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길, 신념의 길, 이희호 평전 (77)
제7부 동교동의 날들 2회- 10·4선언
제7부 동교동의 날들 2회- 10·4선언
2003년 말 제11회 춘사 나운규 예술영화제 공로상 수상자로 김대중이 선정됐다. “재임 중 스크린쿼터를 지키고 표현과 창작의 자유를 보장했으며 1500억원의 영화진흥기금을 조성해 한국 영화의 장기적인 발전에 버팀목이 됐다”는 것이 선정 이유였다. “남편은 그 상을 아주 기쁘게 생각했어요. 대통령으로 있는 동안 문화예술 발전을 위해 노력을 많이 했거든요.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지켰지요. 문화예산을 1%로 끌어올리기도 했고요.” 한국 영화 시장점유율은 김대중 집권 시기에 큰 폭으로 올라 2001년 50%, 2002년 48.3%, 2003년 53.5%를 기록했다.
2004년 1월29일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재심 선고 공판이 열렸다. 사형선고를 받은 지 23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김대중은 공판이 끝난 뒤 “최종적으로 법에 의해 신군부를 단죄했다”며 “국민과 역사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고 말했다. “남편은 대통령 재임 때는 재심신청을 하지 않았어요. 사법부에 부담을 주고 싶어 하지 않았거든요. 우리는 후세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법률적 심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날 남편과 함께 선고공판에 나갔지요. 늦었지만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실현하게 되어 정말 기뻤어요. 남편의 변호를 맡은 최재천 변호사가 수고를 많이 해주었지요.”
2004년 4월 총선을 앞두고 헌정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탄핵소추 사태가 터졌다. 전해 12월24일 대통령 노무현은 “민주당을 찍으면 한나라당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새로 창당된 열린우리당을 지원하는 발언이었다. 2004년 1월5일 민주당 대표 조순형은 “노무현 대통령의 선거개입은 헌법과 법률 위반으로 탄핵 사유”라고 주장했다. 노무현은 2월24일 “국민들이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해줄 것을 기대한다”고 말해 선거중립의무 위반 논란을 일으켰다. 3월3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노무현의 발언이 “공무원의 선거중립의무를 위반했다”며 선거중립의무 준수를 요청했다.
3월9일 한나라당 의원 108명과 민주당 의원 51명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발의했다. 3월11일 노무현은 기자회견에서 사과를 거부하고 “총선에서 나타난 국민의 뜻에 따라 정치적 결단을 하겠다”고 맞섰다. 3월12일 오전 국회에서 경호권이 발동된 가운데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됐다. “대통령 탄핵소추 사건은 우리에게도 충격이었어요. 국민이 직접 투표로 뽑은 대통령인데, 그 정도 일로 탄핵까지 하는 건 잘못이라고 생각했지요. 우리는 민심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봤어요.”
탄핵 역풍이 불었다. 3월12일 서울 광화문에서 탄핵 반대 촛불집회가 열렸다. 촛불집회는 3월27일까지 보름 동안 계속됐다. 열린우리당 지지율은 폭등하고,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지지율은 추락했다. 3월23일 한나라당은 임시 전당대회에서 박근혜를 새 대표로 뽑았다. 4월15일 17대 총선이 치러졌다. 47석이던 열린우리당은 과반수인 152석을 차지했다. 한나라당은 121석을 확보했다. 62석이던 민주당은 9석으로 추락했다. 민주노동당은 10석을 차지했다. 5월14일 헌법재판소는 대통령 탄핵소추안에 대해 “대통령이 선거법과 헌법 수호 의무를 위반했지만 그것이 파면할 만큼 중대한 것은 아니다”라고 기각 결정을 내렸다. 노무현은 63일 만에 대통령직에 복귀했다.
김대중은 2004년 봄부터 외국의 초청에 응해 국외 강연여행을 시작했다. “남편이 퇴임한 뒤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초청장이 왔어요. 2004년엔 기력을 회복해 외국 방문을 할 수 있었어요. 5월에 프랑스·노르웨이·스위스 세 나라를 순방했어요. 파리에서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포럼에서 연설했고요. 그 뒤 노르웨이 오슬로로 가서 노벨연구소가 주최한 강연회에서 ‘햇볕정책-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주제로 연설했지요.” 김대중은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세계보건기구(WHO)에서 특별연설을 하고 사무총장 이종욱을 만났다. “이종욱 박사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국제기구 수장이 된 분이에요. 우리는 세계보건기구가 북한 동포들을 지원해준 것에 감사를 표했지요. 안타깝게도 이종욱 박사는 2년 뒤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어요.” 김대중은 국외 강연여행 중에도 이틀에 한 번씩 혈액 투석을 받았다. “남편이 투석 때문에 힘들어했지만 활동하는 데는 큰 지장이 없었지요.”
6·15 남북공동선언 4돌을 맞아 국제토론회가 서울에서 2004년 6월14일부터 나흘 동안 열렸다. “국제토론회를 김대중도서관과 북한 통일문제연구소가 함께 주최했어요. 북한에서 리종혁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을 비롯해 여러 사람이 참여했지요.” 김대중은 특별연설에서 김정일의 답방을 촉구했다. “그런데 남북이 공동으로 여는 6·15 공동행사는 그 뒤로 열리지 못했어요. 북·미 관계가 계속 나빠졌거든요.”
김대중과 이희호는 6월29일 중국 인민외교학회 초청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중국은 남편이 퇴임한 뒤에도 국가원수 예우를 해주었어요. 장쩌민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우리를 맞았지요. 남편은 중국이 중요한 나라이고 앞으로 세계를 좌지우지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중국에 갈 때면 미리 중국에 관한 책을 열심히 읽었어요. 사전에 철저하게 준비를 하니 그쪽에서도 귀담아듣지요.” 김대중과 이희호가 중국을 방문할 때 동북아의 주요 관심사 가운데 하나는 2003년 9월부터 열린 6자회담이었다. 남·북한과 미국·중국·일본·러시아 네 나라가 참여해 북한 핵 문제 해결 방안을 찾았다. 김대중은 장쩌민을 만난 자리에서 “6자회담을 통해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한 뒤에도 6자회담을 존속시켜 동북아 평화를 보장하는 상설기구로 만드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2004년 1월 ‘내란음모’ 23년만에 무죄
“늦었지만 진실 밝히고 정의실현 기뻐” 3월 민주당 공조 ‘노무현 대통령 탄핵’
“민심이 받아들이지 않을거라고 생각”
김대중 “결국 당이 갈라져 생긴 비극” 2006년 6월 김대중 ‘육로 방북’ 제안
금강산 협의 뒤 북미갈등으로 핵실험 2007년 10월 노무현 군사분계선 넘어
“10·4선언 만족…정권 바뀐 뒤가 걱정” 2004년 11월 김대중과 이희호는 스웨덴과 이탈리아를 방문했다. “남편은 스웨덴 팔메센터에서 ‘한반도 평화와 스웨덴에 거는 기대’라는 제목으로 연설했지요.” 이어 김대중과 이희호는 로마에서 노벨평화상 수상자 세계정상회의에 참가했다. “남편은 개막식에서 기조연설을 했어요.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 레흐 바웬사 전 폴란드 대통령 같은 노벨평화상 수상자들과 함께 ‘북한 핵 문제와 중동 위기의 평화로운 해결’을 촉구하는 선언문을 채택했지요.” 이희호는 따로 로마에서 여성운동가 마리사 핀토와 만났다. “청와대에 있던 시절에 로마를 방문했을 때 핀토 여사를 알게 됐는데, 그이가 나를 만나고 싶어 했어요.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큰 저택에서 혼자 살고 있었어요. 여성운동을 열심히 하는 분이었어요. 그이가 내 자서전 <나의 사랑 나의 조국>을 이탈리아어로 번역해서 출간했어요. 고맙고 기뻤지요.” 북한과 미국의 갈등이 악화일로를 걸었다. 2005년 2월10일 북한이 핵무기 보유 선언을 했다. 조지 부시의 제2기 정권이 출범한 직후였다. 5월에는 영변 핵연료봉 추출을 완료했다고 발표했다. 6자회담이 다시 열렸다.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고 북·미 관계 정상화를 추진한다는 내용의 ‘9·19 공동성명’이 채택됐다. 미국은 합의사항을 지키지 않고 마카오에 있는 방코델타아시아(BDA)의 북한 계좌를 동결했다. 북한이 거세게 반발했다. 북·미 관계는 출구를 찾지 못하고 대결 국면으로 돌아갔다. 김대중은 2005년 8월10일 다시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다. “북한 핵 문제가 현안이어서 6자회담을 성사시키려고 힘을 쓰다가 피로가 겹쳐서 입원했지요. 그 무렵 국가정보원이 ‘국민의 정부’에서도 불법도청이 있었다는 발표를 듣고 충격을 받은 것도 영향을 주었지요. 세균성 폐렴으로 12일 동안 치료를 받았어요. 8·15 행사에 참가하려고 김기남 노동당 비서를 포함해 북쪽 대표단이 서울에 와 있었는데, 세브란스 병실로 남편의 병문안을 왔어요. 김기남 비서가 ‘좋은 계절에 다시 평양에 오시라’는 김정일 위원장의 방북 요청을 전했지요.” 앞서 6월에 통일부 장관 정동영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도 김정일은 “김대중 전 대통령을 좋은 계절에 초청하겠다”는 말을 했다. 김기남 일행을 만난 자리에서 김대중은 적절한 시기에 연락하겠다고 대답했다. 방북 요청을 사실상 수락한 것이었다. 9월22일 김대중은 다시 호흡곤란과 탈진증세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했다. “또다시 입원을 하니 걱정이 많이 됐어요. 줄곧 병실을 지켰지요. 남편은 보름 만에 퇴원해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 뒤 기력을 되찾아 12월 노벨평화상 수상 5돌 기념행사를 할 수 있었지요.” 2006년 2월11일 아태민주지도자회의가 김대중평화센터로 이름을 바꾸었다. “아태민주지도자회의는 남편의 정계은퇴 시절인 1994년에 상설기구로 창설했어요. 김대중평화센터로 이름을 바꿔 남편이 이사장으로 취임했지요. 남북의 화해협력을 지원하고 동북아와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것이 활동의 목표였어요.” 김대중은 통일부 장관을 지낸 정세현을 부이사장으로 임명했다. 2006년 봄 김대중의 방북 계획이 구체적으로 논의됐다. “남편은 정부 특사가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가겠다고 했지요.” 5월16일 김대중평화센터 관계자들이 금강산 호텔에서 북쪽 대표단과 만나 6월 하순에 3박4일로 방북한다는 데 합의했다. “육로로 가느냐 서해 직항로로 가느냐 하는 문제만 남아 있었어요. 우리는 육로로 가기를 원했지요. 그런데 6월 하순이 다가오는데도 북쪽에서 아무 연락이 없었어요. 북·미 관계 악화로 북쪽에서 초청을 할 수 없었던가 봐요.” 방북이 무산됐다. 미국과 갈등을 빚은 북한은 10월에 핵실험을 강행했다. 2006년 5월31일 제4회 전국지방선거가 치러졌다. 열린우리당은 광역단체 16곳 중에서 단 한 곳에서만 승리했다. 한나라당이 12곳, 민주당이 2곳에서 이겼고, 제주에서는 무소속이 당선됐다. 5·31 지방선거는 민심이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에서 멀어졌음을 보여주었다. “남편은 그해 1월 열린우리당 지도부를 만났을 때 ‘국민의 손을 잡고 반걸음만 앞서 나가라’고 이야기했어요. 참여정부가 민주주의를 하고 있는 것은 평가하지만 국민 의사를 수렴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고 봤어요. 더 겸손해져야 한다고 얘기했지요.” 김대중은 2006년 10월3일 <경향신문> 창간 60돌 특별회견에서 “열린우리당이건 민주당이건 비극은 결국 국민이 지원했던 당이 갈라지면서 시작됐다”며 분당에 대한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2006년 11월 열린우리당의 국민지지율은 8%대로 떨어졌다.
2006년 11월2일 김대중도서관 전시관이 개관했다. 대통령 노무현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전시관 개관 행사 때 참석해서 고마웠지요. 그런데 이틀 뒤에 다시 동교동 우리 집을 방문했어요. 권양숙 여사도 함께 왔지요. 현직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의 집을 찾은 건 전에 없던 일이었어요. 노무현 대통령이 응접실을 둘러보며 과거에 우리 집에 찾아왔던 일을 이야기했어요. 대통령 부부에게 점심을 대접했지요. 노무현 대통령이 솔직하고 담백하게 이런저런 얘기를 했어요. 남편이 아주 기뻐했지요.”
2007년 열린우리당 탈당 사태가 벌어졌다. 1월28일 열린우리당 원내대표와 법무부 장관을 지낸 천정배가 당을 떠났고, 2월6일에는 열린우리당 의원 23명이 집단으로 탈당했다. 3월19일에는 경기도지사를 지낸 손학규가 한나라당을 탈당했다. 2007년 4월24일 이희호는 전남 나주에 있는 동신대에서 주는 사회복지학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를 받으러 내려간 길에 이희호는 4·25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둘째아들 홍업의 찬조연설을 했다. “그때 열린우리당이 후보를 내지 않았어요. 신안·무안 주민들이 홍업이를 선택해주어 명예를 회복했지요. 남편도 응어리가 풀려 홍업이를 반갑게 맞았어요.” 언론에서는 김홍업의 당선으로 ‘범여권 통합’이 속도를 낼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2007년 8월 이희호는 금강산 관광을 다녀왔다. “청와대에 있을 때는 대통령 부인 신분이라 가보고 싶어도 갈 수 없었고요. 그해 여름에 박지원 실장과 함께 갔어요. 이화고녀 3학년 때 가보고 60년 만에 간 것이었어요. 여학교 때는 뛰어다니다시피 하면서 비로봉 꼭대기까지 갔는데, 몸이 성하지 않아 휠체어를 타고 비로봉 앞에서 폭포를 봤지요. 북쪽에서 사람들이 와서 우리에게 저녁식사를 대접해줬어요. 빨리 통일이 이루어져 우리 민족이 평화롭게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대통령 노무현이 임기를 5개월 남겨놓고 2007년 10월2일 남북정상회담을 하러 평양을 방문했다. 노무현은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넘었다. “남편과 나는 텔레비전 생중계로 그 장면을 지켜봤지요. 남편은 그동안 틈만 나면 남북 정상회담을 해야 한다고 호소했는데, 늦게나마 성사돼 다행이라고 생각했지요. 2000년 남북정상회담 하던 때가 떠올랐지요.” 김정일은 4·25문화회관에 직접 나와 노무현을 영접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2000년 우리와 만났을 때보다 건강이 안 좋은 것 같았어요.” 노무현과 김정일은 10월4일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을 발표했다.
‘10·4 남북공동선언’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추진이었다. 두 번의 ‘연평해전’이 벌어진 충돌 위험 지역을 평화 공간으로 바꾸어 공동어로수역과 경제특구로 만들자는 내용이었다. 경제협력 부문에서도 남과 북은 중요한 진전을 이루었다. 개성~신의주 철도와 개성~평양 고속도로를 개보수해 공동으로 이용하고, 서울~백두산 직항로를 개설해 백두산 관광 길을 열기로 했다. “10·4 남북공동선언 내용에 남편은 만족스러워했어요. 다만 너무 늦게 정상회담이 이루어진 것을 좀 걱정스럽게 생각했지요. 정권이 바뀌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2004년 1월29일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재심 선고 공판에 출석한 김대중이 인정신문에 답하고 있다. 23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한겨레> 자료사진
“늦었지만 진실 밝히고 정의실현 기뻐” 3월 민주당 공조 ‘노무현 대통령 탄핵’
“민심이 받아들이지 않을거라고 생각”
김대중 “결국 당이 갈라져 생긴 비극” 2006년 6월 김대중 ‘육로 방북’ 제안
금강산 협의 뒤 북미갈등으로 핵실험 2007년 10월 노무현 군사분계선 넘어
“10·4선언 만족…정권 바뀐 뒤가 걱정” 2004년 11월 김대중과 이희호는 스웨덴과 이탈리아를 방문했다. “남편은 스웨덴 팔메센터에서 ‘한반도 평화와 스웨덴에 거는 기대’라는 제목으로 연설했지요.” 이어 김대중과 이희호는 로마에서 노벨평화상 수상자 세계정상회의에 참가했다. “남편은 개막식에서 기조연설을 했어요.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 레흐 바웬사 전 폴란드 대통령 같은 노벨평화상 수상자들과 함께 ‘북한 핵 문제와 중동 위기의 평화로운 해결’을 촉구하는 선언문을 채택했지요.” 이희호는 따로 로마에서 여성운동가 마리사 핀토와 만났다. “청와대에 있던 시절에 로마를 방문했을 때 핀토 여사를 알게 됐는데, 그이가 나를 만나고 싶어 했어요.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큰 저택에서 혼자 살고 있었어요. 여성운동을 열심히 하는 분이었어요. 그이가 내 자서전 <나의 사랑 나의 조국>을 이탈리아어로 번역해서 출간했어요. 고맙고 기뻤지요.” 북한과 미국의 갈등이 악화일로를 걸었다. 2005년 2월10일 북한이 핵무기 보유 선언을 했다. 조지 부시의 제2기 정권이 출범한 직후였다. 5월에는 영변 핵연료봉 추출을 완료했다고 발표했다. 6자회담이 다시 열렸다.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고 북·미 관계 정상화를 추진한다는 내용의 ‘9·19 공동성명’이 채택됐다. 미국은 합의사항을 지키지 않고 마카오에 있는 방코델타아시아(BDA)의 북한 계좌를 동결했다. 북한이 거세게 반발했다. 북·미 관계는 출구를 찾지 못하고 대결 국면으로 돌아갔다. 김대중은 2005년 8월10일 다시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다. “북한 핵 문제가 현안이어서 6자회담을 성사시키려고 힘을 쓰다가 피로가 겹쳐서 입원했지요. 그 무렵 국가정보원이 ‘국민의 정부’에서도 불법도청이 있었다는 발표를 듣고 충격을 받은 것도 영향을 주었지요. 세균성 폐렴으로 12일 동안 치료를 받았어요. 8·15 행사에 참가하려고 김기남 노동당 비서를 포함해 북쪽 대표단이 서울에 와 있었는데, 세브란스 병실로 남편의 병문안을 왔어요. 김기남 비서가 ‘좋은 계절에 다시 평양에 오시라’는 김정일 위원장의 방북 요청을 전했지요.” 앞서 6월에 통일부 장관 정동영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도 김정일은 “김대중 전 대통령을 좋은 계절에 초청하겠다”는 말을 했다. 김기남 일행을 만난 자리에서 김대중은 적절한 시기에 연락하겠다고 대답했다. 방북 요청을 사실상 수락한 것이었다. 9월22일 김대중은 다시 호흡곤란과 탈진증세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했다. “또다시 입원을 하니 걱정이 많이 됐어요. 줄곧 병실을 지켰지요. 남편은 보름 만에 퇴원해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 뒤 기력을 되찾아 12월 노벨평화상 수상 5돌 기념행사를 할 수 있었지요.” 2006년 2월11일 아태민주지도자회의가 김대중평화센터로 이름을 바꾸었다. “아태민주지도자회의는 남편의 정계은퇴 시절인 1994년에 상설기구로 창설했어요. 김대중평화센터로 이름을 바꿔 남편이 이사장으로 취임했지요. 남북의 화해협력을 지원하고 동북아와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것이 활동의 목표였어요.” 김대중은 통일부 장관을 지낸 정세현을 부이사장으로 임명했다. 2006년 봄 김대중의 방북 계획이 구체적으로 논의됐다. “남편은 정부 특사가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가겠다고 했지요.” 5월16일 김대중평화센터 관계자들이 금강산 호텔에서 북쪽 대표단과 만나 6월 하순에 3박4일로 방북한다는 데 합의했다. “육로로 가느냐 서해 직항로로 가느냐 하는 문제만 남아 있었어요. 우리는 육로로 가기를 원했지요. 그런데 6월 하순이 다가오는데도 북쪽에서 아무 연락이 없었어요. 북·미 관계 악화로 북쪽에서 초청을 할 수 없었던가 봐요.” 방북이 무산됐다. 미국과 갈등을 빚은 북한은 10월에 핵실험을 강행했다. 2006년 5월31일 제4회 전국지방선거가 치러졌다. 열린우리당은 광역단체 16곳 중에서 단 한 곳에서만 승리했다. 한나라당이 12곳, 민주당이 2곳에서 이겼고, 제주에서는 무소속이 당선됐다. 5·31 지방선거는 민심이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에서 멀어졌음을 보여주었다. “남편은 그해 1월 열린우리당 지도부를 만났을 때 ‘국민의 손을 잡고 반걸음만 앞서 나가라’고 이야기했어요. 참여정부가 민주주의를 하고 있는 것은 평가하지만 국민 의사를 수렴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고 봤어요. 더 겸손해져야 한다고 얘기했지요.” 김대중은 2006년 10월3일 <경향신문> 창간 60돌 특별회견에서 “열린우리당이건 민주당이건 비극은 결국 국민이 지원했던 당이 갈라지면서 시작됐다”며 분당에 대한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2006년 11월 열린우리당의 국민지지율은 8%대로 떨어졌다.
2006년 11월2일 김대중도서관 전시관이 개관했다. 이틀 뒤인 11월4일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 노무현·권양숙 부부가 동교동 사저를 방문해 김대중·이희호와 허심탄회한 얘기를 나눴다. 민주당-열린우리당 분당에 이은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소추와 복귀 파동을 겪은 뒤였다.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2007년 4월 이희호는 4·25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신안·무안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둘째아들 홍업을 위해 찬조연설을 했다. 홍업의 당선으로 김대중의 화도 풀렸다. <한겨레> 자료사진
2007년 8월 이희호는 이화고녀 시절 수학여행 이후 60년 만에 금강산에 갔다. 관절염으로 산에 오르지 못한 채 비로봉을 배경으로 기념사진만 찍었다.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2007년 10월4일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열린 환송만찬장에서 노무현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분단 이후 두번째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10·4남북공동선언’을 발표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