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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약이냐 파란약이냐”…가상세계 속 인간 선택은?

등록 2019-05-06 06:05수정 2019-05-06 14:21

‘매트릭스’ 20년, 영화속 상상 살펴보니
인공지능이 인류 지배하는 세상
현실같은 가상·뇌컴퓨터연결 등
기술시대의 인간성 문제 제기
1999년 5월 국내 개봉한 <매트릭스>가 보여준 영화속 상상은 지난 20년간 디지털과 인공지능이 일상화하면서 많은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1999년 5월 국내 개봉한 <매트릭스>가 보여준 영화속 상상은 지난 20년간 디지털과 인공지능이 일상화하면서 많은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워쇼스키 형제 감독의 공상과학영화 <매트릭스>가 1999년 5월 국내 개봉했다. 영화는 초고속인터넷, 휴대전화, 벤처 열풍 속에서 뉴밀레니엄에 대한 기대와 불안을 부풀렸다. <매트릭스>는 특수효과와 볼거리로 영화 제작기법에도 영향을 끼쳤지만, 다양한 철학적 개념을 동원해 미래 모습과 인간 삶을 상상했다는 점에서 각별한 주목과 평가를 받았다. 개봉 20돌을 맞아 국내외 영화언론의 논의가 풍부한 가운데 지난 4월29일 저녁 사단법인 코드의 월례 세미나 커먼즈펍도 ‘매트릭스 20돌: 디지털사회의 인간’을 주제로 개최됐다.

■ 매트릭스와 디지털 사회

영화속 시점은 2199년, 인공지능이 인간을 지배하는 디스토피아다. 지난 20년은 디지털과 인공지능 기술 발달로 인해 영화속 현실에 대한 공감대를 넓혀온 기간이었다. <매트릭스>는 다양한 철학적 개념을 실마리로 미래 세계를 상상한 게 특징이다. 진실과 허상에 대한 플라톤의 고전적 논의가 가상현실에 관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이어진다.

영화에서 인류는 인공지능을 위한 생물학적 에너지 공급원으로 감금당한 처지이지만 뇌에는 매트릭스라는 프로그램이 심겨져 있어, 완벽한 가상현실을 실재라 믿고 살아간다. 플라톤의 ‘동굴속 죄수’ 예화에서 족쇄에 묶인 죄수는 동굴 벽에 비친 사물 그림자만 볼 수 있을 뿐 실재를 인식할 수 없고 동굴밖 세상의 존재를 모른다. 영화에서는 주인공 네오가 해킹한 데이터를 보관하는 장 보드리야르의 책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이 클로즈업된다. 보드리야르는 현대의 특징을 이미지가 실재보다 더 실감나게 인식되고 실재로 간주되는 ‘시뮬라크르’ 개념으로 설명한 프랑스의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다. 매트릭스와의 투쟁을 이끄는 각성한 인간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너무나 현실같은 꿈을 꾸어본 적이 있나. 만약 그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다면? 꿈과 현실을 어떻게 구분하겠나”라고 묻는다.

디지털과 인공지능은 사이버 세상을 만들어내 현실의 문턱과 마찰을 없앴고, 인간 생활과 관계는 점점 더 온라인과 사이버 공간에 의존하고 있다. 기술은 현실을 완벽하게 모방한 가상현실(VR)을 넘어 현실에 없는 것까지 보여주는 증강현실(AR)을 구현하고 있다. 진짜와 식별불가능한 가짜를 손쉽게 만들어내는 딥페이크 기술은 가짜 뉴스의 도구가 되어,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더 흐리게 만들고 있다.

딥러닝 이후 현기증나게 발달하고 있는 인공지능은 인간지능을 뛰어넘는 특이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신비로 여겨졌던 인간 뇌 현상을 전기화학적 신호로 파악해 해독하는 작업이 시도되고 있다. 뇌 영상정보 해석을 통해 꿈의 내용을 시각화한 이미지로 바꾸고 있으며, 뇌컴퓨터연결(BCI) 연구는 신체마비환자의 몸을 움직이게 하는 초기단계에 도달했다. 생물학적 두뇌와 컴퓨터가 연결되는 상황은 뇌의 모든 작용을 컴퓨터와 네트워크에 올려놓는 ‘브레인 업로딩’의 미래를 상상하게 만든다. 20년간 기술은 <매트릭스>의 장면을 하나씩 구현해왔다.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빨간약과 파란약을 제시한다. 빨간약은 혼돈스럽고 고통스러운 진실의 모습을 보는 것이고, 파란약은 질서있는 세계 속에서 안온한 만족의 길이다.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빨간약과 파란약을 제시한다. 빨간약은 혼돈스럽고 고통스러운 진실의 모습을 보는 것이고, 파란약은 질서있는 세계 속에서 안온한 만족의 길이다.
■ 빨간약과 파란약

영화에서 고도로 발달한 기술로 인해 가상현실이 가상인 줄 모르고 살아간다는 설정보다 중요한 메시지는 인간의 선택이다.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빨간약과 파란약을 제시한다. 빨간약은 혼돈스럽고 고통스러운 진실의 모습을 보는 것이고, 파란약은 질서있는 세계 속에서 안온한 만족의 길이다. 주인공은 “무지가 행복”이라는 유혹을 거부한다. 이 비유를 통해 <매트릭스>가 디지털 세상을 향한 메시지를 던진다. 하나는 우리가 보고 있는 세상은 가상과 미망의 세계라는 주장이다. 또 하나는 인간은 고통스럽지만 실재를 인식할 수 있고 선택을 통해 그 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메시지다.

영화에서처럼 기술은 점점 더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없애며 의존도를 높이고 있다. 하지만 네오처럼 사람은 선택하는 존재다. 더욱이 네오와 달리 빨간약과 파란약 선택이 한번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다. 스마트폰와 소셜미디어, 자동화 알고리즘 앞에서 사용자는 언제나 빨간약, 파란약을 고를 수 있다.

구본권 선임기자 starry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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