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한용
참 신기한 일이다. 이번 사태는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해임건의에서 시작됐다. 해임건의는 국회가 의결했다. 세 야당과 무소속 의원들이 찬성했다. 새누리당도 효력을 부인하지는 못한다. 그런데도 해임건의는 없던 일이 됐다. 이정현 대표의 단식, 새누리당의 국정감사 거부로 정국이 요동치면서 김재수 장관 거취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싸움의 기술>이라는 영화가 있다. ‘싸움에 반칙이 어디 있어’ ‘싸움엔 룰이 없는 거야’ ‘선방 날리는 사람이 반은 이긴 거야’ 등 대사가 나온다. 의석수에서 밀리고 국민의당 설득에도 실패한 새누리당이 갑자기 힘없는 국회의장의 멱살을 잡았다. 기술은 통했다. 정세균 의장은 큰 죄라도 저지른 것처럼 곤궁한 처지로 몰렸다. 형사고발을 당했다. 여야가 정세균 방지법을 만든단다. 치욕이다.
추미애 대표와 우상호 원내대표는 멀뚱멀뚱 구경만 했다. 박지원 위원장은 “정세균 의장이 먼저 유감 표명을 했어야 한다”고 아쉬워했다. 그런가? 김재수 장관 해임은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말이 없다. 박근혜 대통령이 그렇게 무서운가? 해임건의처럼 중요한 정치적 결정은 실제로 관철할 자신이 없으면 아예 시작하지 말았어야 한다. 야당이 이런 수준이니 대통령이 국민을 우습게 본다.
국군의 날 행사장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정세균 의장이 만났다. 정세균 의장은 그 자리에서 “대통령은 김재수 장관을 해임해야 한다”고 당당히 말했어야 했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이 정세균 의장에게 “국회가 잘 좀 해달라”고 했다. 악수도 청하지 않았다. 정세균 의장은 “예 그래야죠”라고 했다. 이런 상황을 적반하장이라고 해야 하나, 뒤죽박죽이라고 해야 하나. 역시 싸움의 기술에서 정세균 의장은 박근혜 대통령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박근혜 이정현 정진석 등 싸움의 귀신들이 지금 휘두르는 권법은 취권이다. 손과 발의 움직임이 현란하고 소리가 요란하다. 허허실실이다.
곰곰이 생각해보자. 이번 사태의 본질이 뭘까? 대통령 권력과 의회 권력의 충돌이다. 양대 권력의 격돌은 6개월 전 4·13 총선 결과로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 지도부는 국회의 여소야대를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통령이 독점하던 권력을 조금도 양보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눈을 아무리 꽉 감아도 낮이 밤으로 바뀌지는 않는다.
국무위원 해임건의는 우리 헌법의 의원내각제 요소에 뿌리를 둔 제도다. 1952년 7월7일 개정된 헌법 70조의 2는 “민의원에서 국무원 불신임 결의를 하였거나 민의원 의원 총선거 후 최초에 집회된 민의원에서 신임 의결을 얻지 못한 때에는 국무원은 총사직을 하여야 한다”고 했다. 1954년 11월29일 개정된 헌법 70조의 2는 “민의원에서 국무위원에 대하여 불신임 결의를 하였을 때에는 당해 국무위원은 즉시 사직하여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3공화국 헌법은 “국회는 국무총리 또는 국무위원의 해임을 대통령에게 건의할 수 있다” “대통령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이에 응하여야 한다”고 규정했다.
해임건의는 의회가 정부에 정치적 책임을 추궁하는 수단이다. 국민을 대표하는 의회로부터 신임을 받지 못한 국무총리나 장관을 그냥 두는 것은 정국의 경색을 초래할 뿐 아무런 실익이 없다. 역대 모든 대통령이 헌법 규범의 이런 정치성과 강령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대통령은 억지를 부리고 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그 억지가 통하는 정치 현실이다.
언제까지 갈까? 박근혜 대통령은 김재수 장관을 끝까지 지키려 할 것이다. 국회에서 황교안 국무총리 해임건의안이 가결돼도 거부할 것이다. 북한을 핑계로 애국심을 호소하며 국민과 야당에 맹목적 추종을 강요할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현재의 야당이 얼마나 허약한 집단인지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야당이 과연 정기국회에서 내년도 예산안을 끝까지 처리하지 않을 배짱이 있을까? 박근혜 대통령은 치킨게임의 강자다.
다 좋다. 박근혜 대통령이 야당을 제압하고 정치적 승리를 거두면 기분은 좋을 것이다. 싸움은 이겨야 제맛이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이 경제를 살리고 한반도 위기를 관리할 능력은 있을까? 없는 것 같다. 바로 그게 문제다. 싸움만 잘하는 무능한 정권의 끝은 어디일까?
정치팀 선임기자 shy99@hani.co.kr
연재성한용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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