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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박 대통령 검찰조사 성실히 받는 게 신뢰회복 첫걸음”

등록 2016-10-30 21:54수정 2016-10-30 22:27

[국정마비 사태에 대한 여야 원로·전문가들의 제언]
‘최순실 국정농단’ 파문으로 휘청거리는 위기 정국을 어떻게 수습해야 하냐고 묻자, 전화기 너머에선 한결같이 장탄식이 쏟아졌다. <한겨레>가 의견을 물은 정치·사회 각 분야의 원로와 전문가들은 “이번 사건으로 정부 시스템이 붕괴됐다는 게 드러났다”며 “대한민국은 지금 1987년 민주화 이후 최대의 국가적 위기 상황을 맞고 있다”고 진단했다.

대통령이 안보의 최대 ‘적’이 된 아이러니

전문가들은 박근혜 대통령의 ‘처신’이 불러온 ‘불신’을 우려했다. 비선실세인 최순실씨가 대통령의 연설문을 뜯어 고치고 정부 정책 결정은 물론 인사에까지 관여했다는 각종 ‘증거’들이 봇물처럼 터져나왔지만, 박 대통령은 이에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몇마디 사과로 넘어가려했다는 것이다. 원로와 전문가들은 우병우 민정수석, 안종범 정책조정수석 등을 경질하는 데 시간을 질질 끈 점도 문제로 지적했다.

임현진 서울대 명예교수(사회학)는 “대한민국의 최고 수장인 대통령이 책임을 져야 하는 문제 아니었나. 터져나오는 각종 의혹에 대해 진솔하게 상황을 털어놓았어야 하는데,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거짓 사과’를 하면서 문제를 더 키웠다”고 비판했다. 한나라당 윤리위원장을 지낸 인명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공동대표는 “이제 사람들은 대통령이 뭘 해도 ‘저것도 최순실이 시킨 게 아니냐’고 의심하게 되는 상황이 됐다”고 말했다. 인 대표는 “지금 시중에는 언론에 보도되지 않는 루머들이 심각한 경지에 이르렀다”며 “박 대통령이 국민들의 신뢰를 회복하지 못하면 통치가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수훈 경남대 교수(정치외교학)도 “박 대통령이 (비선실세를 통해) 한 국가의 시스템을 허무는 통치를 해왔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국민들은 이제 대통령이 국민의 안위를 지켜줄 수 있을 것이란 신뢰를 잃게 됐다. 북한의 위협과 도발보다 신뢰 상실이 더 큰 안보위기”라며 “지금 대통령이 안보 최대의 적이 돼버린 것이나 다름 없다”고 비판했다.

“박 대통령부터 성실히 검찰 조사 받아야”

청와대는 이런 상황에서도 “검찰 수사를 지켜보자”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하지만 의혹의 당사자인 최순실씨를 비롯해 고영태씨 등이 일제히 귀국해 검찰에 출석하거나 출석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또 검찰은 30일 귀국한 최씨의 소환을 늦추면서 검찰이 모종의 ‘시나리오’를 갖고 짜맞추기 수사에 나서는 게 아니냐는 의혹이 커져가고 있다. 원로와 전문가들은 이런 불신 해소의 첫걸음은 박 대통령이 ‘나부터 수사하라’고 선언하는 것이라고 고언했다. 성역 없는 엄정한 수사를 통해 ‘국정 농단’ 사태에 대한 명명백백한 진상규명을 하는 것이 모든 해법의 출발점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는 “박근혜 대통령이 검찰 조사를 성실하게 받고 그 결과에 따라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의 이런 자세가 사태의 심각성을 충분히 인식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될 것이라는 얘기다. 특히 검찰 수사와 관련해 국회 사무총장을 지낸 박형준 동아대 교수는 “지금 벌어진 사건의 성격상, 검찰의 통제 범위를 넘어선 부분이 있기 때문에 검찰 수사가 마무리된다고 해도 특검 수사는 불가피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명진 대표는 검찰 및 특검 수사를 통해 사법적 잣대로 책임을 묻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번 사건이 던지는 정치적 함의를 파악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최씨가 대통령 연설문을 고친 것 등 각종 혐의에 대한 (대통령기록물법 위반 등의 책임을 물어) 사법적 조처에 그칠 경우 오히려 상황의 위중함이 가려질 수 있다”며 “그 행위가 가진 정치적 의미를 따지기 위해 특검보다는 국회 등에서 특별조사위원회를 꾸리는 것도 방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 하야나 탄핵은 답이 아니다

검찰 수사 등을 통해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것과는 별개로 ‘국정공백’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여야는 물론 시민사회까지 머리를 맞대고 신중하게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원로와 전문가들은 지금까지 드러난 것만으로도 대통령 하야나 탄핵감이라는 데 공감하고 있지만, 막바로 대한민국 헌정사의 불행으로 남을 그 길로 치달아선 안 된다고 입을 모았다. 정현백 성균관대 교수(사학)는 “국민들이 ‘분노’하고 있는 동시에 ‘불안’해 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통령이 하야할 경우, 법에 따라 60일 이내에 대선을 치러야 하는데 후보가 난립하는 등 오히려 정국 혼란만 가중될 것이라는 현실적 우려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탄핵의 경우에도, 국회에서의 탄핵소추안 처리와 헌법재판소의 결정 등 최소 6개월 간의 공백과 예상치 못한 ‘후폭풍’이 뒤따를 수 있다.

그럼에도 어떤 방식으로든 신뢰를 잃은 대통령의 ‘2선 후퇴’는 불가피하며, 결국은 ‘거국중립내각’을 구성하는 것으로 해법이 수렴될 수밖에 없다는 게 대체적인 전망이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는 이와 관련해 “대통령은 2선으로 물러나고 앞으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어떤 정치공학적 책략을 구사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고, 임현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청와대 참모진과 내각 총사퇴 등 하루 빨리 인적 쇄신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내각이 총사퇴하면 뒷수습은 누가 하냐’는 우려가 나오는 데 대해 이수훈 교수는 “각 부처 차관 이하 관료들이 흔들리지 않고 자기 책임을 다하면 된다”고 잘라 말했다.

대통령 2선 후퇴 뒤의 그림과 관련해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은 “여야가 합의하는 선에서 총리를 바꿔 중립적인 내각을 꾸려야 한다”고 말했다. 현 상황에서 주도적으로 해법을 모색할 수 있는 주체는 그나마 선출된 권력인 의회밖에 없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명진 대표도 ‘여야 합의’를 강조하며 “안보와 경제 전문가, 신뢰할 수 있는 3인을 총리와 부총리로 세워 ‘협치’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인 대표는 이와 함께 “박근혜 정부가 지금 이렇게 된 건 청와대가 ‘예스맨’만 데려다 놔도 무조건 거품 물고 옹호한 새누리당 지도부의 책임도 있다”며 새누리당 지도부의 사퇴를 촉구했다.

보다 근본적인 제도 개편도 고민해봐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비선실세의 전횡 문제를 박근혜 정부만의 문제로 국한해 볼 수 없다는 게 이유다. 박상훈 대표는 “이번 문제를 박 대통령의 문제로 국한시켰을 경우, 또다시 비공식 라인과 권력 남용 문제가 발생할 때 시민들 입장에선 ‘누가 되나 다 똑같다’라는 인식만 생길 수 있다”며 “민주주의는 완벽한 제도가 아닌 만큼, 야당은 책임있는 모습으로 청와대의 권한 재조정 등 제도적 대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북핵 등 외교안보 위기 관리

각종 현안 중에서도 당장 남북대결 상황에서 북한의 핵·미사일과 군사적 도발 가능성 등에 대한 리스크 관리가 발등의 불이다. 또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 체계 배치 문제,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등 찬반 여론이 날카롭게 대립해온 군사·안보 현안들이 자칫 통제되지 않은 채 흘러갈 위험도 있다. 위안부 피해자들과 시민사회단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독단적으로 일본과 합의를 추진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에 대한 재검토도 시급하다. 다음달 8일 미 대선 이후 북핵 대응을 포함한 한-미 관계의 전반적인 조율을 어떻게 해나갈지 등 향후 외교 포석에 꼭 필요한 사안들도 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영이 안서는 권위 부재의 사태를 맞아 이들 현안이 구심점을 잃고 표류할 우려가 커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우선 급한 대로 한반도 정세에 결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안이나 국민 여론이 찬반으로 나뉘는 민감한 사안에 대해선 정책결정을 뒤로 미루고, 진행 중인 현안에 대해선 국회를 중심으로 국민적 동의를 밟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최순실씨의 국정농단으로 대통령의 정책 판단에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 드러난다면, 개성공단 폐쇄나 사드 배치 등 모든 정책 결정을 원점으로 돌려야 할 것”이라며 “북이 언제 어떤 도발을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인 만큼, 여야 가릴 것 없이 거국적인 차원에서 안보 현안에 대처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연철 인제대 교수는 “이번 사태의 가장 큰 해악은 더 이상 청와대의 ‘영’이 서지 않게 됐다는 점”이라며 “거국중립내각이 내치를 맡고 박근혜 대통령은 외치에만 전념하라는 일부의 주장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이번 사태로 ‘국제적 레임덕’이 된 대통령에게 국가의 명운이 걸린 외교·안보를 맡기는 것은 불장난”이라고 꼬집었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은 “지금 시점에선 외교·안보 분야에서 현안을 진전시키거나, 새로운 정책을 제시하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며 “정부에 대한 불신이 국민적 불안감을 낳고 있는 만큼,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과 사드 배치 등 현안은 국민적 지지와 동의를 얻는 절차를 거친 뒤에 추진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창수 코리아연구원장은 “이번 사태로 정부가 국민적 불신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외교·안보 분야 각 부처를 통솔·통제할 수 있는 건 국회밖에 없다”며 “외교·안보에 여야가 있을 수 없는 만큼, 국회 차원에서 일종의 ‘위기관리위원회’라도 구성해 국민적 불안감을 덜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개헌 필요성 커져…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는 정치권에서 제기되고 있는 개헌 논의를 단번에 삼켜버린 양상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이 사태를 덮기 위해 임기 내 개헌 제안을 던진 것이라는 정치공학적 시각이 작용한 탓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야말로 대통령 1인에게 권력이 집중돼 있는 현행 헌법의 문제점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라고 보고, 그 어느 때보다도 개헌 논의 필요성이 커졌다고 보고 있다. 박형준 교수는 “이제 개헌을 정부가 주도한다는 발상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 되지 않았나. 특히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 정치 시스템을 고치는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볼 계기도 마련됐다”며 “개헌이 물 건너간 게 아니라, 물 건너 온 것이 됐다”고 말했다.

원로·전문가들은 이처럼 개헌 필요성엔 공감하면서도 아직은 이르다는 반응이다. 박 교수도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어느 정도 수습된 뒤에 논의하는 게 맞다”고 말했다.

이정애 이경미 정인환 기자 hongby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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