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이 5·18 민주화운동 36주년 기념식에 입장했다가 5·18 유족들의 거센 항의를 받고 쫓겨났다. 정부 결정에 따라 ‘임을 위한 행진곡’은 제창이 아닌 합창으로 불렸고, 기념식 직후 5월 단체 관계자들과 야권 인사들은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소리지르며 항의했다.

18일 오전 10시 광주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기념식에는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 대표,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 안철수·천정배 국민의당 공동대표, 심상정 정의당 대표 등 여야 지도부가 총출동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3년째 불참했고, 황교안 국무총리와 현기환 청와대 정무수석이 참석했다.

행사 시작 직전인 9시58분께 식장에 들어온 박승춘 보훈처장은 소복을 입은 5·18 유족 등의 강한 항의를 받고 자리를 떴다. 박 처장이 도착하기 전부터 유족들은 박 처장의 자리에 붙어 있던 이름표를 떼내고, 앞에 앉아 있는 정부 관계자들을 향해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도 못 하게 하냐!”, “아들을 잃었는데 보상이 다냐!”고 고함을 질렀다.

박 처장은 식장을 빠져나오면서 기자들과 만나 “저를 기념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한 것은 대단히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 처장은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불허가 청와대의 지시인지에 대해 “결정권이 보훈처에 있다고 얘기하기도 어렵고 청와대에 있다고 얘기하기도 어렵다”며 “우리나라는 민주주의 국가다. 국민이 주인인 나라다. 따라서 국민의 의견을 들어서 결정하는 것이지 특정 개인이 독단으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합창 공연 형식으로 연주될 동안 황교안 총리와 현기환 청와대 정무수석은 내내 입을 굳게 다물었다. 김종인·안철수·천정배 대표는 물론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 등은 노래를 불렀다. 심상정·노회찬 당선자 등 정의당 지도부는 ‘임을 위한 행진곡 기념곡 지정하라’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가 내려놓고 힘차게 따라 불렀다. 반면 보수단체들은 노래가 시작되자 퇴장했다.

20여분 만에 행사가 마무리되자 김성식 국민의당 정책위 의장은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소리를 지르며 항의했다. 박주선 국민의당 의원 등도 “행사가 이게 뭐냐”, “형식적이다”라고 한탄했다. 김양래 5·18기념재단 상임이사는 “황 총리의 5·18 기념사는 앞부분에서 영령들을 기억하고 추모한다는 내용 빼놓고는 복지 이야기를 하는 등 꼭 시정연설을 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며 “5·18 추모에 맞는 알맹이 내용이 전혀 없어 허탈했다”고 말했다. 국민의당 의원·당선자들은 ‘임을 위한 행진곡’ 노래의 주인공인 윤상원·박기순씨 묘지 앞에서 다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김성식 의장은 묘비 앞에서 “진짜 미안합니다!”라고 외친 뒤 흐느껴 울었다.

행사 뒤 황교안 국무총리는 한마디 해달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미 이야기 다 했다”며 자리를 떴다. 보훈처는 이날 저녁 ‘박승춘 처장의 식장 입장 거부에 대한 입장’을 내어 “5·18 단체, 일부 정치인이 노래를 부르는 모습과 호국 보훈단체장 및 정부 관계자가 부르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정부가 왜 제창을 결정하기가 어려운지 이유를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됐을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광주/송경화 정대하 기자 freehw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