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물수수 등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박근혜 전 대통령이 30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구속 전 피의자심문이 열린 30일, 박근혜 전 대통령은 서울 삼성동 집을 떠날 때와 서울중앙지법에 들어갈 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지난 21일 검찰청 포토라인에서 “국민 여러분께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성실하게 조사에 임하겠습니다”라고 했던 그 짧은 말조차 없었다. 헌법재판소 탄핵 심판 결정에 대한 박 전 대통령의 첫 반응이 “진실은 반드시 밝혀질 것”(12일)이었다는 점에 견주면, 날선 결기는 무뎌진 느낌이다.
직무정지 당시 박 전 대통령은 변호인을 통해 “상상과 추측의 사상누각”, “짜맞추기 수사”라며 검찰과 특별검사의 수사를 비판한 데 이어, 자신의 입으로 “엮었다”는 표현을 써가며 비난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검찰 소환 때의 태도가 여론과 검찰을 자극해서는 안 된다는 전략적 방향 전환이었다면, 법원 출석 직전의 침묵은 ‘구치소행만은 피해야 한다’는 선택지 없는 절박한 처지를 의식한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대통령에서 이제는 자신의 무죄를 읍소해야 하는 굴욕적 상황, 구속 가능성을 내다본 체념과 두려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일 수 있다. 영장이 기각될 경우 박 전 대통령의 침묵은 ‘억울하더라도 전직 대통령으로서 사법 절차를 충실히 따랐다’는 이미지를 쌓으며 이후 재판 과정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는 효과도 얻을 수 있다.
박 전 대통령은 침묵에 능한 정치인이다. 그의 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2007)에서 아버지의 죽음 이후를 다룬 장의 제목은 ‘외롭고 긴 항해’, ‘침묵의 시간,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였다. 박 전 대통령은 그러면서도 “(아버지 사후) 18년이라는 세월이 은둔과 칩거로 치부될 때 쓴웃음이 나온다”고 했다. “수많은 매도 속에 몇 년의 시간을 버티며”,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아버지의 오명을 벗겨드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살았다는 것이다. 또다시 찾아온 침묵의 시간도 박 전 대통령은 ‘오명을 벗으려는 일념’으로 버틸 듯하다.
김남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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