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대통령 직권상정 압박
정 의장 “직권상정하면 성을 바꾼다”
전문가 “대통령 타협 나서야 해결”
정 의장 “직권상정하면 성을 바꾼다”
전문가 “대통령 타협 나서야 해결”
“국회법이 바뀌지 않는 한 (직권상정 불가 방침은) 변할 수가 없다. 내가 성을 바꾸든지….”
정의화 국회의장은 17일로 나흘째 자신에게 쏟아지는 청와대와 새누리당의 쟁점법안 직권상정 요구에 대한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이렇게 답했다. ‘차라리 성을 바꾸겠다’며 농담처럼 말했지만, 국회법의 직권상정 대상이 아닌데도 자신을 계속 압박하는 당청을 향해 ‘소용없다’며 쐐기를 박은 것이다.
국회선진화법이라 불리는 국회법 제85조는 △천재지변 △전시·사변·국가비상사태 △여야 원내대표 합의가 있을 때로 직권상정 요건을 제한하고 있다. 해석의 여지가 없는 명확한 규정이지만, 청와대와 여당은 “경제위기와 대량실업, 테러가 몰려오는 국가비상사태”라고 주장하며 국회의장의 권한행사를 윽박지르는 형국이다.
하지만 새누리당 안에서도 현재 상황이 ‘국가비상사태’가 아닌데도 국회의장에게 국회법을 어기라고 압박하고, 발동 요건이 안 되는 쟁점법안 처리를 이유로 ‘긴급재정경제명령 검토’까지 언급하고 나선 것은 지나치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재선 의원은 “솔직히 지금의 경제상황을 비상사태로 볼 수는 없다”고 했다. 김종석 여의도연구원 원장도 이날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1997년의 외환위기 가능성은 매우 낮지만 실물로부터 오는 다른 차원의 위기 가능성이 점진하고 있다”고 했다. ‘현존하는 명백한 위기’는 아니라는 설명이다.
청와대는 거듭 부인하지만 여당 내부에서 검토 가능성이 제기되는 헌법(제76조)의 ‘대통령 긴급재정명령’ 역시 ‘내우·외환·천재·지변 또는 중대한 재정·경제상의 위기’를 발동 요건으로 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중대한 재정·경제상의 위기에 대해 헌법재판소 판례는 ‘현존하는 위기’로 못박았다. 게다가 헌법 조문은 대통령보다 국회를 앞에 두고 있다. 헌법적 중요성이 더 크다는 의미다. 헌법(제40조)은 ‘입법권은 국회에 속한다’고 규정한다.
야당과 합의가 있으면 노동 5법과 기업활력제고특별법, 테러방지법 등 대통령 관심법안의 직권상정이 가능하다. 최근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등 야당 지도부가 내용 수정을 전제로 경제 관련 법안들의 협상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지만, 노동자들의 지위와 신분, 시민 기본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노동관계법과 테러방지법은 노동계와 시민·인권단체 등이 강력 반발하고 있어 심도 깊은 논의나 핵심 내용 수정 없이는 야당이 도저히 합의해줄 수 없는 상황이다.
이런데도 ‘내부자들’을 앞세운 박근혜 대통령의 말폭탄은 연일 국회의장과 국회로 쏟아지고 있다. 정연국 청와대 대변인은 이날 “주요 쟁점법안에 대한 여야의 합의가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비정상적인 국회 상태를 정상화시킬 책무가 (국회의장에게) 있다”고 몰아세웠다. 이에 대해 새누리당의 다른 재선 의원은 “국회선진화법이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입법부의 수장이 국회가 만든 법을 어길 수는 없다. 여당 역시 상임위에서 야당을 만나 협상을 통해 문제를 풀어야 하는데 엉뚱하게 국회의장만 몰아세우고 있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대통령의 진정성을 인정받기 위해서라도 야당을 국정의 한 축으로 받아들이는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대통령 스스로 닫아버린 타협의 공간을 열겠다는 신호를 보내야 막힌 정국을 풀 수 있다는 것이다. 윤희웅 오피니언라이브 여론분석센터장은 “대통령에게 진정성이 있다는 것을 알겠지만, 청와대가 야당과의 협상 절차를 건너뛰고 국회의장에게 법안 처리만을 요구하는 것은 잘못됐다. 대통령이 정말로 시급하다고 판단하는 법안을 분리해 선제 처리하는 식으로 야당에 협상 여지를 주거나, 법안의 일부 변경 가능성 등 타협 여지를 줘야 야당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올 수 있다”고 했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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