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도 전 국토통일원 장관
허문도 전 통일원 장관 별세
“그 분(전두환)은 삭풍의 광야에 홀로 선 분이다.”
1988년 11월 국회 문화공보위 언론통폐합 청문회. 허문도 전 국토통일원 장관은 ‘아직도 전두환씨를 난세를 치세로 바꾼 영웅으로 보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자신을 독일 나치 히틀러의 선전상인 ‘괴벨스’에 비유할 때는 “허무맹랑한 얘기”라며 맞섰다.
‘5공의 괴벨스’라는 평가를 받았던 허문도씨가 지난 5일 오전 사망했다. 향년 76. 전두환 정권 시절 허삼수·허화평씨와 함께 ‘스리(3) 허’로 불리며 5공 실세 중 한명으로 거론됐다. 그는 1980년 언론통폐합과 언론인해직, 이듬해 5·18 광주민주항쟁 1주기를 덮기 위한 대규모 관제행사인 ‘국풍 81’ 등을 기획하고 실행에 옮긴 주역으로 꼽힌다.
그는 1940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서울대 농대를 나와 1964년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일본 도쿄특파원 등을 거친 뒤 1979년 주일대사관 공보관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권력의 길로 들어선다. 1979년 12·12 사태 뒤 중앙정보부 특별보좌관(중앙정보부장 비서실장), 전두환 신군부의 국보위 문화공보위원으로 자리를 옮긴 뒤, 청와대 공보비서, 정무수석을 맡아 언론과 정치권에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다. 1986년부터 5공이 끝날 때까지 국토통일원 장관을 맡았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를 보면, 허씨는 신군부가 언론계를 길들이기 위해 펼친 ‘케이(K)-공작계획’과 이어진 언론사 통폐합 등에 깊이 관여했다. 당시 신문·방송·통신 64개 매체가 18개로 통폐합됐다. 언론자율정화 명목으로 900여명, 통폐합 과정에서 300여명 등 1200여명의 언론인이 해직됐다. 허씨는 “당시 사이비기자 척결, 언론과 재벌의 분리, 방송의 공영화가 언론개혁의 목표였다”고 주장했다.
허씨는 5공 청문회가 시작되자 일본으로 도피했다가 한 달여만에 귀국했다. 검찰의 무혐의 처분으로 언론인 해직 등과 관련해 아무런 형사처벌도 받지 않았다.
빈소는 분당서울대병원, 발인은 8일 오전 6시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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