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아카이브 프로젝트 : 시간의 극장
제1화 바보 노무현
제1화 바보 노무현
노무현은 앞선 사람이었다. 남과 달랐다. 사람들이 싸우기 주저할 때 투쟁에 앞장섰고, 싸움에 몰두할 때는 통합을 주장했다. 그런데 “튀어나온 못이 망치를 맞는다”는 말이 있다. “웃자란 가지가 먼저 베인다”고도 한다. 그에게 일어난 일이 그랬다. 노무현에게 마음의 빚을 진 사람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
정치인 노무현과 우리가 함께한 시간은 1988년부터 2009년까지 20년 남짓이다. 한겨레 30년치 기사와 사진을 모은 아카이브를 찾아보았다. 노무현과 만난 사람, 노무현과 특별한 인연을 맺은 지역이 눈에 띈다. 해설 김태권
한겨레 사진 아카이브에는 강재훈 기자가 1988년에 찍은 초선의원 노무현의 사진이 있다. 노무현을 투사의 이미지로만 떠올리는 사람이 많은데 이 사진은 다정하고 품격 있는 신사의 모습이다. “저들이 그토록 매도하던 운동권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국민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11월11일치 인터뷰에서 노무현은 말했다. 청문회 스타가 된 노무현 의원이 1988년 최일남 선생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5공청문회’와 초선의원 노무현 젊은 초선의원 노무현이 온 나라 사람의 눈에 든 사건은 1988년의 ‘5공청문회’였다. 전두환 일당은 자리에서 물러난 다음에도 뻔뻔하였다. 텔레비전 중계로 청문회를 보던 시민이 화가 나 심장마비로 숨질 정도였다(한겨레 1988년 11월9일치). 이때 온 국민이 보는 앞에서 전두환과 부하들을 꼼짝 못 하게 만든 사람이 노무현이다. 빈틈없는 논리가 그의 무기였다. 1988년 11월11일치 한겨레에 노무현의 인터뷰가 실렸다. 노무현은 어떻게 ‘청문회 스타’가 되었나. 증인으로 나온 5공인사들이 “불합리하고 모순된 진술을 하도록 끌고 가는” 것이 비결이었다. 그가 처음부터 논리적인 모습 때문에 주목받았음을 알 수 있다. 끈질기게 그를 따라붙던 ‘선동적’이라느니 ‘감정적’이라느니 하는 비난과는 다르다. · 29년 전 오늘, 노무현을 세상에 알린 헌정사 첫 청문회가 열렸다 / 2017.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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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을 ‘졸’로 보는 세력과 같이 할 수 없다” 세상이 김영삼을 따르던 1990년대 초에 노무현은 그에게 맞섰고 세상이 김영삼에게 등을 돌린 2002년에 노무현은 그를 챙겼다. 남들이 뭐라건 노무현은 소신대로 움직였다. 노무현을 정치권에 영입한 사람이 김영삼이었다. 그런데 1990년에 김영삼은 충격적인 결정을 한다. 노태우와 김종필과 당을 합친 것이다.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에서 민주진영에 유리하던 국회의 의석수는 하루아침에 역전되었다. 악명 높은 ‘3당합당’이다. 많은 정치인이 김영삼을 따라 거대 여당에 들어갔다. 노무현은 이들과 갈라섰다. 어려운 길을 택했다.
2002년에 김영삼을 찾은 노무현. 김영삼과 그 측근 박종웅 사이에 서서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다. 별세한 김종수 기자가 찍었다. 처음 공개하는 사진이다. 한겨레신문사 서가에 필름 상태로 보관돼오던 것을 팩트스토리가 발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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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의 낙선…‘바보 노무현’ 노무현은 김영삼과 헤어진 뒤 김대중이 이끌던 야당에 합류했다. 약은 사람이라면 지역구를 부산 말고 다른 곳으로 옮겼을 터. 그러나 노무현은 우직하게 지역주의와 싸웠다. 1992년 국회의원 선거도 1995년 시장 선거도 부산에서 출마하고 낙선했다. 중간에 한번, 서울 종로에서 국회의원이 되었다가 2000년 총선 때 다시 부산에 갔다. 그리고 낙선했다. 쉬운 길을 놔두고 굳이 어려운 길로 가는 그를, 사람들은 “바보 노무현”이라 불렀다.
‘바보 노무현’의 탄생. 2000년 총선 때 노무현은 다시 부산에 출마하고 낙선한다. 유세장에서 신이 난 어린이들의 모습을 이용호 기자가 찍었다.
· ‘바보 노무현’의 도전, 지역주의 허문 씨앗이 되다 / 2019.5.20
· 보듬어준 종로서 꿈꾼 선거개혁…20년 지나 되살아나 / 2019.5.21 ____________________
노무현을 두려워한 사람들 노무현을 마음에 담아둔 사람은 일찍부터 많았다. “문화방송 텔리비전의 ‘퀴즈 아카데미’ 시청자퀴즈 공모에서 올해의 ‘한국의 인물’로 노무현 의원이 선정됐다.” 1988년 12월25일치 한겨레에 실린 기사다.(그때는 ‘텔리비전'으로 썼나 보다) 한겨레21은 1999년과 2000년에 호감 가는 정치인이 누구인지 시민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했다. 두번 다 1위는 노무현. 정치인들 사이에서는 이회창과 이인제가 ‘차기 대권'이라 불리던 시절인데 그랬다.
· [한겨레21] 한겨레21, 노풍을 처음 예보하다 / 2002.12.27 ____________________
종로, 이명박…‘악연’의 시작 한국의 정치지형에서 제3세력은 가능한가? 노무현도 한때 이 문제를 고민했던 것 같다. 1996년 국회의원 선거 때 노무현은 김영삼과 김대중의 ‘거대 양당’에 거리를 둔 채 독자세력으로 서울 종로에 출마한다. 결과는 낙선. 이때 그를 꺾고 당선된 사람이 이명박이다.
1996년 국회의원 선거 때 서울 종로에 출마한 노무현과 이명박. 후보 등록 하러 온 두 사람이 악수하는 장면을 이종근 기자가 찍었다.
별세한 김종수 기자가 남긴 이 사진은 2009년의 잔인한 5월을 잊지 못하게 만들었다. 아직도 이 사진을 볼 때면 마음이 일렁인다.
광주의 선택…‘노무현 대통령’을 믿기 시작하다 노무현은 김대중 정부에서 장관을 지내고 2002년에 대선후보 국민경선에 뛰어든다. 노무현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대통령이 되리라 예상한 사람은 적었다. 후보 경선은 이인제가, 대선 본선은 이회창이 이길 것이라고들 생각했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광주경선이 있던 3월16일부터였다. 지역주의에 맞서 싸운 그에게 새 미래를 기대했을까? ‘학살 주범’ 전두환 일당을 몰아세우던 청문회 스타를 잊지 않았던 걸까? 광주시민의 선택은 영남사람 노무현이었다. 의미는 컸다. “노무현은 좋지만 설마 대통령이 될까” 의심하던 사람들이 “정말 대통령이 된다”고 믿기 시작했다.
광주경선에서 승리한 노무현. 이종근 기자가 찍었다. 나는 그날 노무현이 활짝 웃었다고만 기억했는데 사진을 다시 보니 여러 감정이 뒤섞인 표정이다. 활짝 웃기만 하던 쪽은 “세상이 바뀐다”며 설레던 그날의 나였을지도 모르겠다.
“노무현과 난 전생에 형제였나 보다” 노무현과 김대중은 어떤 사이였을까. 둘 사이가 서먹하다는 추측이 한때 유행했다. 김대중은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지도자였다. 노무현이 대선후보가 되었을 때도 좋다 싫다 내색이 없었다. 둘 사이가 나쁘다는 주장도 있었다. 김대중이 아끼던 박지원이 2003년에 이른바 ‘대북송금 특검'으로 구속되고,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이 2004년에 갈라서는 상황을 보면서였다. 그런데 두 사람 사이는 과연 불편했을까?
청와대를 떠나는 김대중을 노무현이 환송하는 모습. 2003년 2월 취임식 직후 김봉규 기자가 찍었다.
서울역광장에 마련된 분향소에서 2009년 5월에 김대중은 말했다. “노무현의 유지를 받들어 민주주의를 회복하겠다”고. ‘유지’라니. 먼저 떠난 후배의 ‘유지’를 입에 올리는 손윗사람의 심정이 어땠을까. 그해가 다 가기 전 김대중 역시 세상을 떠났다. 촬영은 이종찬 기자.
· [한겨레21] DJ와 노무현, 전생에 형제간이려나 / 2009.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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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과 제주 제주4·3평화기념관에 갈 때마다 나는 노무현의 영상을 본다. 4·3사건 때 국가가 저지른 폭력을 국가원수로서 사과하는 영상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모습이기도 하다.
2006년 제주. 4·3사건 희생자 위령제에 참석해 분향하고 묵념하는 노무현. 현직 대통령으로 처음이었다. 촬영은 장철규 기자.
문재인이 다시 봉하를 찾는 날 문재인은 부산의 인권변호사였다. 한겨레 지면에 1988년부터 자주 등장한다. 오랜 친구 노무현의 선거도 도왔다. 그런데 의외다. 노무현의 선거 사진은 많은데 문재인이 찍힌 사진이 거의 없다. 여느 정치권 인사들이 노무현과 함께 사진을 박으려고 어떻게든 카메라에 얼굴을 들이밀 때 문재인은 묵묵히 자기 일을 했던 것이다. 그런 문재인에게 언론의 관심이 집중된 것은 2004년부터다. 이른바 ‘노무현 탄핵 정국’ 때 노무현 쪽 대리인단 간사로 활약했기 때문이다. 헌법재판소는 5월14일에 탄핵을 기각했다. 노무현은 대통령직을 지켜냈다.
헌법재판소는 5월14일 대통령의 노무현의 탄핵소추안을 기각했다. 노무현은 대통령직을 지켜냈다. 선고가 나던 날 법정을 나서는 문재인의 표정을 김태형 기자가 사진에 남겼다. 좀처럼 개인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도, 이날만큼은 뭉클한 기쁨을 참지 못했던 것 같다.
<한겨레>가 지령 1만호를 맞아 ‘시간의 극장―한겨레 아카이브 프로젝트’를 선보입니다. 33년 기사와 사진 아카이브를 활용하여, 중요 사건과 인물을 현대사 콘텐츠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입니다. 해당 주제를 잘 아는 해설자가 ‘시의성 있는 과거 한겨레 사진과 기사’를 선정하고 독자에게 해설합니다. 한번도 소개된 적 없는 비컷 사진 필름도 발굴하여 공개합니다. 르포, 전문직 소재 웹소설 기획사 팩트스토리가 기획하고 한겨레와 공동으로 제작합니다. 주간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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