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우리나라 열차의 전망차와 3등 객실 모습. 서울SF아카이브 제공
KTX 광명역에 가면 유라시아 고속열차 승차권을 판매한다. 광명에서 출발하여 개성과 모스크바를 거쳐 프랑스 파리까지 갈 수 있으며 요금은 73만4500원이다. 그런데 출발일이 2022년 1월1일로 되어 있다. 즉 이 유라시아 대륙철도는 아직 개통되지 않은 가상의 여행상품인 셈이다. 장차 통일시대를 전망하며 유라시아 횡단 기차의 출발역으로 홍보하기 위해 광명시가 펼치고 있는 상설 이벤트이다.
이론적으로 유라시아 횡단철도는 가능하다. 해결해야만 하는 기술적 및 정치적 문제들이 적지 않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부산에서 출발하면 유럽 대륙을 지나서 해저터널로 영국의 런던까지도 닿을 수 있다. 실제로 재작년에 러시아 철도공사에서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한반도 종단 철도를 연결하는 데 3~5년이면 가능하다고 밝힌 바도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부산에서 출발하여 서울과 평양, 신의주를 거쳐 당시 만주국의 수도인 신경(지금의 장춘)까지 운행하는 국제열차 노선이 실제로 있었다. 만주 구간에서는 1932년부터 아시아에서 가장 빠른 특급열차 ‘아시아’호를 운행하기도 했는데, 증기기관차로 시속 100km를 상회하는 속도를 냈다고 한다. 또한 한반도 안에서도 특급열차가 다녔으며 서울~부산 간을 6시간 정도에 주파했다.
한반도 최초의 철도는 1899년에 탄생한 경인선이다. 지금도 수도권 전철에서 큰 비중을 담당하는 경인선은 첫 개통 당시엔 노량진과 인천을 잇는 구간이었다가 1900년에 한강 철교가 놓이면서 서대문역까지 연장이 되었다. 이어서 1905년에 경부선이 개통되었고 1906년에는 경의선도 뚫려서 한반도를 종단하는 철도 체계가 완성되었다. 오늘날 경부선은 한반도에서 가장 붐비는 여객철도 구간이지만, 광복 직후에는 증기기관차에 넣을 석탄이 부족해서 하루에 단 한 번만 왕복 운행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땅에 처음 철도가 놓인 때는 아직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기 전인 대한제국 시대였지만 일본의 영향력은 이미 막강해서, 고종 황제는 일본을 견제할 요량으로 미국 자본을 끌어들여 철도를 놓으려 했다. 그러나 청일전쟁을 치르면서 한반도에서의 물자 수송이 중요함을 간파한 일본은 농간을 부려 경인선을 비롯한 모든 철도 부설권을 차지했다. 그렇게 시작된 한반도의 철도 노선들이 대부분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져 온 것인데, 일제의 무리한 노선 설계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경의중앙선 서울역에서 신촌역까지 가는 구간은 서소문에서 거의 직각으로 꺾인다. 지금도 통행량이 많은 데다 도심을 통과하기도 해서 모든 열차들이 조심스럽게 서행을 하는 구간이다. 이렇게 철로가 급격하게 휘어진 것은 경의선과 경부선이 직결되도록 처음부터 계획하지 않고 각각 독립적으로 건설되었다가 나중에야 이었기 때문이다.
인류 문화사에서 철도의 탄생은 시간 개념의 근대화를 촉진한 요인 중의 하나로 본다. 19세기 이전까지는 분초 단위로 정밀하게 시간을 따져가며 살 일이 없었다. 그러나 기차가 등장하면서 출발과 도착 시간을 정확하게 설정하는 것이 가능해지고 또 필요하게 되었다. 여행자 및 모든 화물의 이동이 정확한 시간표에 따라 운행되는 기차의 물류 수송에 의지하게 되면서 사람들의 생활상도 이에 맞춰 변화했다. 하루를 24시간으로 나누고 다시 각각의 시간을 분과 초 단위로 정확히 나타내는 서양식 시계가 대량 보급되었고, 수천 년 넘게 통용되던 ‘해가 중천에 뜰 때쯤 보자’는 약속의 말은 ‘12시에 보자’로 바뀌었다. 이제 현대 과학기술 문명은 정확한 시계가 없으면 존속이 불가능한 지경이다.
그러나 근대 이후 기차가 전 세계로 실어 나른 것은 사람이나 화물이 다가 아니다. 중세 유럽 인구의 1/3 이상을 희생자로 삼았다고 하는 흑사병은 다른 대륙으로까지 널리 퍼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20세기 초에 세계적으로 대유행한 스페인독감은 1차대전 직후 귀향한 병사들에 의해 확산되면서 사실상 인류 역사상 최초로 세계적 규모의 범유행전염병이 되었다. 이로 인한 사망자는 1차 대전 희생자의 3~5배에 달한다고 알려져 있으며,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던 우리나라에서도 ‘무오년 독감’으로 불리며 14만명 가까운 희생자가 났다고 한다. 과연 이 시기에 기차라는 장거리 교통수단이 없었어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을까?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