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관이 사직하고 정치권이나 청와대로 가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사법부의 독립을 위해 일정한 제한 규정을 두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2017년 9월12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한 말이다. 넉달 전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 김형연 인천지법 부장판사가 사표를 내고 며칠 만에 청와대 법무비서관으로 갔다. 주호영 청문위원장이 이를 비판하며 대법원장 후보자의 의견을 묻자 이렇게 답한 것이다. 4선인 주 의원이 판사 출신이라는 점도 눈에 띈다. 그는 15년여의 판사 생활 거의 대부분을 대구에서 했다. 2003년 2월 대구지법 부장판사를 끝으로 퇴임한 뒤 대구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다 이듬해 17대 총선 대구 수성을에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주 의원은 다음날 이어진 청문회에서도 다시 묻는다.
―왜 바람직하지 않습니까?
“여태까지 문제가 된 것은 대부분 고위직으로 가는 것인데, 결국 그것이 어떤 관례가 되다 보면 법원장이나 고위 법관 입장에서는 그런 부분을 예상하고 행동을 그에 맞출 수가 있는 아주 큰 위험이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결코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특정 정당으로 가게 되는데, 결국 법관 신분을 가지고 내밀한 소통이 있었다는 오해를 주기 때문에 재판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는 거지요. 그 점도 동의합니까?
“동의합니다.”
대법원장이 부적절하다고 지적한 ‘판사의 청와대행’은 또 벌어졌다. 지난해 5월 김형연 법무비서관이 차관급인 법제처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그의 후임에 석달 전 법복을 벗은 김영식 전 인천지법 부장판사가 임명됐다. 2018년 12월 돌연 사표를 낸 뒤 불거진 ‘청와대행 설’을 퇴임하기까지 강력하게 부인해온 터였다. 법관들 사이에서 “법관이 정치권력 기관으로 바로 이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정말로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이창현 부산지법 부장판사)는 우려가 나왔다. 이명박 정부 때도 강한승 서울고등법원 판사가 사직과 동시에 청와대로 직행한 바 있다.
고위 법관이 행정부 ‘고위직’으로 임명되는 일도 여러차례 있었다. 2013년 박근혜 대통령이 황찬현 서울중앙지방법원장을 감사원장으로 지명하자 야당들은 “사법부 독립 훼손”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당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서울고법 등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박범계 민주당 의원은 “사법부와 행정부가 인사를 교류하고, 법원장이 의전서열 7위이자 사정기관의 수장인 감사원장 자리에 가는 것은 삼권분립이 아니라 ‘삼권융합’”이라고 꼬집었다. 문재인 대통령도 2018년 1월 현직 판사인 최재형 사법연수원장을 감사원장으로 임명했다. 지명 당시 청와대는 “후보자가 보여온 판결들이 매우 엄정하고, 그 부분이 감사원 독립성과 정치적 중립성을 수호하는 데 상당한 중요한 요인이 될 것으로 판단한다”고 말했다.
국민의 선택을 거치니 괜찮다?
유권자의 심판을 거쳐야 하는 국회의원이 되는 건 어떨까. 오는 4월 21대 총선에 출마하기 위해 법복을 벗는 판사가 잇따라 등장하고 있다. 특히 사법농단에 맞서며 내부 개혁에 목소리를 높였던 판사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면서 논란이 뜨겁다.
이수진(51) 전 수원지방법원 부장판사는 1월27일 민주당 ‘13호 영입인재’가 됐다. 2018년 양승태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재판 지연 의혹을 방송 인터뷰를 통해 폭로했던 이다. 민주당은 ‘부장판사급 중진 법관 중에서는 첫 영입 사례’라고 소개했다. 앞서 그는 현직 신분이던 1월2일 <중앙일보> 전화통화에서 지역구 출마 뜻을 밝히며 “최재성 의원이 ‘사법개혁을 해야 하는데 지금 여당과 대법원 사이에 전혀 소통이 되지 않는다’며 집요하게 요청했다”고 전했다. 사표는 1월7일자로 수리됐다. 장동혁(51) 광주지법 부장판사는 총선 출마를 위한 공직사퇴 시한을 하루 앞둔 1월15일 퇴임했다. 1월23일 자유한국당 대전시당에서 출마 기자회견을 열어 “나라의 원칙이 흔들리고 무너져 내리고 있다. 나라를 바로 세우겠다”고 했다. ‘전두환 재판’의 담당 판사인 그가 퇴임하면서 재판 일정이 흔들리게 됐다. 민주당 영입 제안을 받은 뒤 1월13일 퇴임한 최기상 전 서울북부지법 부장판사는 아직 출마를 고민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사법농단에 대한 문제제기에 앞장섰던 그는 2018년 4월 전국법관대표회의가 상설화된 뒤 첫 의장으로 뽑혔다.
앞서 사법농단 사태를 밝히는 데 핵심 구실을 한 이탄희(42) 전 판사는 1월19일 ‘10호 영입인재’로 민주당에 입당했다. 그가 2017년 2월 법원행정처 기획심의관 재직 당시 법관 사찰에 반대해 사표를 냈던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법농단 의혹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는 사표가 반려된 뒤 수원지법 안양지원 등에서 일하다 지난해 2월 퇴임했다.
‘판사의 여의도 직행’ 사례는 많지 않다. 2016년 20대 총선 때 송기석 광주지법 부장판사가 1월 퇴임 뒤 국민의당 후보로 광주에서 출마했다. 당선됐지만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잃었다. 박희승 수원지법 안양지원장은 퇴임 직후 민주당에 들어가 전북에서 출마했다가 3위로 낙선했다. 현직 의원 가운데 판사 출신은 9명으로, 검사(17명)나 변호사(22명) 출신보다 적다. 추미애 민주당 의원은 1995년 8월 김대중 총재의 새정치국민회의에 영입돼 1996년 총선에서 배지를 달았고, 나경원 자유한국당 의원은 2002년 대선 때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 여성특보로 영입돼 활동하다 2004년 총선에서 여의도에 입성했다. 박범계 민주당 의원은 2002년 대선 때 노무현 후보를 돕겠다며 판사직을 그만뒀다. 민주당 진영·손금주, 한국당 이주영·여상규·홍일표 의원은 수년간 변호사로 일하다가 정치에 입문했다. 서울지역 한 부장판사는 “최근 몇년 사이 정권 교체와 사법농단, 적폐수사 등 여러 자극을 거치며 정치권 진출에 대한 판사들의 인식이 예전과 달라진 것 같다. 몇년 전만 해도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치부하는 의견이 다수였는데, 요즘은 ‘장려해야 할 일 아니냐’는 의견도 나온다”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이번 총선에서 ‘법복 정치인’이라는 비판은 더욱 거세게 제기되고 있다. 비판은 크게 두가지로 요약된다. 우선 판사의 정치권 직행이 사법부 독립을 훼손한다는 일반론이다. 이번 출마자들은 “국민의 선택을 받으려 지역구에 출마하기 때문에 대통령 지명을 받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이수진) “법관 출신이 현실 정치에 참여하는 것만 가지고 비판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장동혁) 등의 주장을 펴고 있지만, 판결의 공정성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오히려 김형연·김영식 전 판사의 ‘청와대 직행’에 이어 좋지 않은 사례가 계속 쌓이는 것에 대한 우려가 크다. 양홍석 변호사는 “판사들의 판결이나 법원 내 활동에 대해 ‘나중에 정치하려고 그러는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판사들이 입법부나 행정부로 직접 진출하는 일이 잦아지면, 사법부는 대통령이나 정당이 필요할 때 언제든지 데려다 쓸 수 있는 인재풀이 돼버리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서울지역 한 부장판사는 “법관 경력을 갖고 정치인으로서 사회봉사를 잘할 수 있다면 사회 전체적으로는 좋은 것이다. 하지만 그걸 아무 통제 없이 용인하는 순간 법원이 오염되는 부작용이 생기고, 그게 긍정적인 면에 비교할 수 없이 크다. 법관 경력이 정치권에 진출하는 과정이 되고, 좋은 재판을 할 수가 없게 된다”고 말했다.
사법농단에 대한 비판이 ‘정치적 자산’이 되고, 사법개혁 완수가 ‘출마 명분’이 되는 것이 오히려 사법개혁 동력을 떨어뜨린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이들은 “지난 1년간 재야에서 사법개혁 필요성을 알리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지만 한계를 느꼈다”(이탄희) “오랫동안 법원에서 사법개혁 활동을 해왔는데, 법원에서의 개혁은 한계가 있었다. 나같이 사법개혁 내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판사들이 들어가서 사법개혁 완수에 힘을 보태야 한다”(이수진)고 했다.
그러나 법관들의 평가는 싸늘하다. 서울중앙지법 한 판사는 “사법개혁의 주역들이 정치판으로 가게 되면 개혁 요구의 순수성이 의심받게 된다. 본인의 정치적 영달을 위해 사법부를 팔았다는 배신감마저 든다”고 말했다. 특히 여전히 법원 내부에서 개혁적 목소리를 내고 있는 법관들이 오히려 이들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이연진 인천지방법원 판사는 1월22일 법원 내부통신망 ‘코트넷’에 글을 올렸다. “법관 시절 사법행정과 사법제도 개선에 관계하거나 참여했던 사람이 그 경력을 발판 삼아 정치 활동을 시작하는 것은 법원 내 사법행정과 사법제도 개선 참여 동력을 많이 꺾는다. 법복을 들고 다니며 정치를 하려는 모습은 법원과 법관의 정치적 중립성을 송두리째 흔든다. 정치인이 계속 법복을 들고 있어서 생기는 혼란은 재판에 너무나도 큰 부담과 해악으로 돌아온다. 정치인은 법복을 손에서 내려놓으시길 바란다.” 정욱도 대전지법 홍성지원 부장판사도 1월17일 “법복을 벗고 나서야 비로소 정치인이 됐다고 말하겠지만, 그 직전까지는 정치인이 아니었다고 아무리 주장한들 믿어줄 사람이 없다. 본인만 혐의를 감수하는 게 아니다. 이는 남은 법관들, 특히 같은 대의를 따르던 다른 법관들에게까지 법복 정치인의 혐의를 씌우는 일이고, 법복 정치인들이 허문 사법 신뢰의 회복에도 도움이 되기 힘든 일”이라고 썼다. 민주당 한 의원은 “사법개혁 어젠다를 띄웠던 이들이 법원 내부에서 답을 찾지 못하고 김명수 대법원장에게 실망해 정치권으로 옮겨오는 모양새여서 이 문제를 생산적으로 풀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전국법관대표회의가 결의한 것
재판의 공정성이 훼손되면 피해를 보는 건 국민이다. 판사의 정치 입문 전 최소한의 ‘냉각기’를 제도적으로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법관의 청와대 직행을 금지하는 법원조직법은 지난 1월9일 국회 본회의에서 의결됐다. 법관은 퇴직 2년 안에 대통령비서실 직위에 임용될 수 없도록 한 내용이다. 하지만 퇴직 뒤 국회의원 등 선출직에 출마하는 것에 대한 법적 규정은 없다.
“법관이 퇴직 직후 재판의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저해할 우려가 있는 공직에 취임하는 것은 지양되어야 한다.”
전국법관대표회의(의장 오재성 전주지법 부장판사)는 지난해 12월2일 ‘퇴직 법관의 공무 담임 제한 안건’과 관련해 이런 내용의 결의를 채택했다. ‘법복 정치인’들이 무색하게 만든 이 결의를 사법부는 다시 지켜나갈 수 있을까.
글 이지은 기자
jieuny@hani.co.kr, 사진 박종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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