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이 21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에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해 청사로 들어가기 전 포토라인에서 입장을 밝히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은 삼성 특혜와 관련한 뇌물수수 및 미르·케이(K)스포츠 재단 출연금 강제모금, 블랙리스트와 연결된 직권남용, 청와대 기밀문서 유출 등의 혐의를 받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뇌물수수 등 13개 범죄 혐의로 검찰에 소환된 박근혜 전 대통령이 21일 오전 서울중앙지검 현관문을 통해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국민 여러분께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성실하게 조사에 임하겠습니다.”
21일 오전 9시25분께 뇌물수수 피의자 신분으로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에 나온 박근혜 전 대통령은 단 두 문장, 29자짜리 짧은 입장을 밝히고는 최순실(구속기소)씨가 “죽을죄를 지었다”고 울부짖으며 들어갔던 바로 그 현관을 통해 검찰 청사로 들어갔다. 박 전 대통령은 그간 자신의 지지층을 향해 “완전히 엮었다”, “거짓의 산”, “오래전부터 누군가 기획” 등 자극적인 용어를 써가며 결백과 무죄를 강변해왔다. 특히 지난 12일, 청와대를 나와 서울 삼성동 집에 도착한 뒤 “진실은 반드시 밝혀질 것”이라는 입장을 내놓으며 불복 논란을 일으켰다.
더구나 검찰 출석 전날 변호인인 손범규 변호사가 “박 전 대통령이 준비하신 메시지가 있다”고 밝혀, 그 내용과 수위에 관심이 쏠렸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은 ‘검찰 수사가 불공정했다고 생각하느냐’는 취재진의 질문과 무관하게, 여느 피의자들이 검찰청에 들어설 때 하는 ‘단골 멘트’를 내놓는 데 그쳤다.
박 전 대통령의 ‘담담한 자세’를 두고 정치권과 법조계 안팎에서는 구속영장 청구를 피하기 위해 말을 꾹꾹 눌렀다는 분석이 나온다. 구속수사 여론이 월등히 높은 상황에서 국민감정과 검찰을 굳이 자극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9일 전 삼성동 자택 앞 “진실” 발언이 강성 지지층을 향한 정치적 메시지였다면, 이날 “송구·성실” 발언은 ‘그래도 구속은 너무하다’는 동정 여론을 키우려는 메시지라는 것이다.
검찰은 정치적 탄압을 주장하는 정치인들의 ‘장외 여론전’에 매우 민감한 편이다. 전직 검찰 고위관계자는 “검찰은 피의자가 밖에서 많은 말을 하고 들어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말은 조사실에서 하면 된다”고 했다.
박 전 대통령 쪽은 공식 선임한 변호인 9명 외에 청와대를 거쳐간 전직 고위 법조인 등으로부터 검찰 특수통들의 피의자 신문 방식 등에 대한 물밑 조언을 들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박 전 대통령 쪽은 잘 통하지 않는 장외전 대신 일단 차분하게 조사에 응하되, 이후 검찰 수사의 허점을 파고드는 법리 싸움과 함께 ‘탄핵까지 당한 전직 대통령을 구속할 경우 정치·사회적 파장과 국가의 자존심 문제’를 집중 거론할 것으로 예상된다.
박 전 대통령의 “송구” 발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이들도 있다. 최근까지 청와대에 있었던 한 인사는 “갑자기 저자세로 바뀐 게 아니라 ‘어찌됐든 국민들에게 굉장히 죄송하다’는 말씀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 실제 “송구”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일이 적은 박 전 대통령이 마지못해 사과나 사죄를 해야 할 때 자주 쓰던 말이다. 박 전 대통령은 윤창중 당시 청와대 대변인의 방미 중 성추문 때나, 지난해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때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힌 바 있다.
정치권에서는 박 전 대통령의 검찰청사 앞 발언이 여전히 부족하다는 비판도 나왔다. 더불어민주당과 바른정당은 대변인 논평을 통해 “국민을 향한 진심 어린 사과와 사죄가 빠졌다”고 비판했고, 국민의당도 “스스로 뉘우치지 않는 사람은 법의 심판을 통해 죄를 깨우치게 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김남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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