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시간 동안 쉼없이 이야기가 이어졌다. 박명림 교수(연세대·정치학)와 신진욱 교수(중앙대·사회학). 시민으로서, 또한 사회과학자로서 촛불광장의 민심을 채집하고 연구했던 이들은 추웠지만 뜨거웠던 지난 겨울을 복기하며 열띤 대화를 나눴다. 이들은 탄핵에 대해 ‘명예혁명’ ‘세계사적 사건’이라고 높은 평가를 내렸으나, 우리 사회의 난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선 이제 ‘탄핵’이란 첫번째 관문을 통과했을 뿐이라는 데 입을 모았다. 탄핵열차는 종착역에 이르렀으되, 대선열차·개혁열차로의 성공적인 환승을 위해선 시민들의 동력이 계속 뒷받침돼야 한다는 것이다. 대담은 12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진행됐다.
※점심도 거르며 진행된 ‘마라톤 격정 대담’ 이 끝난 뒤 두 사람은 진이 쏙 빠진 모습이었고, 이들의 대화를 모두 노트북 컴퓨터로 받아친 오승훈 기자는 손가락이 마비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들의 토론을 2차례로 나뉘어 전한다.
12일 오전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사옥에서 <대담/주권자에서 유권자로, 그리고 우리의 삶> 박명림 연세대 교수(왼쪽)와 신진욱 중앙대 교수가 발언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Q. 현실 정치로 가보자. 김종인 전 의원이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해서 친문을 빼곤 모든 세력들을 다 만나고 있다. 이들의 주장처럼 대선 전 개헌이 불가능하더라도, 개헌을 고리로 한 움직임이 향후 정계개편의 핵심이 될 가능성도 있다.
박명림 나는 오랫동안 개헌을 주장해 왔지만, 촛불광장이 분출하자마자 개헌 의제가 제기되었을 때 일찌감치 ‘탄핵-대선-개헌’의 순서가 맞다고 주장했다. 탄핵 의제가 광장에서 시작된 것이 현재의 입법, 사법, 행정 구조가 작동이 안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개헌 먼저 하자는 것을 광장이 용인하겠는가? 그래서 이제 ‘탄핵-대선-개헌’ 이 순서와 의제의 역순은 어렵다. 최근 제기되는 ‘대선 전 개헌’ 주장을 바람직하지 않게 보는 이유는 이렇다. 모든 정치 의제는 최소 근거와 명분이 있어야 한다. 현재의 개헌의제는, “개헌은 블랙홀”이라고 반대하다가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을 은폐하기 위해서 박근혜가 먼저 제기했다는 점을 짚어봐야 한다. 사실상 박근혜의 정치 프레임에 맞추어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박근혜 의제와 결별하라는 국민적 요구와 충돌할 수 있다. 두 번째는 박근혜가 탄핵을 당했음에도 박근혜 세력의 정치적 생존에 가장 중요한 명분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개헌이 박근혜 세력의 정치적 연장을 위한 수단이나 명분인 것이다. 세 번째가 중요한 지점인데, 그동안 박근혜 정부에서 국민들이 고통받고 세월호 의제 등에서 박근혜정부에 대해 반대할 때, 어떤 정치적 역할도 하지 않았던 원로 그룹이 자신들의 정치적 복귀의 명분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갑자기 정치에 복귀하거나 또는 정치에 가담하거나 탈당하는 명분으로, 자신의 개인적인 정치적 실익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국가 근본법인 헌법을 활용하려고 한다. 박근혜 탄핵, 박근혜 세력의 정치적 생존, 반박근혜 진영에 어떤 기여도 하지 않는 분들의 정치적 복귀와 탈당과 정치 참여의 명분. 이 세가지보다 개헌 논의는 훨씬 근본적이고 엄중하고 역사적인 문제다. 개헌 문제야 말로 짧게는 30년 많으면 100년 어쩌면 대한민국의 통일까지 달려있는 너무나도 중요한 문제다. 그래서 개헌문제를 고리로 해서 정계 개편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선 강력히 비판해야 한다. 국민들도 이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을 것이다. 급조된 가설 정당, 가설 천막, 빅 텐트, 스몰 텐트 이런 용어는 국민들에게 모욕적인 것이다. 가설 정당, 가설 천막이 어떻게 국가를 운영할 것인가. 그 가설 정당들은 헌법을 논의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자기들의 일관된 정책과 정견을 가지고 국민들한테 정당으로 지지받는 것이지 개헌을 위해서 가설정당을 만든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헌법은 그렇게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 나라의 헌법을 몇몇 정치인의 이합집산과 가설정당, 가설 조직, 가설 천막을 통해 헌법에서 굉장히 중요한 인권 문제, 정부 형태, 경제 조항을 다룬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정치는 대의를 명분으로 해서 실리를 추구하는 것인데 지금 상태로는 대의는 사라지고 실리만 남을 것이다. 개헌, 개혁, 국가발전, 이상적인 민주주의 체제 모색 등 많은 것들이 정치세력의 이합집산으로 망쳐질 수 있다. 이런 것을 ‘탁상 거래 헌법’이라 한다. 이승만과 한민당의 거래, 박정희와 전두환의 탁상헌법, 전두환·노태우와 양김의 탁상헌법으로 우리가 그토록 고통받아왔는데 이번에 두 달 안에 개헌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참여형 국민개헌으로 가야 한다. 지금도 헌법 때문에 한국이 발전하지 못하는 이유가 한두가지가 아니다. 또 정치인의 실리를 추구하기 위해 대의가 실종될까 우려된다.
한 가지 우리가 생각할 것은 한국 사회에서 의제의 전이 과정을 보면, 정치 연합의 형성과 해체, 이완과 응집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점이다. 1987년에 직선제 쟁취라는 단일 의제는 최대 민주화 연합을 형성했다. 김대중, 김영삼뿐만 아니라 정당과 시민 사회, 또 노동과 민중이 연합했다. 그런데 직선제 쟁취 이후에는 빠르게 세력이 균열했다. 첫 번째는 6월 항쟁과 7, 8월 노동자 대투쟁에서 시민과 노동, 시민과 민중이 빠르게 분열했다. 두 번째는 시민 사회와 정당이 분열됐다. 세 번째는 김대중 김영삼 분열이다. 시민과 노동의 분열, 시민사회와 제도정치의 분열, 김대중 김영삼의 분열. 만약에 앞에 두 분열이 없었다면 김대중 김영삼의 분열도 쉽게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 당시에 직선제 쟁취 뒤의 분열이 직선제 못지않게 중요했던 군부독재 종식을 못 이룬 중요한 원인이었다. 탄핵을 성취한 뒤, 시민파와 민중파가 분열되거나, 그 다음에 시민 사회와 의회가 분열되고, 의회안에 탄핵을 위해서 연대했던 세력들이 분열이 된다면 위험하다. 앞에서 1997년 네가지 압도적인 요인에도 불구하고 디제이가 1.9%포인트 39만 표 차이만 냈다고 했는데, 지금 현재 개혁 진영의 리더는 김대중보다 약하다는 것이다. 선거를 두달 앞둔 지금은 ‘설마 패배하겠느냐’ 할지 모르지만 선거동학 자체는 다르다. 한국은 워낙 보수의 반격 요인이 많았다. 이제 선거 의제나, 선거 연합이나 담론 등을 말할 때 지금까지보다 조금 더 지혜롭게 대응했으면 좋겠다.
“가설된 빅텐트, 스몰텐트는 국민에게 모욕적”
신진욱 선거 정치 관련해서 김종인 전 민주당 의원은 예상했던 대로 반친문 반친노 연대를 최대 연합의 수준까지 확대하기 위해 시도하고 있다. 구조를 보면 일종의 양파 껍질처럼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을 제일 먼저 묶고 그다음에 국민의당을 묶고 그다음에 대선정국에서 가장 결정적인 변수인 김종인 쪽 반문 세력을 묶으려고 한다. 김종인의 중점적 시도는 민주당 내부 균열을 일으키는 데 성공하느냐 하는 것이다. 자유당과 바른정당이 지금 선거 대선에서 하나로 묶이게 되면 바른정당의 존재 자체의 진정성을 우리가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국민의당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만약 반문재인, 반민주당 연합이 구성된다면, 이는 지난 몇달간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나머지 정당들이 탄핵 정국에서 표방했던 모든 것들, 그들이 말하고 행동했던 모든 것들을 스스로 부정하는 행동이 된다. 이점에 대해서 민주당 측에서는 집중적인 공격, 공략이 필요할 것이다.
여론 지형을 보면, 이와 같은 연대는 다수의 유권자들에겐 납득하기 힘든 모양새로 진행되고 있다. 어떤 적극적, 공세적 전략이라기보다는, 지금 민주당 지지도가 거의 50%에 육박하고 문재인 대세를 꺾을 전망이 안보이기 때문에 수세적 위치에서, 말하자면 궁여지책으로 나온 것이기에 그렇다. 그만큼 취약한 전략인 것이다. 취약한 전략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교수님도 말씀 하셨듯이 대선이라고 하는 것이 워낙 하나의 ‘사건’으로 좌우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한국정치는 유동성이 굉장히 크다. 하나의 결정적 실수를 할 경우에 지지율이 10-20%포인트를 왔다 갔다 하기 때문에 탄핵 추진 세력, 개혁 추진 세력에서 중대한 실수를 저지를 경우에 이들(반개혁 세력)이 어떤 의미있는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대세가 꺾일 만한 결정적 실수를 하느냐. 또는 민주당 내부를 균열시키는 전략이 암암리에 성공을 거두느냐. 이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그래서 첫째, 민주당은 신중한 행보를 해야 된다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포용의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이런 것이 정치적 역량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포용을 지향하느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면 지향 안한다고 아무도 말 안하니까. 민주당을 균열시키는 공작 정치는 개인적 손익을 계산하는 일부 의원 층에 의해서 성공을 거둘 가능성도 분명히 있다. 이때문에 민주당은 단지 집권하기 위해서 뿐 아니라 탄핵된 정치 세력이 대선을 통해 다시 생명을 얻는 우리 역사의 비극을 방지하기 위해서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는 게 중요하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탄핵에 참여했던 수많은 시민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절망을 줄 것이다. 이것은 ‘민주당을 지지하냐 아니냐’와는 다른 차원이다.
개헌과 관련해선, 물론 나도 개헌을 찬성한다. 원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지금의 박근혜가 있게끔 한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적폐청산과 새로운 국가 질서 창출을 위해서는 개헌이라는 다리를 넘지 않고서는 절대 갈 수 없다. 이것은 법리적으로 그렇다. 구조를 바꾸기 위해서는 개헌이 없는 적폐청산은 성립하지 않는다. 문제는 어떤 행동의 의미는 누가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위해 그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서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 맥락을 빼놓고 어떤 행동의 찬반을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은 전혀 가능하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지금 분권형 개헌, 대선전 개헌, 임기단축을 이야기하는 이 모든 주장들은 권력남용을 한 주인공이 정권교체를 할 가능성이 높아지니까 권력분점을 통해서 생존하겠다는 그 이야기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개헌이라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이는 탄핵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전복시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개헌론에 이름을 붙인다면 ‘섞어찌개 개헌’이다. 내각제, 양원제, 중임제 등의 중대한 개헌 논의를 한 패키지에 섞어 말하는 것이 마치 냄비에 이것저것 다 집어넣어 센불에 바로 끓여먹는 섞어찌개 같다.
그런데 헌법은 법률이 아니다. 헌법은 현대 정치의 모든 규범 중 가장 경직된 것이다. 장기 지속해야할 중대한 헌법적 변화를 짧은 시간 내에 충분한 고려 없이 만들어낸다는 것은, 그것이 얼마나 긴 시간 한국 정치를 규정하는가를 생각해본다면,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문제의 헌법적 요소가 무엇이었는지를 세밀하게 연구해서 그에 상응하는 제도적 설계와 토론을 거치고 충분한 합의 시간을 가진 이후 개헌을 해야 한다. 이와 같은 절차의 중대성을 존중하지 않는 모든 개헌론은 진정성을 인정하기 힘들다.
개헌을 통해 이합집산하려는 정치인들은 촛불이 얼마나 깊고 견고한 것인지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촛불 에너지는 아직 죽지 않았다. 촛불로 고양된 자긍심과 효능감이 대선국면까지 흘러갈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개헌국면을 통해 야합정치를 하려 할 때 촛불이 한 번 더 터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2004년 탄핵 시도의 역풍으로 당시 새천년민주당과 한나라당이 어떤 신세가 됐는지 다시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나는 개헌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다만 진정성 면에서 민주당과 국민의당이 의회 내에서 주도해가야 한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여소야대 국면을 맞게 된다. 탄핵을 추진했던 민주당·국민의당·정의당의 연대에 의해 ‘영구한 개혁, 영구한 적폐청산이 개헌이다’라는 슬로건을 내걸어야 한다. 헌법의 근원적인 경직성, 즉 영구성, 이 헌법 구조 자체를 박근혜가 다시 탄생할 수 없게끔 바꿔야 한다. 자유한국당과 같이 책임 있는 세력을 배제한 가운데 개헌은 진행되어야 한다.
헌법 제정이나 개정에 이르는 역사적 경로를 헌법학에서 5~6가지 나눈다. 일반 의회에서 하는 방법, 헌법 재개정을 위한 의회를 따로 선출하는 방법, 법률 전문가 집단이 하는 방법, 국민투표에 부치는 방법, 외부에 의해 부가된 헌법 등등. 이 각각의 경로가 장단점을 갖고 있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의회에서의 논의와 법률적인 전문가의 숙의, 그리고 국민들의 여론과 헌법 개정 이슈에 대한 충분한 이해’라는 삼각형이 틀에 맞춰질 때이다. 이 때 강점을 극대화하고 약점을 최소화할 수 있다. 이 방향으로 가기 위해선 상당한 기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졸속개헌을 하려는 것은 세계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가장 수준높은 헌법주의를 실현한 뒤에 가장 저속한 헌법 개정을 한 사례’로 기록되지 않을까.
Q. 차기 정부는 누가 되더라도 여소야대 국회다. 연정과 협치의 문제가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게 제기되는 이유다.
박명림 지금은 단순한 탄핵국면이 아니다. 지난 9년 집권에 대한 총체적 정리가 탄핵으로 이어진 것이다. 탄핵이 곧 대선이고, 대선이 곧 개혁이 돼야 한다. 국면국면마다 핵심의제와 정치연합이 워낙 빠르게 변하고 있다. 탄핵의제가 대선의제와 개헌의제까지 연결되기 바라지만 쉽지 않다. 다음 정부는 연립, 연합, 공동 정부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통합 정부’가 돼야 한다.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누가 집권하든지 여소야대가 될 수밖에 없다. 소수파 집권이 될 수밖에 없다. 둘째, 현재의 국민 열망으로 봐서는 개혁파의 집권이 대세이지만 한국 사회의 구조적 세력분포는 늘 보수 우위 사회다. 박근혜가 국가를 워낙 최악의 상태로 만들었기 때문에 보수(재계, 정당, 언론, 학계 등)가 움츠러든 것일 뿐이다. 이는 단기적, 현상적 위축이지 사회 담론과 경제적 자원은 압도적으로 보수가 우위다. 의회를 벗어난 사회 지형에서 연대와 연합의 폭이 넓어졌으면 좋겠다. 셋째, 개혁의 의제와 워낙 엄중하다. 지금 광장의 요구는 정경유착, 재벌, 검찰, 언론을 바꾸라는, 한국 사회를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만들 것을 요구하고 있다. 모든 의제를 시민들이 제기하고 있다. 전문가와 정부와 국회가 외면했던 의제들이 총체적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민주공화국의 시민들이 새롭게 재탄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엄중성에 비춰봤을 때 집권세력의 범위, 역량, 능력이 작으면 작을수록 바꾸기가 어렵다. 정치적 효능감이 클수록 정치적 순환 주기가 빠르다고 한다. 열망과 좌절, 기대와 낙담의 주기가 빨리 올 수 있고 낙폭이 클 수 있다. 개혁에 실패하면 의제가 망가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보수세력의 저항도 강력할 것이다.
통합정부(포괄정부)는 연립이나 공동 정부로 시작한다. 우리가 겉으로 보기에 어떤 한 세력이 집권하면 개혁을 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개혁은 오래 못 간다. 권력독임으로 인해 연정이 불가능하고 갈등이 높은 특징을 갖는 대통령제의 한계로서, 아르헨티나, 필리핀, 한국, 멕시코, 러시아와 같이 중진국 함정을 넘지 못하는 나라들에 나타나는 공통점이다. 임기 4,5년 안에 어떻게든 성과를 보여주기 위해서 정치가 기득세력에 종속되는 편이 있다. 선거 주기와 민주주의 주기가 시장 주기와 기업 주기에 예속되면서 개혁을 제대로 못한다. 그런데 통합정부 하에서는 ‘중도’에서 출발해 ‘중도개혁’을 거쳐 ‘보수세력의 합류’가 가능하다. 소연정에서 대연정으로 가는 것이다. 독일 같은 경우는 8명 총리가 모두 연립 정부였다.
대선 직후, 정당 연대를 통한 개혁과 개헌은 필수적이다. 우선은 소연정, 중연정으로 가야한다. 궁극적으로는 대연정도 포기할 필요 없다. 통합정부를 포괄정부나 보편정부로 부르는 이유는 보편적 의제를 해결하는 것뿐만 아니라 타협적이고 안정적인 정부 운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보수세력이 환골탈태 후 교정받을 수 있는 거의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한다. 김영삼 정부가 국가를 외환위기의 나락으로 빠뜨리긴 했지만 ‘민주보수’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 들어 ‘건설보수’, ‘산업보수’로 돌아섰다. 박근혜 정부 들어 ‘반공보수’, ‘독재보수’로 들어섰다. 이는 겉으로만 민주정부이지 박근혜 정부의 정신은 권위주의 보수였다.
개혁정부의 개혁성과 민주성을 담보하면서 연합성, 연립성, 통합성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시민사회와의 협치’가 중요하다. 지금의 탄핵열기를 광범위한 국민참여로 연결하여 국가대개혁을 이뤄야 한다. 이것이 아니면 개혁은 성공할 수 없다. 시민사회와의 협치가 없다면 개혁의 성공도 어렵고, 개혁의 후퇴나 실패와 함께 강력한 보수의 반기가 찾아올 것이다.
자유한국당 정우택 원내대표를 비롯한 의원들이 3월8일 오전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사드배치 환영과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의 모호한 입장을 비난하는 손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신진욱 현재 여론상으로 민주당 후보가 압승을 거둘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압승으로 선출된 대통령이 함께 가야할 의회는 민주당이 압도적이지 않은 의회, 즉 여소야대다. 행정부와 의회가 엇박자이기 때문에 협력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중요한 문제는 대선 이후에 누가 당선되든 여소야대를 이끌고 가야 하는데 선출된 행정부의 수반이 어떤 법안을 통과시킬 만한 최소 합의를 도출해낼 것이냐다. 대선 이후 행정부와 입법부의 관계에서 본다면, 일괄적으로 타협의 정치냐 아니냐를 말하기 힘들지 않을까. 법안의 성격상 의회 내에서 어느 정도의 합의를 이끌어낼 것인가는 너무나 다르다. 개혁적 지향이 강한 법안일수록 그 안에서 합의를 도출하기 힘들 것이고 좀 더 넓게 포괄될 수 있는 법안은 통과가 쉬울 것이다. 똑같은 개혁이라 할지라도 민주당과 국민의당이 손잡고 통과시킬 수 있는 법안이 있고, 민주당과 국민의당과 정의당이 함께 이끌어나갈 수 있는 차원이 있다. 이는 사안별로 정치적 역량이 요구되는 것이다.
박명림 한국에 통합정부가 필요한 이유는, 노동, 경제, IT, 교육, 남북경제와 통일 등 대한민국의 각 분야가 너무 심각한 위기상태이기 때문이다. 각 분야의 최고 인재와 최고 전문가와 최고의 정당이 드림팀을 구성해야한다. 국가의 전체 역량은 외환위기 극복 이후 상승 국면이었지만 이명박 정부 이후 하강 국면이다. 지금의 하강 국면을 상승 국면으로 바꿔야 한다. 탄핵은 국가를 정상화하라는 것이다. 개혁 세력 주도의 드림팀을 구성해서 통합 역량을 보여줘야 한다.
우리나라는 5년에 한 번씩 사생결단을 한다. 대통령 의제는 있지만 국가 의제는 상실되어왔다. 국가의 장기전략과 거시의제를 개발하는 부서가 한 군데도 없다. 대통령이 임기가 끝나면 다음 대통령이 이전 정부의 정책은 전면 부정해왔다.
신진욱 정책 내용이 잘못된 것보다 5년 단위로 정책이 완전히 바뀌니까 모든 제도들이 일치 가능성이 없다.
박명림 마치 진자운동 같다. 보수는 진보에서 매 맞고, 진보는 보수에게 매 맞는 것이 반복된다. 상호 반대의 강도가 너무 크다보니 개혁과 발전의 공동공간이 너무 협애하다. 그러나 통합정부가 들어서면 반대의 강도가 작을 수 있다. 제도적으로 말하면 대통령제보다는 의회책임제, 양당제보다는 다당제, 다수대표보다는 비례대표, 단독정부보다는 연립정부. 이 네 가지가 압도적으로 인권, 자유, 평등, 빈곤, 공공성, 복지에 좋다. 쉽게 말해 자유시장 경제보다는 조정시장경제체제로 가는 것이다. 정치 체제와 경제 체제와 복지 체제는 너무나 연관이 깊다. 그런데 한국 사회의 보수는 워낙 막강하다. 국정농단으로 불명예를 짊어진 보수의 집권을 막는 가장 중요한 방법 가운데 하나가 개헌이다. 촛불 열기가 선거로, 그 후에 개헌으로 이어졌으면 하는 것이다.
신진욱 촛불의 열망이 아직 끝난 것이 아니라고 본다. 두 단계 더 남았다. 대선과 제도적인 개헌이다.
박명림 시민과 의회가 같이 하는 ‘국민참여형 개헌’이 중요하다. 권력자들의 ‘거래헌법’, ‘탁상헌법’이 아니라. 의회와 전문가와 국민. 이 삼각형이 국가 미래에 동시에 참여해서 전국적인 국민 의견 청취 절차, 국민의 의견을 경청하는 절차, 국민이 참여하는 절차를 포함해야 한다. 언론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다.
신진욱 민주당은 개헌론에 정략적인 의도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단순 반대하는 것보다는 ‘촛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하는 선언이 필요하다. 정권교체를 넘어, 궁극적으로는 한국 사회의 권력구조를 개혁하고 헌법을 개혁하는 ‘영구한 개혁’, 이를 통한 ‘영구한 통합’의 사이클을 완성해야 한다. 지금처럼 급조된 정략적 개헌이 아니라 정권교체를 통해, 이번 탄핵을 추진했던 개혁세력과 함께 개헌작업을 해야 한다. 정파나 정당의 이익을 위해서 하는 개혁이 아니라, 긴 시야 속에서 한국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더 좋은 민주주의가 될 것인지에 대한 답을 개헌 속에서 찾아야 한다. 이러한 접근을 민주당에서 주도적으로 해야 한다. 그래야 지금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대선 전 개헌론’의 무의미함을 유권자에게 보다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지 않을까.
차기 정권이 취약한 정권이 될 것이라고 예단할 필요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차기 정권의 ‘정치적 기반’이 취약하다는 것이다. 지금같은 조기대선 국면이 오게끔 한 동력은 촛불이다. 반박근혜의 여론 동맹이다. 광범위하고 압도적인 합의에 의한 동맹이다. 그러나 이는 한국 사회의 유권자들의 오랜 여론 분포 맥락 속에서 보면 대단히 비일상적인 현상이다. 그 이유는 이번 탄핵이라는 이슈 자체가 민주주의와 사람들이 상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헌법 질서의 가장 기초를 충격적으로 훼손시킨 사건이었기 때문에 압도적 다수가 합의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차기 정권이 시작되면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노동, 복지, 재벌, 외교, 군사, 대북 등 모든 측면에서 촛불시민들이 분열될 것이 분명하다. 우리에게 익숙한 보수 우위의 지형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보수 우위의 지형을 바꾸지 못한 채로 개혁정부가 여야 협력을 하게 되면 노무현 정부가 부딪혔던 딜레마를 또다시 맞을 가능성이 있다. 핵심 지지층을 상실하게 되면서 보수의 지지도 못받고 핵심지지층도 이탈할 위험성에 직면하게 된다. 그렇다고 협력을 안하면 정국이 교착상태에 빠지거나 더 우위를 점하고 있는 보수층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 때문에 노무현 정권에서 대연정 얘기가 나온 것 아니겠나. 프랑스의 올랑드 대통령이 지지율이 10%가 안 된다. 올랑드는 보수층과 잘해보려 했지만 보수층은 어차피 그를 지지하지 않는다. 여기에 원래 지지층까지 떠나고 나니 대통령 지지율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 후반기가 바로 그 상황과 같다. 이 딜레마를 넘어설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차기 정권이 탄핵 촛불의 흐름을 계속 끌고 가면서 개헌과 개혁 작업을 점진적으로 하는 것이다. 이 전제 조건 위에서만 화해의 정치가 딜레마에 빠지지 않고 가능하다. 대선 이후까지 촛불시민들의 개혁의지를 어떻게 주도해나갈 것인가를 차기 정권이 골몰해야 한다.
박명림 마무리를 해야겠다. 광장의 탄핵열기와 개혁열기가 정치를 통해 제도개혁과 국가개혁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장기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핵심고리는 탄핵이었지만 이를 통해 모든 개인이 시민으로 거듭났다. 탄핵열기와 개혁열기가 정치의제를 통해 대선과 개헌과 국가개혁까지 연결되는 길에 대한민국의 100년이 달려있다고 본다.
신진욱 막스 베버가 얘기했던 역사의 ‘전철수’(switchmen)라는 표현이 있다. 제도나 사회 구조는 좀처럼 바꾸기 힘든 장기적인 지속성을 갖고 있다. 그런데 역사의 어느 때에 기존 체제가 상당한 정도로 바뀔 수 있는 결정적 국면이 가끔씩 온다. 이 국면에서 첫 단추가 어느 방향으로 끼워지느냐에 따라서 이후 또다시 오랜 세월동안 좀처럼 바꾸기 힘든 경로가 결정되기도 한다. ‘촛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 지금 시민들의 정치적 에너지 상태에 부합하는 판단이 아닐까. 오늘의 박근혜가 있을 수 있었던 환경이 계속될 것인지, 아니면 다른 선로로 대한민국이라는 열차가 달리기 시작할지, 우리는 앞으로 짧은 시간 내에 선택하게 됐다. 행동을 통해서 긴 미래의 시간을 규정할 수 있다고 본다. 그 때가 바로 지금이다. 지금을 놓치면 되돌리기 어려울 것이다. 그만큼 귀중한 국면이 지금이라고 본다. <끝> (
박명림-신진욱 대담 ①편 보기)
정리/이유주현 오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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