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미래&과학 미래

일제강점기에 일기예보가 없어진 까닭은?

등록 2020-03-30 06:00수정 2020-03-30 10:08

[박상준의 과거창]
1941년 태평양전쟁 일으킨 일제
“항공작전에 중요”…기밀로 취급
진주만 공습 직후 신문서 사라져
1929년 조선박람회에 전시된 일본군의 방공용 청음기. 서울SF아카이브
1929년 조선박람회에 전시된 일본군의 방공용 청음기. 서울SF아카이브

어렸을 때 집에는 백열전구에 씌우는 검은색 접이식 갓이 있었다. 이걸 내려 펴면 빛이 사방으로 퍼지지 않아서 등화관제 때에도 불을 켤 수 있다. 등화관제는 야간에 적 항공기가 공습을 해도 시가지를 비롯한 목표 지점을 잘 식별할 수 없게 조명을 끄도록 통제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1990년까지 민방위 훈련의 하나로 등화관제를 실시했었다. 지금의 30대 중반 이하 연령층은 잘 모르겠지만, 그 당시엔 동네 반장이나 이장이 밤에 돌아다니며 집집마다 불 끄라고 소리치는 풍경이 일상적이었다.

그런데 등화관제 이전에 기상관제라는 것도 있었다. 일본은 태평양전쟁 때 ‘아군의 항공작전에 중요한 기상은 적에게도 중요하다’며 기상 정보를 철저하게 통제했다. 일기예보를 군사 기밀로 취급해서 민간인은 접할 수 없게 한 것이다. 태평양전쟁은 1941년 12월7일에 일본군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는데, 그 다음날을 마지막으로 일본의 신문에서 일기예보가 사라졌다. 라디오 방송의 기상예보도 마찬가지였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4년 가까이 일반인들은 태풍이나 폭우가 와도 사실상 미리 대비할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태평양전쟁 훨씬 전부터 이미 일본은 기상이 군사 작전에 미치는 영향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1938년에 조선총독부 관측소장으로 있던 구니토미 신이치는 ‘전쟁과 기상’이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해외 여러 나라는 군비를 준비하는 동시에 기상관측망 정비도 충실히 해서 유사시를 대비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당시 인천에 있던 관측소는 이듬해인 1939년에 조선총독부 기상대로 격상된다.

기상 관측의 용이성과 정밀도를 크게 높여준 인공위성은 1960년대에야 실용화되었고, 레이더는 그에 앞서 2차 대전 중에 영국을 시작으로 각국에서 개발되기는 했으나 일본 장비는 성능이 떨어져서 직접 눈으로 관측하는 방법을 선호했다고 한다. 특히 기상 관측뿐만 아니라 적 항공기를 사람의 시각 및 청각으로 식별하는 기술은 일본이 전통적으로 강점을 보였다. 일찍이 이런 기술을 보조하는 장비도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개중엔 지금 보면 원시적이라 할 만큼 눈에 띄는 것도 있다. 예를 들어 1929년 조선박람회에 전시된 일본군의 청음기라는 장비는 커다란 나팔을 모아 놓은 것처럼 생겼다. 사실은 적 항공기의 비행음을 포착하기 위한 집음 장치이다. 이런 방식의 청음기는 서양 각국에도 있었으며 1, 2차 세계대전에서 널리 쓰였다.

태평양전쟁이 미국의 승리로 끝나면서 일제강점기는 1945년에 종말을 고했지만, 불과 5년 뒤에 일본은 다시금 한반도에서 커다란 경제적 이득을 취할 기회를 얻는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미군을 주축으로 하는 유엔군이 개입하면서 일본은 후방 군수 생산기지의 역할을 맡아 ‘한국전 특수’를 누린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일본에 흘러 들어간 돈은 일본 과학의 부흥에 밑거름이 된다. 일본은 1950년대 후반부터 약 20년간 이어지는 고도성장기에 접어들게 되는데, 일본의 과학사가인 야마모토 요시타카에 따르면 이 시기에 일본의 과학계는 급속히 체제에 편입되었다. 이 과정을 두고 그는 ‘(일본) 과학은 한반도에서 흘린 피 위에 발전의 기초를 얻은 것이다’라고 서술한 바 있다.

과학기술의 많은 부분이 처음에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시작했다가 나중에 민간인을 위해 개방된다. 컴퓨터의 시작은 대포에서 발사되는 포탄의 궤적 계산을 위한 계산기였다. 21세기 일상생활에서 필수품이나 다름없는 내비게이션(GPS) 기술은 원래 미국의 군사용 위성항법 시스템이다. 관측천문학의 신기원을 열었던 허블 우주망원경은 미국의 첩보위성 ‘키홀’과 같은 모델이다. 게다가 이보다 더 성능이 좋은 우주망원경이 궤도에 올라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미국 국가정찰국이 낡아서 쓰지 않는 구세대 첩보위성을 기증한 것이다.

코로나19 사태로 전 세계가 힘든 시간을 보내는 지금, 과학기술 투자의 1차 대상을 군수 산업이 아닌 인류 복지로 삼는 근본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할 수 없을까?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미래&과학 많이 보는 기사

영양 가득 ‘이븐’하게…과학이 찾아낸 제4의 ‘달걀 삶는 법’ 1.

영양 가득 ‘이븐’하게…과학이 찾아낸 제4의 ‘달걀 삶는 법’

고도 100km서 2분간 달 중력 비행 성공 2.

고도 100km서 2분간 달 중력 비행 성공

기후가 가장 불안정했던 축의 시대와 소빙기 3.

기후가 가장 불안정했던 축의 시대와 소빙기

2032년 소행성 충돌 위험 2.2%로 상승…지구 방위 논의 시작되나 4.

2032년 소행성 충돌 위험 2.2%로 상승…지구 방위 논의 시작되나

초속 9km ‘초음속 강풍’ 부는 외계행성 발견 5.

초속 9km ‘초음속 강풍’ 부는 외계행성 발견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