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로봇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알려주는 도구는 전화기다. 사람인 줄 알고 받았지만 상대가 로봇이라는 걸 알고 나면 화가 난다. 후후, 후스콜, 티(T)전화 등 스팸 여부를 알려주는 발신자 정보제공 앱이 있지만 제대로 걸러지지 않아, 로봇을 상대하느라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게 된다.
공정거래위원회와 소비자원이 2014년부터 원치 않는 스팸전화를 막아주는 ‘텔레마케팅 거부 시스템(
www.donotcall.go.kr)’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지만, 시행 6년째임에도 실효성이 매우 낮다. 서비스를 이용하려면 이용자가 전화번호를 등록해야 하는 불편이 있다. 텔레마케팅 사업자가 자진해 이 시스템에 등록하고 규정을 준수할 경우에만 가입자에게 스팸전화가 차단되기 때문에, 불법·탈법 스팸전화는 근본적으로 걸러주지 못한다는 게 한계다.
미국에서 새로운 스팸 전화 차단법이 등장했다. 통신사 버라이즌은 로봇이 거는 스팸전화(로보콜)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기로 했다. 그동안 유료, 무료 스팸 차단 서비스와 애플리케이션이 있었지만, 서비스를 활성화하려면 사용자가 설정하는 절차가 필수적이었다. 버라이즌이 서비스하는 방식은 ‘초기 설정(디폴트 세팅)’의 변경이다. 이용자가 전화를 개통한 뒤 별도로 설정하지 않거나 앱을 깔지 않아도 자동으로 로보콜이 차단된다.
미국 휴대전화 가입자들이 2019년 상반기에 받은 스팸전화는 약 253억통으로 추정된다. 현재 미국인들이 받는 전화의 약 50%는 로보콜이 차지할 정도로, 미리 녹음된 스팸전화 무작위 발신의 피해가 막대하다. 미국 국민의 70% 이상이 ‘텔레마케팅 거부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스팸이 우회하기 때문에 차단 효과가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사람보다 똑똑한 인공지능이 사람의 일자리와 역할을 대체할지 모를 미래를 걱정하기에 앞서, 그다지 똑똑하지 않은 로봇이 거는 스팸전화도 막아내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로봇이 사람의 지능을 앞서기 때문에 생겨난 피해가 아니다. 로봇을 악용하는 소수의 탐욕을 통제하지 않고 소비자 권리 침해에 눈감은 당국으로 인한 다수의 피해다. ‘초기 설정’을 통해 로봇이 거는 전화를 사업자가 전면 차단하는 게 얼마든지 가능한 세상이라는 걸 미국 사례가 알려준다.
구본권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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