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년 초등학교 이과 교과서. 왼쪽은 표지, 오른쪽은 인천에 있던 조선총독부 관측소.
일제강점기의 잡지나 출판물들을 보다 보면 1930년대 중후반부터 심상치 않은 정황이 드러난다. 우리말로 된 글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다. 1940년대에 접어들면 잡지나 단행본은 거의 일본어로 채워지고, 한글 신문은 모조리 폐간당한다. 이런 상황은 물론 일본의 문화말살정책 때문이지만, 그 결과로 청년층이 어릴 때부터 일본어로 교육받으면서 우리말보다 일본어를 더 편하게 여기게 된 까닭도 있다. 일제강점기가 30년 이상 계속되면서 1940년대에 이르면 한반도 지식인들의 보편적인 언어는 일본어가 된 것이다.
이 시기 조선의 교과서는 전부 일본어로 되어 있다. 예를 들어 쇼와 9년(1934년)에 조선총독부가 저작하고 발행한 초등학생용 이과(理科) 교과서를 살펴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한자와 일본어만 있을 뿐 한글은 단 한 글자도 찾아볼 수 없다. 동물, 식물, 인체, 계절과 기후, 암석 등등 우리 주변의 자연을 거의 다 다루고 있지만 모두 일본식 한자 이름들로 소개하고 있다. 아직도 우리 문화에 광범위하게 남아 있는 일제 잔재는 이렇듯 당시 세대부터 체계적으로 세뇌되고 각인된 흔적인 것이다.
이 교과서는 일본 본토의 것과 달리 조선 식민지용임을 알 수 있는 내용이 여럿 있다. 이를테면 기후를 설명하면서 인천 응봉산에 있던 기상관측소 그림을 넣은 것이다. 당시 명칭이 ‘조선총독부 관측소’였던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기상관측소였으며 해방 이후에도 한동안 중앙기상대 역할을 한 유서 깊은 곳이다. 여러 점의 사진 기록으로도 전해지는 이 건물은 오랜 세월 동안 몇 차례의 보수와 개축을 거치며 1992년부터는 ‘인천기상대’로 역할을 다하다가 2013년에 철거되고 말았다. 지금은 1920년대에 지어진 붉은 벽돌의 창고만 남아 있다.
또 전기를 설명하는 부분 말미엔 경성방송국(조선방송협회)의 모습도 그림으로 등장한다. 무선전신에 대해 서술하면서 방송국의 안테나 모습을 강조한 그림을 실었다. 이 그림의 건물과 방송탑 역시 당시 서울 정동에 있던 경성방송국 사진 기록과 정확히 일치한다. 지금의 한국방송(KBS)은 바로 이 경성방송국에 뿌리를 두고 있다.
현재 북한 지역인 강원도 통천군 해금강의 총석정도 현무암 주상절리들과 함께 작은 정자 모습 그대로 그림으로 등장한다. 암석 단원에서 나온다. 관동팔경 중 1등으로 꼽히는 총석정은 신라 시대에 지어졌다고 하는데, 북한에서는 그 일대의 지질지형을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놓고 있다. 암석을 설명한 부분에는 이밖에 화산 분화와 용암 모습으로 일본 가고시마현 사쿠라지마섬의 그림이 두 컷 실려 있다. 한반도에는 활화산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교과서들로 교육받은 이들은 우리 역사에서 제대로 한글을 공부할 기회를 얻지 못한 불운한 세대다. 그래서 해방이 된 뒤에 우리말 읽고 쓰기를 익히느라 애먹었다는 회고담이 꽤 된다. 대표적인 사례로 언론인이었던 리영희(1929~2010) 선생과 만화가 고우영(1938~2005) 화백이 있다. 리영희 선생은 해방이 되고 난 뒤 대학을 다니고 한국전쟁 시기부터는 통역장교로 장기간 복무하다가 50년대 후반에 기자가 되었는데, 그때까지 우리말 글쓰기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서 초중고생 교과서를 구해 독학으로 한글 문법 공부를 했다는 술회를 남긴 바 있다.
일본이 세운 괴뢰 국가인 만주국에서 태어나 자란 고우영 화백은 해방이 되어 귀국할 때까지 우리말 읽고 쓰기는 물론 말하기도 거의 못했다고 한다. 평양 출신인 그의 부모가 만주로 이민을 가서 성공적으로 사업을 벌인 덕분에 자동차까지 소유한 유복한 집에서 자랐고 주변 일본인들과 사실상 같은 사회적 지위를 누렸다. 소년 고우영에게 ‘모국어’는 일본말이었던 것이다.
박상준/서울SF아카이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