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래 전 의원
이강래 전 의원이 전하는 YS와 DJ관계
“두 사람 사이엔 평범한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든 각별함이 있었다.”
‘동교동 비서’ 출신으로 김대중 정부에서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낸 이강래 전 의원이 회고하는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의 관계다. 이 전 의원은 24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차례로 대통령에 오른 ‘양김’ 사이의 애틋함을 보여주는 일화 몇가지를 풀어놨다.
1997년 대선 레이스 도중
DJ비자금 의혹 불거져 초긴장
당시 청 특보 “안심하라” 답변
“YS, 대선서 중립지키려 애써” 현철씨 사면 늦어지며 실랑이
당시 법무부가 완강히 반대
“양김 관계 결정적으로 틀어져” 2009년 8월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당시 ‘1호 조문객’이 김영삼 전 대통령이었다고 한다. 당시 민주당 원내대표였던 이 전 의원은 “서거 소식을 듣고 신촌세브란스병원으로 갔더니 빈소도 차려지기 전이었는데, 김영삼 전 대통령이 왔다”며 “빈소가 차려져 가족들이 먼저 분향하고 권노갑 고문 등 동교동 비서진들이 분향하려는데 김 전 대통령이 ‘미안하지만 내가 먼저 하자’며 양해를 구하더니 조문을 하고 가셨다”고 말했다. 이 전 의원은 “뉴스를 듣자마자 곧바로 병원으로 달려오신 것”이라며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두 분의 관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고 회상했다. 이 전 의원은 1997년 대선 레이스 도중 ‘김대중(DJ) 비자금 의혹’이 불거졌던 상황도 떠올렸다. 김영삼 정부 말기의 일이다. 이 전 의원은 “비자금 의혹의 최초 유포자가 청와대 사정비서관으로 지목되면서 캠프 전체가 초긴장 상태였다”며 “내가 친분이 두터웠던 김광일 당시 청와대 정무특보한테 연락했더니 ‘절대 와이에스(YS) 뜻이 아니다. 안심하라’는 답이 돌아왔다”고 말했다. 뒤이어 ‘이강래-김광일 라인’이 가동됐고, 양김의 ‘영수회담’이 성사됐다. 비자금 수사도 중단됐다. 이 전 의원은 “청와대에서 돌아온 디제이가 굉장히 안도하더라. 배석자가 없을 때 두 분이 따로 깊은 얘기를 나눈 것 같았다”고 전했다. 당시 집권당의 대선 후보는 이회창이었다. 이강래 전 의원은 “와이에스는 대선 때 나름대로 중립을 지키려고 애썼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김대중 정부 출범 직후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의 사면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골이 깊어졌다. 현철씨는 당시 한보 비자금 사건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상태였는데, 와이에스는 ‘즉시 사면’을 기대했지만 디제이는 ‘법 절차’를 고민했다. 이 전 의원은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나 김태정 검찰총장은 현철씨를 사면해주려 했는데, 박상천 법무장관이 완강하게 반대했다”며 “이런 상황을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전했더니 ‘대통령이 마음먹으면 하는 거지, 법무장관이 다 뭐꼬?’ 하고는 역정을 내셨다. 안타까웠다”고 돌이켰다. 현철씨 사면은 1년 뒤인 1999년 8·15 특사에 이뤄졌다. 이 전 의원은 “양김 관계가 결정적으로 틀어진 계기가 됐다”고 안타까워했다. 1996년 김대중 총재가 이끌던 새정치국민회의가 총선에서 참패한 뒤 와이에스의 제안으로 전격 성사된 청와대 영수회담도 화제에 올랐다. 이 전 의원은 “당시 새정치국민회의는 100석이 목표였는데 79석밖에 못 얻어 디제이가 당 안팎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때 청와대에서 영수회담 제의가 왔다. 디제이에겐 구원의 동아줄 같았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정치적으로 경쟁하는 관계라고 해도, 상대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보이지 않는 도움의 손길을 건네는 ‘스케일 큰 정치’가 김영삼 정치의 미덕이었다는 것이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관련 영상] YS 서거 특집, 민주의의의 길을 묻다
DJ비자금 의혹 불거져 초긴장
당시 청 특보 “안심하라” 답변
“YS, 대선서 중립지키려 애써” 현철씨 사면 늦어지며 실랑이
당시 법무부가 완강히 반대
“양김 관계 결정적으로 틀어져” 2009년 8월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당시 ‘1호 조문객’이 김영삼 전 대통령이었다고 한다. 당시 민주당 원내대표였던 이 전 의원은 “서거 소식을 듣고 신촌세브란스병원으로 갔더니 빈소도 차려지기 전이었는데, 김영삼 전 대통령이 왔다”며 “빈소가 차려져 가족들이 먼저 분향하고 권노갑 고문 등 동교동 비서진들이 분향하려는데 김 전 대통령이 ‘미안하지만 내가 먼저 하자’며 양해를 구하더니 조문을 하고 가셨다”고 말했다. 이 전 의원은 “뉴스를 듣자마자 곧바로 병원으로 달려오신 것”이라며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두 분의 관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고 회상했다. 이 전 의원은 1997년 대선 레이스 도중 ‘김대중(DJ) 비자금 의혹’이 불거졌던 상황도 떠올렸다. 김영삼 정부 말기의 일이다. 이 전 의원은 “비자금 의혹의 최초 유포자가 청와대 사정비서관으로 지목되면서 캠프 전체가 초긴장 상태였다”며 “내가 친분이 두터웠던 김광일 당시 청와대 정무특보한테 연락했더니 ‘절대 와이에스(YS) 뜻이 아니다. 안심하라’는 답이 돌아왔다”고 말했다. 뒤이어 ‘이강래-김광일 라인’이 가동됐고, 양김의 ‘영수회담’이 성사됐다. 비자금 수사도 중단됐다. 이 전 의원은 “청와대에서 돌아온 디제이가 굉장히 안도하더라. 배석자가 없을 때 두 분이 따로 깊은 얘기를 나눈 것 같았다”고 전했다. 당시 집권당의 대선 후보는 이회창이었다. 이강래 전 의원은 “와이에스는 대선 때 나름대로 중립을 지키려고 애썼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김대중 정부 출범 직후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의 사면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골이 깊어졌다. 현철씨는 당시 한보 비자금 사건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상태였는데, 와이에스는 ‘즉시 사면’을 기대했지만 디제이는 ‘법 절차’를 고민했다. 이 전 의원은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나 김태정 검찰총장은 현철씨를 사면해주려 했는데, 박상천 법무장관이 완강하게 반대했다”며 “이런 상황을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전했더니 ‘대통령이 마음먹으면 하는 거지, 법무장관이 다 뭐꼬?’ 하고는 역정을 내셨다. 안타까웠다”고 돌이켰다. 현철씨 사면은 1년 뒤인 1999년 8·15 특사에 이뤄졌다. 이 전 의원은 “양김 관계가 결정적으로 틀어진 계기가 됐다”고 안타까워했다. 1996년 김대중 총재가 이끌던 새정치국민회의가 총선에서 참패한 뒤 와이에스의 제안으로 전격 성사된 청와대 영수회담도 화제에 올랐다. 이 전 의원은 “당시 새정치국민회의는 100석이 목표였는데 79석밖에 못 얻어 디제이가 당 안팎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때 청와대에서 영수회담 제의가 왔다. 디제이에겐 구원의 동아줄 같았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정치적으로 경쟁하는 관계라고 해도, 상대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보이지 않는 도움의 손길을 건네는 ‘스케일 큰 정치’가 김영삼 정치의 미덕이었다는 것이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관련 영상] YS 서거 특집, 민주의의의 길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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