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과학’ 창간호(1946). 과학잡지가 아니라 시사종합지이다. 서울SF아카이브
해방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그간 억눌려왔던 민족 문화적 욕구들이 각계각층에서 분출하듯 쏟아졌다. 대중과학 분야도 예외는 아니어서 1946년 한 해 동안에만도 ‘현대과학’, ‘대중과학’, ‘인민과학’, ‘과학전선’ 등 여러 잡지들이 창간되었다. 그러나 이들 중에는 제호만 보고 과학잡지라는 테두리 안에 넣기에는 곤란한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인민과학’이다.
‘인민과학’은 그동안 주로 과학사학계에서 언급되거나 인용되었다. ‘소련과학아카데미의 구성’이라는 번역글도 있고, ‘과학기술의 진로’나 ‘농업의 기계화’라는 기고문도 있다. 그러나 전반적인 내용은 정치 저널리즘을 표방하는 시사종합지나 사회과학 잡지라고 봐야 맞다. 무엇보다도 창간사에서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다.
‘…본지는 진보적 민주주의를 목표로 하는 국가건설을 지향하고 정치 경제 문화 자연과학 등 국가 구성에 필요한 일체 학문의 지도적 이론을 전개함으로써 그 사명을 다하려는 의도 하에서 탄생되었다. …‘인민과학’의 ‘과학’은 자연과학만을 지칭함이 아니고 형이하학 전반을 의미한 것이니 인민을 위한 학술, 즉 조선 전 인민을 위한 건국에 필요한 각 부문의 과학적 이론임을 부언해둔다.’
‘인민과학’ 창간호에 글을 쓴 사람들은 여운형을 중심으로 이강국, 이만규, 김오성 등이 포진된 이른바 ‘건준(건국준비위원회)’, 또는 ‘건국동맹’ 그룹이 주축이었다. 해방 전후의 사회사에 대해서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이에게는 낯설지 않은 이름들이다. 특히 여운형은 해방 직후 실시된 중립적인 설문 조사에서 이승만과 김구를 제치고 민족의 지도자 1순위로 꼽히기도 했던 인물이었다. 만일 그가 1947년에 테러로 세상을 떠나지만 않았다면 우리나라 현대사는 상당히 달라졌으리라는 의견도 상당하다.
‘인민과학’ 창간호의 제일 앞에 실린 글은 김오성의 ‘지도자론’이다. ‘지도자는 세계사적 개인이다’라는 말을 계속해서 반복, 강조하는 이 글은 ‘세계사적 개인’이라는 헤겔의 개념을 인용해서 혼란스러운 전환기에 인민대중은 옳은 지도자를 가져야만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철학을 전공한 일본유학생 출신 김오성은 문학평론가로서 주목할 만한 저술들을 남겼으며 남로당에 몸을 담았다가 1947년에 월북했다. 한국전쟁 직후 숙청된 것으로 알려진다.
‘건국교육에 관하여’를 쓴 이만규는 교육자이자 국어학자로 일제강점기에 송도중학교와 배화여중 등에서 반일사상을 고취하다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역저 ‘조선교육사’(1947)는 이 분야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저작이며 21세기에 들어서도 여전히 재출간되고 있는 고전이다. 1948년에 남북협상차 북으로 갔다가 그대로 남았고, 그 뒤 오랫동안 북한 교육계에서 활동했다. 북한의 ‘고려사’와 ‘리조실록’ 번역 사업을 이끈 사람이다. 여운형과는 무척 우애가 깊은 친구 사이였다.
파시즘과 신탁통치에 관한 글을 쓴 이강국은 이른바 ‘여간첩 김수임’ 사건으로도 유명한 엘리트 지식인이었다. 보성고보를 수석 졸업한 뒤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거쳐 독일 베를린대학에 유학했다. 독립운동을 하다 투옥되기도 했고 해방 이후에는 여운형의 건준에 참여했다. 미군정 반대 활동을 하다가 체포령이 떨어지자 북한으로 탈출했는데, 그 과정에서 연인 김수임의 도움을 받았다. 김수임과 가까운 사이인 미군 베어드대령의 차에 숨어 타고 38선을 넘었다는 것이다. 북한에서는 50년대 중반에 미국 간첩이라는 혐의를 받고 숙청되었다. 나중에 이강국이 실제로 미군과 연계가 있었다는 증거가 미국에서 발견되었다고도 하고 김수임은 억울하게 간첩으로 조작되었다는 의혹도 제기되었지만 아직까지 명쾌하게 밝혀진 바는 없다.
‘과학기술의 진로’를 쓴 여동구는 여운형의 조카로 추정되나 자세한 이력은 알 수 없다. 과학사회학 에세이에 해당하는 내용이며 ‘과학자는 어떠한 권력의 억압으로부터도 해방되어 연구의 자유와 발표의 자유를 확보해야 과학이 위대한 비약을 수행할 것이다’라는 결론으로 마친다.
여운형을 비롯한 ‘인민과학’ 창간호의 필진들은 사회주의 계열로 분류되지만 맹목적으로 이념을 추구한다기보다는 진보적인 시각으로 민족의 앞날을 설계하려 했던 시도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나 1946년 봄에 ‘인민과학’ 창간호가 나온 뒤 불과 1년도 안 되어 이들의 운명은 뿔뿔이 갈라지고 말았다. 이 잡지를 통해 드러냈던 ‘국가건설에 필요한 설계도의 임무’를 이어갈 수 있었다면, 그래서 당시의 자연과학 및 응용과학계의 인물들과도 유기적으로 맺어졌다면 이 나라는 또 어떤 대안적인 모습을 그릴 수 있었을까.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