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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사형수 부인 이희호’ 독대하며 바지 걷어 다리 긁적인 전두환

등록 2016-02-28 20:14수정 2017-01-09 10:48

1982년 2월 이희호가 전두환을 만난 뒤 김대중은 ‘무기’에서 ‘20년’으로 감형됐을 뿐 석방 기약은 없었다. 그해 5월 이희호는 유학했던 미국 미주리주 스캐릿대학에서 사회공헌 동문에게 주는 ‘탑상’ 수상자로 선정됐으나 시상식에 갈 수 없었다. 사진은 미국 망명 중이던 83년 5월 뒤늦게 상을 받고 재학시절 룸메이트 이모진 조이너(왼쪽)와 함께한 모습.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1982년 2월 이희호가 전두환을 만난 뒤 김대중은 ‘무기’에서 ‘20년’으로 감형됐을 뿐 석방 기약은 없었다. 그해 5월 이희호는 유학했던 미국 미주리주 스캐릿대학에서 사회공헌 동문에게 주는 ‘탑상’ 수상자로 선정됐으나 시상식에 갈 수 없었다. 사진은 미국 망명 중이던 83년 5월 뒤늦게 상을 받고 재학시절 룸메이트 이모진 조이너(왼쪽)와 함께한 모습.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길을 찾아서] ‘고난의 길, 신념의 길’ 이희호 평전
제4부 제5공화국-11회 옥중서신 (하)

이희호 평전 이전 글 보기

1982년 2월 이희호를 만난 전두환은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스스럼없이 이야기했다. “이 얘기 저 얘기 끝이 없었어요. 자기가 사형시키려고 했던 사람의 안사람을 만났는데, 동네 복덕방 아저씨가 아주머니 대하듯이 거리낌이 없었어요. 이야기하다 말고 바지 자락을 올리고 다리를 긁적거리기도 하고요.” 이희호는 전두환을 만난 김에 하고 싶은 말을 했다. “남편을 석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건 나 혼자서 결정을 못합니다. 다른 사람들도 있고 해서 석방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나아질 것입니다.” 이 세 마디가 본론의 전부였다.

“전두환 대통령이 ‘우리나라는 아주 정의롭고 자유롭다’고 말하기에 그렇지 않다는 뜻으로 큰오빠 얘기를 했어요. 큰오빠가 미국에 있는 아들의 초청을 받고 여권 발급을 신청했는데 몇 달이 지나도록 나오지 않아 마음고생이 많았어요. 그래서 그 이야기를 꺼냈더니 그 뒤에 여권을 내주었어요. 큰오빠는 외삼촌과 한국증권을 설립해 경영하고 1968년부터 증권협회 회장도 지냈는데, 1971년 대통령선거 때 우리 때문에 그만둔 뒤로 어려움을 겪었지요.”

1982년 2월 “남편 석방” 요구에
전두환은 세 마디로 답했다.
“혼자 결정 못해·석방 불가·나아질 것”
3월1일 김대중은 ‘20년형’으로 줄었다

5공화국 억압정치는 날로 살기등등
82년 3월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
‘광주학살 용인’에 반미 구호 등장
우 순경 난동·장영자 사건 ‘흉흉’

모교 스캐릿대학 ‘탑상’ 선정 소식
시상식 갈 수 없자 대학에서 서신만
“당신과 우리 가족위해 기도한대요”
결혼 20돌 맞이도 옥중 편지로

70년대부터 남편의 옥바라지를 하며 서예로 마음을 다스린 이희호의 붓글씨는 활력이 넘쳐 양심수 후원 등 사회운동단체 모금 바자회에서 인기를 모았다. 사진은 즐겨 쓴 ‘경천애인’으로 낙관의 ‘수송’은 이희호의 호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70년대부터 남편의 옥바라지를 하며 서예로 마음을 다스린 이희호의 붓글씨는 활력이 넘쳐 양심수 후원 등 사회운동단체 모금 바자회에서 인기를 모았다. 사진은 즐겨 쓴 ‘경천애인’으로 낙관의 ‘수송’은 이희호의 호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전두환을 만나고 나오니 저녁 8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두 시간 남짓한 만남이었다. “구체적인 얘기가 없었지만 삼일절에 특사로 석방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했어요. 그래서 남편을 면회할 때 머리부터 살펴봤지요. 석방할 즈음엔 머리를 길게 한다는데 빡빡 깎아 놓아 석방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어요.” 김대중은 1982년 3월1일 무기에서 20년으로 감형되었다. “남편의 나이로 보면 20년을 감옥에서 보낸다면 무기나 다름없어 몹시 실망했지요. 공연히 대통령을 만났다는 후회가 들기도 했어요.” 김대중은 나오지 못했지만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돼 구속된 예춘호·김종완이 형집행정지로 석방됐다.

이희호가 김대중 옥바라지를 하는 동안 바깥세상은 제5공화국의 살기등등한 억압이 계속됐다. 1981년 9월 부산에서 ‘부림사건’이 일어났다. 부림사건은 부산 지역 ‘사회과학 독서모임’ 청년 학생 19명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사건이었다. 공포 분위기로 정권의 통치기반을 다지려고 꾸며낸 조작사건이었다. 영문도 모른 채 잡혀간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로 몰려 무서운 고문을 당했다. 구속자 가족들은 끌려간 사람들이 당한 고문을 이렇게 증언했다. “고문 중에서도 제일 끔찍했던 고문이 ‘통닭구이’라는 것이었는데, (…) 이 ‘통닭구이’로 발톱이 다 빠져 달아났고 온몸은 가지처럼 보랏빛으로 변해 있었으며 제대로 걷지도 못해 무릎으로 엉금엉금 기어야 했다.” 부산의 조세 전문 변호사였던 노무현은 이 고문 피해자들의 변호를 맡은 것이 계기가 돼 인권변호사로 거듭났다.

그런 공포의 암흑 속에서도 반독재 민주화 운동은 조금씩 움터 올랐다. 1982년 3월18일에는 부산의 미국문화원이 불에 타는 사건이 벌어졌다. 1980년 12월9일 밤 광주의 미국문화원에 불이 난 뒤로 15개월 만에 다시 일어난, 미국을 겨냥한 방화사건이었다.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의 사회적 파장은 컸다. 불을 지른 부산 고려신학대 학생들은 ‘미국은 한국을 속국으로 만들지 말고 이 땅에서 물러가라’는 제목의 성명 전단지 수백 장을 뿌렸다. 이 성명은 미국이 군부정권을 지원하여 민족분단을 고착화시켰다고 비판하고 “이 땅에 판치는 미국 세력의 완전한 배제를 위한 반미투쟁을 끊임없이 전개하자”고 호소했다. 학생운동에 처음으로 반미 구호가 등장한 사건이었다.

82년 4월25일 ‘정치적 후견인’ 정일형 박사의 별세 소식을 전해들은 김대중은 감방에서 홀로 울었다. 사진은 4월27일 사회장을 거쳐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서 안장식을 지켜보고 있는 고인의 부인 이태영(왼쪽 세째부터) 박사와 아들 정대철·김덕진 부부. 정호진 의원실 제공
82년 4월25일 ‘정치적 후견인’ 정일형 박사의 별세 소식을 전해들은 김대중은 감방에서 홀로 울었다. 사진은 4월27일 사회장을 거쳐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서 안장식을 지켜보고 있는 고인의 부인 이태영(왼쪽 세째부터) 박사와 아들 정대철·김덕진 부부. 정호진 의원실 제공
4월1일 주동자 문부식이 자수하고 이어 여러 사람이 전단지 살포 혐의로 붙잡혀 구속됐다.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는 미국이 광주학살을 저지하지 않고 군사독재를 용인했다는 사실을 들어 미국의 책임을 추궁한 사건이었다. 미국을 영원한 우방이라고만 생각했던 국민에게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은 일대 충격을 주었다. 이 사건으로 광주학살은 지역적인 문제를 넘어 전국적인 차원의 문제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또 이 사건 이후 민족자주성이 학생운동의 핵심의제로 등장했다.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이 난 직후인 3월27일 프로야구가 개막했다. 프로야구는 국민의 관심을 비정치적인 곳으로 돌리려는 전두환 정권의 정치적 결단이 만든 작품이었다. 지역연고제를 채택한 프로야구는 광주학살의 피 냄새를 잊지 못하는 호남 사람들에게는 한을 불태우는 마당이 됐다. 야구장에 모인 호남 사람들은 <목포의 눈물>을 목이 터지도록 불렀다.

4월26일에는 경남 의령에서 경찰관 총기난동 사건이 벌어졌다. 의령경찰서 순경 우범곤이 동거녀와 다투다 실탄과 카빈총을 탈취해 인근 마을 네 곳을 돌며 주민 56명을 사살했다. 민심이 흉흉해졌다. 이어 5월에는 ‘단군 이래 최대 금융사기 사건’이라는 장영자·이철희 사건이 터졌다. 장영자의 형부 이규광은 전두환의 부인 이순자의 삼촌이었고 장영자의 남편 이철희는 중앙정보부 차장 출신이었다. 장영자는 권력의 그림자를 등에 업고 7000억원이 넘는 약속어음 사기사건을 저질렀다. 이 일로 장영자·이철희·이규광을 포함해 30여명이 구속됐고, 일신제강과 공영토건은 부도를 맞았다. 전두환의 제5공화국이 내건 ‘정의사회 구현’ 슬로건이 웃음거리가 됐다.

그해 4월25일 정일형이 세상을 떠났다. 김대중이 정치에 입문한 뒤로 아버지처럼 이끌어주었고,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는 와병 중에도 김대중을 살리려고 애를 쓴 사람이었다. 이희호는 4월27일 편지에서 정일형의 장례를 알렸다. “오늘 정 박사 사회장은 국립극장에서 거행됐고 정부가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습니다. 고인의 유해는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에 안장했습니다.” 김대중은 감방에서 눈물을 흘렸다.

1980년 ‘내란음모 조작 사건’으로 2년 반 남짓한 수감생활 동안 ‘사형수 김대중’이 써보낸 엽서 편지는 훗날 국내외에서 책으로 묶여 나와 널리 읽혔다. 83년 7월 미국 갈릴리문고에서 처음 출판된 ‘옥중서신 민족의 한을 안고’는 희귀본으로 고가에 거래될 정도다.(위 왼쪽부터 시계방향) 와다 하루키 교수 등이 공동번역한 일어판 ‘김대중 옥중서간’, 84년 국내에서 나온 ‘김대중 옥중서신’(청사 펴냄), 데이비드 매캔 교수 등이 번역해 낸 영문판 ‘프리즌 라이팅스’의 표지.  ‘한겨레‘ 자료사진
1980년 ‘내란음모 조작 사건’으로 2년 반 남짓한 수감생활 동안 ‘사형수 김대중’이 써보낸 엽서 편지는 훗날 국내외에서 책으로 묶여 나와 널리 읽혔다. 83년 7월 미국 갈릴리문고에서 처음 출판된 ‘옥중서신 민족의 한을 안고’는 희귀본으로 고가에 거래될 정도다.(위 왼쪽부터 시계방향) 와다 하루키 교수 등이 공동번역한 일어판 ‘김대중 옥중서간’, 84년 국내에서 나온 ‘김대중 옥중서신’(청사 펴냄), 데이비드 매캔 교수 등이 번역해 낸 영문판 ‘프리즌 라이팅스’의 표지. ‘한겨레‘ 자료사진
이희호는 남편을 감옥에 두고 5월10일 결혼 20돌을 맞았다. 이 무렵 이희호가 젊은 시절 유학했던 미국의 스캐릿대학에서 탑상(타워 어워드) 수상자로 이희호를 선정했다. 사회적 공헌을 한 사람에게 주는 상이었다. 수상자로 결정됐지만 상을 받으러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희호는 6월2일 남편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내 모교 스캐릿대학교에서 오늘 편지가 왔는데, 내가 앞으로 그곳에 가거나 아니면 학장 또는 그 학교의 대표가 서울에 올 때 (탑상을) 내게 주겠다는 것과 나와 당신과 우리 가족과 우리나라를 위해 기도를 드린다는 것을 알기 바란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희호는 남편과 함께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중에 뒤늦게 상을 받았다.

김대중이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이희호는 틈나는 대로 집에서 서예 연습을 했다. 서예는 마음을 다스리는 방편으로 시작했으나 뒤에는 사회운동단체의 모금활동을 돕는 데 요긴하게 쓰였다. 이희호는 1982년 9월14일 편지에서 그런 사실을 전했다. “오늘 한국기독교장로회 여신도회 전국연합회 인권위원회 주최로 ‘고난받고 있는 이웃을 위한 바자회’가 열렸습니다. (…) 내 글씨를 달라 해서 급히 몇 장을 써서 오늘 다른 분들의 것과 같이 바자회에 내놓았더니 의외로 내 것이 먼저 나가 여러 점이 매진됐습니다. 내 부족한 글이 고난받는 이웃을 돕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했습니다.” 이희호의 붓글씨는 활력이 있어서 사람들이 좋아했다.

김대중은 심혈을 기울여 한 달에 한 번 봉함엽서에 편지를 썼다. “쓰고 싶은 것이 많아 아무리 글자를 줄여도 언제나 다 못 쓰는 안타까움이 남습니다.”(1982년 2월23일 편지) 손바닥보다 조금 큰 엽서에 200자 원고지 100장에 이르는 글이 담겼다. 이희호는 감옥에서 온 편지를 읽고 남편의 건강을 확인했다. “당신의 건강을 염려하다가도 깨알같이 적은 편지를 보면 일단 안심을 해봅니다. 우리는 그렇게 쓰지도 못하지만 읽기도 힘이 드는데 그렇게 쓰시기에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상상조차 하기 힘듭니다.”(1982년 2월27일 편지)

편지 한 장은 논문 한 편이나 다를 바 없었다. 김대중은 1982년 2월23일치에서 조선왕조의 폐쇄성과 편협성을 비판했다. “조선왕조 지배자의 정신구조는 놀라울 정도의 폐쇄성으로 일관했습니다. 그들은 건국하자마자 정신적으로 완전한 배타주의의 길을 질주하더니 망국의 그날까지 계속했습니다.” 김대중은 불교 탄압, 사색당쟁, 세도정치의 폐해를 서술하고 이렇게 썼다. “그들은 서로 일체의 사교적 접촉이나 통혼을 끊었으며 관혼상제의 애경 방문조차 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 대화도 없고 관용도 없고 공존도 없는 삭막하고 황량한 정신풍토를 그들은 형성하고, 그 안에 마치 조개같이 파묻혀 증오와 불신과 음모의 세월을 보냈던 것입니다. (…)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불행의 현상이 있다면 이러한 조선왕조로부터 물려받은 정신적 악의 유산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점일 것입니다.”

김대중은 영국이 근대사를 겪으며 성취한 관용의 정신에 주목했다. “(찰스 1세 처형과 크롬웰의 독재라는) 쓰라린 체험으로 큰 반성을 한 영국민은 1688년 명예혁명에서 다시 찰스 1세의 왕권지상주의 노선을 답습한 그의 둘째아들 제임스 2세를 국왕의 자리에서 축출할 때는 그가 변장을 하고 프랑스로 도망갈 수 있도록 은근히 도와주었다고 합니다. (…) 관용·대화·이해·공존 등 영국 민주주의가 창조한 미덕은 찰스 1세 처형이라는 뼈저린 체험을 통해서 얻어진 것이라 합니다.”(1982년 3월25일 편지)

김대중은 편지에서 자신의 민중관도 이야기했다. “선진 국가에서 민중들은 종래의 그 예속적이고 피착취적인 지위를 자신의 힘으로 탈피해 정치·경제·문화 각 분야의 한 주체로서 자본가와 대등한 자리를 착실히 다져오고 있습니다. 노동당이나 사회민주당이 집권정당으로서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 보편적 현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20세기는 민중의 역사상, 아니 인류의 역사상 획기적인 세기라 할 것입니다. 학자에 따라서는 이런 산업국가의 민중을 구별해서 대중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나도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 운명의 주체세력인 민중이 주인으로 대접받고 자기 운명을 스스로 지배하는 자리에 서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1982년 8월25일 편지)

교도소 담장을 사이에 두고 떨어진 부부는 편지로 토론을 주고받기도 했다. 김대중은 1982년 11월26일 편지 말미에 이런 단상을 써 보냈다. “‘사위는 쳐다보고 며느리는 내려다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우리 조상들의 깊은 지혜를 담은 말이다. 상류층과 하류층 간의 혼인으로 계층 이동을 통해서 우리는 생활 경험의 교환, 건강한 피의 교류 위에 국민적 단결의 사회를 이룰 수 있다. 가정적으로 낮은 계층에서 얻은 며느리나 아내야말로 집안을 견실하게 가꾸며 남편의 성실한 반려가 될 것이다.” 이 편지를 받고 이희호는 남편의 주장에 담긴 약점을 지적하는 답장을 썼다. “‘사위는 치보고 며느리는 내려보라’는 말을 우리 조상의 지혜가 담긴 말이라고 보았는데 상류층과 하류층 간의 혼인으로 교류를 한다는 점은 좋은 일로 생각되나 결국 시집가는 딸, 시집오는 며느리는 내리 보입니다. 여자를 하류층에서 데려와야 남편 쪽에 더 쩔쩔매고 맹종한다는 조상들의 생각은 여자를 천하게 다루는 데서 연유한 것이 틀림없을 것입니다.”(1982년 12월2일 편지) 편지토론은 두 사람의 마음에 조금이나마 숨 쉴 틈이 생겼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김대중은 1982년 7월27일 편지에서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는 글을 썼다. “나의 일생은 한의 일생이었습니다. 얼마나 수많은 한이 굽이굽이 맺힌 인생이었던가요? 한 속에서 슬퍼하고, 되씹고, 딛고 일어서고 하는 생의 연속이었습니다. 고난 속에서 배우고, 가능성을 발견하고, 잡초같이 자라는 것이 인생이며 하느님의 섭리라는 것을 되새겨봅니다. 그뿐 아니라 나는 그간 거쳐 온 대결의 생활 속에서도 누구 한 사람 길에서 만난다 하더라도 외면해야 할 사람이 없으며 누구 하나 용서하지 못할 정도로 증오하는 사람이 없음을 감사해합니다.” 이 글은 감옥 안에서 이룬 김대중의 내적인 승리를 보여주었다. 이희호는 이 편지를 받고 쓴 답장(1982년 8월3일)에서 “어느 누구보다 더 큰 한과 더 큰 고난, 치욕의 쓰림과 저림을 몸소 체험”했으므로 “하느님의 사랑의 손길이 당신을 크게 축복해주실 것”이라고 위로했다.

“남편은 감옥 안에서 모두 29통의 편지를 썼어요. 편지지를 주지 않으니 봉함엽서 앞뒤로 빽빽하게 글씨를 썼는데, 너무 작아서 돋보기를 대야만 읽을 수 있었어요. 엽서 한 장에 원고지 102장 분량이 들어간 것도 있었어요. 그 편지를 받으면 복사해서 구속자 가족들이나 동교동 식구들과 돌려 읽었지요.” 김대중이 보낸 편지는 1983년 미국에서 <민족의 한을 안고>라는 제목으로 출간됐고 이어 일어판과 영문판으로 출간됐다. 일어판은 도쿄대 교수 와다 하루키를 비롯해 여러 사람이 함께 번역했고, 영문판은 하버드대 교수 데이비드 매캔과 재미 정치학자 최성일이 옮겼다.

영문판 서문에서 매캔은 이렇게 말했다. “이 ‘옥중서신’들은 자신을 파괴하려는 온갖 수단에 꿋꿋하게 맞서는 한 인간의 뛰어난 의지력을 보여주고 있다. 극한의 비인간적인 상황 속에서도 끈질기게 인간의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정신의 놀라운 증거가 아닐 수 없다.” 김대중의 편지들은 1984년 <김대중 옥중서신>이란 이름으로 국내에 출간됐다. 이 책이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가자 경찰은 서점에 깔린 책을 압수하고 베스트셀러 집계에서 책을 제외하도록 압력을 넣었고, 출판사 사장을 유치장에 잡아넣기도 했다.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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