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수성구갑에 출마한 김부겸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13일 저녁 초반 개표 결과가 앞선 것으로 나오자 범어동 선거사무소에서 지지자를 끌어안으며 기뻐하고 있다. 대구/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세번째 도전에 결국 대구가 응답했다. 김부겸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56%가 개표된 14일 새벽 1시40분 현재 62.09%를 득표해 37.9%를 얻은 김문수 새누리당 후보를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앞서 압승을 예측한 방송3사 출구조사를 지켜보던 김 후보는 기자들에게 “아직 승리라고 쓰지 말라”며 “그만큼 대구시민들의 답답한 마음을 정확히, 부지런히 대변해야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2012년 19대 총선, 2014년 대구시장 선거에서 연거푸 낙선하고도 그는 꿋꿋이 대구를 지켰다. 김 후보가 당선된다면 중선거구제로 치러진 1985년 12대 총선 이후 31년 만에 처음으로 대구에서 야당 정치인이 탄생하는 셈이다.
16~18대 국회 때 경기도 군포에서 내리 3선을 지낸 김 후보가 2012년 총선을 앞두고 수도권 4선의 안전한 길 대신 대구 출마를 선언했을 때만 해도 “신선하지만 무모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그는 “군포에서 4선을 하면 그건 월급쟁이”라며 친박근혜계 핵심인 이한구 의원(대구 수성갑)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대구에서 자라고 대구초·대구중·경북고·서울대를 졸업해 ‘정통 티케이(TK)’로서의 ‘스펙’을 갖춘 그였지만 대구는 ‘기호 2번’을 호소하는 야당 정치인에게 섣불리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러나 40.4%(2012년 총선), 40.3%(2014년 지방선거)라는 득표율은 그에게 재도전의 희망을 심어준 응원의 숫자이기도 했다.
운동권 출신으로 한나라당에 몸담았던 김 후보에게 정치란 늘 ‘비주류’ 또는 ‘경계인’의 길이었다. 1977년 긴급조치 9호 위반, 1980년 신군부의 포고령 위반, 1992년 ‘이선실 간첩사건’ 연루 등으로 세번이나 구속됐던 김 당선자는 1988년 한겨레민주당, 1990년 ‘꼬마민주당’, 1996년 ‘통합민주당’ 등을 거쳐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선배 제정구 전 의원과 함께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한나라당 내 소장파 그룹인 ‘미래연대’를 이끌며 보수정당 쇄신을 주장했던 그는 2003년 대북송금사건 특검법안에 여당으로선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지며 ‘이단아’로 낙인찍혔다. 같은 해 7월 한나라당을 탈당해 11월 열린우리당 창당에 함께한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이 대통합민주신당, 통합민주당, 민주통합당으로 숨가쁘게 간판을 바꿔 달며 여당에서 야당으로 바뀌는 사이, ‘타협의 정치’를 외쳐온 그에겐 ‘한나라당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늘 따라다녔다. 2009년, 2010년 원내대표 선거에서 잇따라 낙선한 것은 그가 온전히 당에 뿌리내리지 못했던 현실을 보여준다. 비록 2012년 전당대회에서 최고위원으로 선출됐지만 그가 한나라당 딱지를 완전히 뗀 건 대구행을 선택하고 나서였다.
김 후보는 평소 “상생과 공존의 정치는 나의 일관된 정치철학”이라고 밝혀왔다. 그가 원내에 진입하면 중도 성향의 의원들이 그를 중심으로 뭉쳐 당내 정책과 노선을 결정하는 데 하나의 목소리를 낼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민주당은 또한 당권·대권 주자 예비후보군에 ‘김부겸’이란 이름 하나를 더 올리게 됐다.
이유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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