알게 된다.
방에 갇혀 생활하는 잠자를 챙기는 것은 여동생뿐이다. 그는 이전에 즐기던 음식을 먹을 수 없고, 벽을 기어 다니며 생활한다. 잠자라는 경제 수단을 잃어버린 가족은 모두 일자리를 구한다. 완전히 은퇴했다고 생각했던 아버지는 다시 힘을 되찾고 은행 수위로 일한다. 한편, 아들을 편히 해주려다가 그의 모습을 보고 놀라 기절한 어머니를 보고 오해한 아버지는 잠자에게 사과를 던진다. 큰 상처를 입고 잠자는 허약해진다.
이런 와중,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가족은 집에 하숙인을 들인다. 어느 날, 여동생이 바이올린 연주를 하자 하숙인들은 자신들의 앞에서 곡을 켤 것을 요구하고, 음악 소리에 홀린 잠자는 자기 모습을 모두에게 노출한다. 하숙인들은 떠나겠다고, 하숙비를 내기는커녕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고 말한다. 더는 잠자와 함께 살 수 없다고 말하는 가족, 특히 여동생은 ‘저것’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외친다. 이 모든 사태를 안 잠자는, 가족을 생각하다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가족은 잠자 없이도 살아갈 것이다.
2011년 로얄 오페라 하우스에서 공연된 희곡 ‘변신’의 한 장면. 출처: 가디언
‘변신’[2]의 이런 줄거리는 주인공 잠자를 향한 동일시와 연민을 불러온다. 우리 모두 자본 앞 노동의 조건에서 어떻게든 일을 이어가고 있으며, 매일 사표를 내던지는 상상을 하고 있지 않은가. “부모님 때문에 꾹 참고 있으나 그렇지 않았더라면, 벌써 사표를 냈을 것이고 사장 앞으로 걸어가 내가 생각하고 있는 바를 남김없이 털어놓았을 것이다.” (11쪽). 하지만 자본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을 계속 요구한다. “그러니까 자네의 최근의 근무 성적은 아주 만족할 만한 것은 못 돼, 장사가 썩 잘되지 않는 철이기는 하지, 그 점은 우리도 인정하지. 그러나 장사가 안되는 철이라는 건 도무지 있지도 않거니와, 잠자 군, 있어서도 안 된단 말일세.” (21쪽) 언제나, 경제는 우리의 목줄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그레고르와 그의 가족의 장래가 거기에 달리지 않았는가!” (28쪽).
하지만 무엇보다, 잠자의 변신은 바로 코로나19로 우리가 처한 조건이기도 하다. 어느 날, 침대에서 깨어났더니 자신이 다른 존재로 변했음을 알게 된 것은 그레고르 잠자에게도, 우리에게도 똑같이 주어진 운명이다. 잠자에겐 ‘갑충’이라는 이름표가, 우리에겐 ‘확진자’라는 이름표가 붙었다는 차이가 있을 뿐. 잠자가 처음 자신을 가두다가 나중에는 다른 사람에게 기피 대상이 되는 모습에서 코로나19로 자신을, 서로를 가두는 우리의 모습이 비쳐 보인다. “아침에 문들이 잠겨 있었을 때는 모두가 그의 방으로 들어오려 하더니, 이제 그가 문 하나를 열어놓았고 다른 문들은 분명히 낮 동안 열어놓았을 지금에 와서는 아무도 더 오지 않으며 열쇠도 이제는 밖에서 꽂혀 있었다.” (33쪽). 잠자는 이 변신 현상을 ‘장애’로 인식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코로나19로 인한 여러 현상을 장애로 인식하고 있는 것처럼. “바로 지금이야말로 이전의 업적을 기억하여 나중에 장애만 제거된다면 그만큼 더 열심히, 더욱 몰두하여 일하게 되리라는 점을 생각해야 할 시점이 아니겠습니까.” (28쪽)
잠자가 가족으로부터 받는 대우, 그의 감각 변화, 사회로부터의 배제, … ‘변신’의 주인공이 받는 대우가 우리의 코로나19 생활을 유사하게 그려내고 있는 부분을 나열하기는 어렵지 않다. 하지만 둘의 유사성을 찾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변신’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변화의 표상들이다.
1923년의 카프카. 그는 소외, 불안, 죄의식과 같은 주제들을 다룬 소설을 남겨 실존주의의 효시로 일컬어진다. 이 조건들은 현대적 삶의 조건이기도 하거니와, 코로나19 팬데믹 속 우리의 정신적 특징들이 아닌가! 출처: 위키피디아
잠자는 ‘변신’ 내내 무시와 배제에 내몰리는 것 같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가족에게 제공하던 “모든 고요, 모든 유복함, 모든 만족” (33쪽)이 사라질까 염려한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 그에게 찾아오는 행복의 순간이 있다. “특히 그는 천장에 즐겨 매달려 있었다. 그건 마룻바닥에 누워 있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한결 자유롭게 숨 쉴 수 있었으며 가벼운 진동이 전신을 스쳐 지나갔고, 그러다 보면 그레고르가 거기 꼭대기에서 빠져 있는 거의 행복한 방심 상태에서 더러, 그 자신도 깜짝 놀라게 떨어져 바닥에 털썩 소리를 내는 일도 있었다.” (45쪽) 그에게 즐거움을, 자유를 주는 것은 과거에 아끼던 것들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조건이 허락하는 새로운 행위다.
코로나19, 우리는 뉴노멀(new normal)을 말한다. 새로운 표준의 부상을, 아니 새로운 삶의 규정이 우리에게 이미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삶의 규정이, 아니 환경이 새로워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바뀐 것은, 변신한 것은 우리다. 우리는 코로나19 이전의 ‘인간’, 자연의, 감염병의 위력을 잊고 현대 기술의 힘을 맹신하며 무한히 살 것처럼 생각하던 주체로 돌아갈 수 없다. 오히려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는 삶의 규정들이다. 잠자를 괴롭히는 것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집과 가족과 노동 규칙인 것처럼. 코로나19로 우리의 의료적 필요가 변했음에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제도 때문에 우리가 제때 위중증 환자에 대응의 손을 내밀지 못한 것처럼.
해결책은, 아니 적어도 ‘변신’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잠정적인 방향은 무엇인가? 기존의 규정에 얽매이지 말 것, 다시 삶을 원상복구하려 하지 말 것, 지금 주어진 상태에서 기쁨을, 만족을 찾을 것. 이것이 카프카가 잠깐이나마 내다보았던 평안의 순간이었다면, 우리 또한 그에 따라보는 것은 어떤가. ‘인간’이었으나 이제 천장에 매달린 잠자처럼, 우리도 코로나19 이후의 인간으로서 새로운 삶의 형태를 찾아보는 것은.
김준혁/연세대 교수·의료윤리학자
junhewk.kim@gmail.com
참고문헌
브뤼노 라투르. 김예령 옮김. 나는 어디에 있는가? 코로나 사태와 격리가 지구생활자들에게 주는 교훈. 이음. 2021.
프란츠 카프카. 전영애 옮김. 변신·시골의사. 민음사.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