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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과학 미래

‘SF’는 공상과학일까, 과학환상일까

등록 2018-07-30 06:00수정 2018-07-30 10:12

박상준의 과거창

일제강점기 ‘과학소설’로 불리다
남북분단 이후 번역어도 갈라져
남은 일본, 북은 중국 명칭 도입
1992년 중국에서 출판된 조선어 SF도서. 서울SF아카이브
1992년 중국에서 출판된 조선어 SF도서. 서울SF아카이브
과학적 상상력과 접목된 문화예술의 한 분야를 일컫는 ‘에스에프(SF)’는 오늘날 영어를 국어로 삼지 않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외래어로 정착된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소설이나 영화 등의 대중문화에서 장르 명칭으로 즐겨 쓰인다. SF는 ‘사이언스 픽션’(science fiction)의 약자이며 우리말로 그대로 옮기면 ‘과학소설’이지만 아직까지도 ‘공상과학소설’이라 부르는 경우도 많다. 사실 SF가 장르 명칭으로서 수용된 양상을 살펴보면 일제강점기를 거쳐 남북분단에 이르기까지 우리 현대사의 질곡이 고스란히 반영돼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19세기에 서양에서 건너온 에스에프, 예를 들어 쥘 베른의 ‘해저2만리’ 같은 작품들은 중국과 일본에서 ‘과학소설’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고, 이 명칭이 그대로 우리나라에도 수입되었다. 일제강점기 동안 번역이나 번안은 물론이고 국내 작가의 창작물 중에도 과학소설이라는 표기를 붙인 경우가 종종 보인다. 대표적인 예로 대중소설가로 유명했던 방인근이 1940년에 ‘여신’이라는 작품을 ‘과학조선’지에 연재하면서 제목 옆에 조그맣게 ‘과학소설’이라 부기했던 경우를 들 수 있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을 거쳐 남북이 분단된 뒤에도 ‘과학소설’이라는 명칭은 한동안 남북한 양쪽에서 그대로 쓰였다. 그러다가 남쪽에서는 일본에서 수입된 ‘공상과학소설’이라는 이름이 기존의 ‘과학소설’을 대체하며 점점 퍼졌다. 사실 ‘공상과학소설’이란 이름은 판타지와 SF 두 분야를 모두 아우르는 말로 만들어진 것이었지만 일본에서 ‘SF’의 대체 용어로 퍼지기 시작한 것이 그대로 우리나라에도 들어온 것이다.

한편 중국과 소련 등 사회주의 문화권에서는 50년대를 전후해 ‘SF’를 ‘과학환상’이라는 말로 새롭게 표기하게 되었는데, 이 명칭이 북한에도 그대로 도입되어 기존의 ‘과학소설’을 대신하게 되었다. 그 뒤로 현재까지 북에서는 SF나 과학소설이라는 말은 사실상 쓰이지 않는 것으로 추정된다. ‘과학환상’이라는 말은 중국에서도 SF 장르를 뜻하는 한자어로 계속 쓰이고 있으며, 현재 세계에서 가장 많은 발행 부수를 올리는 SF잡지인 중국의 ‘과환세계’(1979년 창간)의 이름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남쪽에서 SF문학은 일부 번역물을 제외하면 20세기 내내 존재감 자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창작 환경이 열악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북에서는 과학기술의 계몽적 성격에 주목하여 어린이 청소년 잡지 등에서 과학환상문학의 발표 지면을 안정적으로 보장해주었다. 그 결과 50년대부터 현재까지 북한의 과학환상문학은 독자적인 전통과 작가군 및 독자층이 형성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남북한을 통틀어 우리말로 된 SF문학 이론서가 처음 저술된 곳은 북쪽이다. 과학환상소설 작가이기도 한 황정상이 1993년에 출간한 ‘과학환상문학창작’이 그것이다. 황정상은 북한 SF문학계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이며, 유전공학을 다룬 과학환상소설 ‘푸른 이삭’은 1995년에 남쪽에서 출판되기도 했다.

1995년에 남한에서 출판된 북한의 과학환상소설. 서울SF아카이브
1995년에 남한에서 출판된 북한의 과학환상소설. 서울SF아카이브
그러나 아쉽게도 북한의 과학환상문학은 세계 수준은 물론이고 현재 남쪽의 SF문학과 대비해 봐도 주제나 상상력의 다양성이란 측면에서 격차가 큰 편이다. 물론 체제의 특성상 작가들의 창작 역량이 제한 없이 발휘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다만 어떤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면, 현재 북한 지도자인 김정은 위원장이 성장기에 서방에서 교육받으며 자란 만큼 서양의 SF에 대해서도 상당한 이해가 있으리라 여겨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6월에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을 때 김정은은 직접 ‘이런 일들이 마치 SF처럼 보일 것이다’라는 내용의 언급을 하기도 했으며, 미국의 어떤 칼럼니스트는 그가 ‘로버트 하인라인의 애독자일 것이다’라는 촌평을 내놓은 적도 있다. 로버트 하인라인(1907~1988)은 ‘스타십 트루퍼스’, ‘낯선 땅 이방인’ 등으로 유명한 미국의 SF작가이며, 국적을 불문하고 SF독자라면 어릴 때부터 한 번쯤은 그의 작품을 읽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세계적인 명성을 떨쳤던 인물이다. 흥미로운 건 그가 우파 자유주의 이념과 가까운 사상을 지녔던 것으로 평가받는 작가라는 점이다.

남북 화해 무드가 지속하여 문화교류도 재개된다면 북한의 과학환상문학에 대한 연구와 소개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아무리 이념적인 제약과 한계가 있더라도 기본적으로 SF적 상상력은 풍부한 영감의 원천이 되기 때문이다. 북한의 과학환상문학이 그간 쌓아 온 성취에는 어떤 통찰이 숨어있을지 자못 궁금하다.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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