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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40대 대통령은 이르지 않을까요?”…하지만 도울 일을 찾았다

등록 2015-07-26 23:59수정 2017-01-09 10:19

1969년 7월19일 ‘3선개헌 반대 범국민투쟁위’가 서울 효창운동장에서 개최한 시국 대연설회에서 김대중은 ‘독재자 박정희의 말로’를 경고하는 명연설을 한다. 이희호도 이날 현장에서 남편이 밤새워 준비한 ‘15분짜리 연설’로 수십만 군중의 열광을 이끌어내는 장면을 지켜봤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69년 7월19일 ‘3선개헌 반대 범국민투쟁위’가 서울 효창운동장에서 개최한 시국 대연설회에서 김대중은 ‘독재자 박정희의 말로’를 경고하는 명연설을 한다. 이희호도 이날 현장에서 남편이 밤새워 준비한 ‘15분짜리 연설’로 수십만 군중의 열광을 이끌어내는 장면을 지켜봤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길을 찾아서 | 이희호 평전]
제2부 만남과 동행-9회 40대 기수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의 일생을 그리는 ‘이희호 평전-고난의 길, 신념의 길’은 <한겨레>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 19번째 이야기다.

이 이사장이 걸어온 길은 20세기 초 일제강점기부터 21세기 지금에 이르기까지 90여년에 걸쳐 있다. 이 일대기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해방 전후 대학 시절과 미국 유학, 사회운동 시절을 거쳐 정치인 김대중과 만난 뒤 현대사의 파란과 굴곡을 헤쳐 나오는 시기를 모두 아우를 예정이다. 그의 삶은 일찍이 사회문제에 눈뜬 여성운동가의 삶이었고, 흔들리지 않는 신앙으로 간난신고를 헤쳐 나온 종교인의 삶이었으며, 남편과 함께 불굴의 의지로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투사의 삶이었다. 이 일대기는 매주 한번씩 진행하는 육성 인터뷰를 바탕으로 삼아 김대중평화센터와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에 보관된 개인 문서와 구술 사료, 저서, 관련 책과 지인들의 증언을 참고해 집필한다.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김대중이 경고했던 대로 박정희는 자기가 만든 헌법을 스스로 고쳐 세번째 대통령 출마를 허용하는 ‘삼선개헌’의 시동을 걸었다. 박정희의 영구집권 결심은 오래된 것이었다.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김형욱은 뒷날 회고록에서 1967년 청와대를 찾아갔을 때 박정희가 한 말을 기억했다. 술을 연거푸 들이켜던 박정희는 김형욱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 정권 못 내놔. 절대로!” 박정희는 개헌 공작을 지시했다. 중앙정보부는 박정희의 하수인 노릇을 충실히 했다.

“나, 정권 못 내놔, 절대로!”
1967년 박정희 김형욱에 ‘개헌’ 지시
동백림·통혁당…간첩조작 사건에
청와대 습격사건 등 ‘공안몰이’ 착착

남북 대치는 박정희가 삼선개헌을 밀어붙이는 데 더없이 좋은 구실이 되었다. 1968년 1월21일 ‘무장공비 청와대 습격사건’이 일어났다. 북한에서 보낸 게릴라 31명이 청와대에서 500m 떨어진 곳까지 침투했다. 생포된 김신조는 “박정희의 모가지를 따러 왔다”고 큰소리쳤다. 이틀 뒤인 1월23일엔 미국 첩보함 푸에블로호가 영해 침범으로 북한에 나포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한반도 긴장의 파고가 솟구쳤다. 박정희는 향토예비군을 창설하고 주민등록법을 시행했다. 250만명이 향토예비군에 편입됐고, 18살 이상 모든 국민에게 주민등록증이 발급됐다. 남북 대결이 격해질수록 남과 북 양쪽의 독재체제는 더욱 단단해졌다.

간첩단 사건도 어김없이 등장했다. 1967년 여름에는 ‘동백림 사건’이 나더니 1년 뒤에는 ‘통혁당(통일혁명당) 사건’이 터졌다. 동백림 사건은 중앙정보부의 ‘창작품’이었다. 제7대 국회의원 선거 뒤 야당이 등원거부 투쟁을 벌이자 중앙정보부는 7월8일 동베를린(동백림)을 거점으로 한 대규모 간첩단을 적발했다고 발표했다. 재불 화가 이응노, 재독 작곡가 윤이상을 비롯해 학자·예술가 200여명이 중앙정보부로 잡혀갔다. 윤이상은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유리 재떨이로 뒤통수를 쳐 자살을 기도했다. 윤이상은 흘러나온 피로 자기는 간첩이 아니라고 절규하는 유서를 썼다.

40년 뒤 국가정보원 과거사 위원회(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의 조사로 이 사건은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것임이 밝혀졌지만, 그때는 온 나라가 공포에 떨었다. 김대중이 박정희의 표적이 되어 있을 때였으므로 이희호는 이 사건의 파장이 남편에게 미치지 않기만을 바랐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정말 있어서는 안 되는, 국가가 저지른 끔찍한 범죄였어요.” 1968년 8월 터진 통혁당 사건에서도 육군 중위 신영복을 포함해 여러 젊은이들이 엮여 들어갔다. 중앙정보부는 사건을 부풀리려고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는 사람은 모두 잡아들였다. 간첩단 사건은 그 뒤로도 ‘정권 안보’가 위협받거나 정권의 국면 전환이 필요할 때면 어김없이 나타났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1969년 1월 공화당 의장서리 윤치영이 삼선개헌의 불을 지피는 발언을 했다. 나라 안팎 정세가 강력한 지도자를 요구하고 있는데 급류 한가운데서 말을 갈아탈 수 없다는 이유를 댔다. 박정희는 1월 연두기자회견에서 “헌법을 개정할 필요가 있다 해도 금년 말이나 내년 초쯤 가서 논의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 해 전 청와대에서 신민당 의원 김상현을 만났을 때 박정희는 “만약 내가 삼선개헌을 하려고 한다면 김 의원 당신이 단도를 들고 나에게 덤비시오”라고 큰소리를 쳤다. 그랬던 박정희는 해가 바뀌자 태도를 슬쩍 바꾸었다.

“남편은 때를 놓치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서두르기 시작했어요. 박정희 대통령이 개헌을 할 것이라고 보고 혼자서 전국을 돌면서 개헌에 반대하는 강연을 했지요.” 김대중은 서울·대구·대전·전주·광주·청주 등지를 오가며 당원과 국민을 상대로 해 십여 차례 삼선개헌 반대 연설을 했다. 청중의 반응이 뜨거웠다. “남편이 일찍 반대투쟁에 나선 것은 개헌이 일단 발의되면 되돌리기가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었어요. 개헌안을 내기 전에 국민이 궐기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야당은 1969년 6월5일에야 ‘삼선개헌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한국신학대학 학장을 지낸 기독교장로회 목사 김재준이 위원장을 맡았다.

이듬해 1월 연두회견 ‘3선 개헌’ 포문
김대중, 혼자 전국 돌며 반대운동 시작
7월19일 효창운동장 ‘15분 명연설’
‘개헌하면 제2 이승만 된다’ 경고
“남편은 집에 오지 않고 밤새 준비했다”

7월19일 서울 효창운동장에서 ‘삼선개헌 반대 시국 대연설회’가 열렸다. “남편은 15분짜리 연설문을 작성하느라 집에도 들어오지 않고 새벽까지 작업을 했어요. 그만큼 시국이 엄중했어요. 그날 연설회에 나도 갔는데, 효창운동장이 사람들로 가득했어요. 말로 할 수 없이 많은 인파가 몰렸어요.” 김대중은 운동장이 터져나갈 것처럼 모인 수십만 시민들 앞에서 ‘삼선개헌은 국체의 변혁이다’라는 제하의 연설을 했다. 오래 준비한 그 짧은 연설은 청중의 격렬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연설 마지막에 김대중은 박정희에게 직접 말했다. “박정희씨여! 당신에게 이 나라 민주주의에 대한 일편의 양심이 있으면, 당신에게 국민과 역사를 두려워할 지각이 있으면,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삼선개헌만은 하지 마시오. 만일 당신이 삼선개헌을 했다가는 이 조국과 국민들에게 말할 수 없는 죄악을 가져올 뿐 아니라, 내가 몇 월 며칠 그렇게 된다고 날짜와 시간은 말 못하지만, 박정희씨 당신이 제2의 이승만이 되고 공화당이 제2의 자유당이 된다는 것만은 해가 내일 아침 동쪽에서 뜨는 것보다 더 명백하다는 것을 경고합니다.”

김대중의 예언대로 박정희는 1967년 ‘6·8 총선’ 이후 3선개헌을 몰아붙였고 69년 10월17일 국민투표를 통해 장기집권의 길로 들어섰다. 사진은 69년 7월25일 국민투표 실시 계획을 발표한 박정희가 8월30일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당원들과 ‘3선개헌 추진’ 결의를 다지는 만세 삼창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김대중의 예언대로 박정희는 1967년 ‘6·8 총선’ 이후 3선개헌을 몰아붙였고 69년 10월17일 국민투표를 통해 장기집권의 길로 들어섰다. 사진은 69년 7월25일 국민투표 실시 계획을 발표한 박정희가 8월30일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당원들과 ‘3선개헌 추진’ 결의를 다지는 만세 삼창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김대중의 말을 들을 박정희가 아니었다. 7월25일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 ‘아시아의 안보는 아시아가 해결해야 한다’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다. 한국에서 미군 철수를 예고한 선언이었다. 안보불안이 커졌다. 박정희는 이 국면을 놓치지 않고 이날 “삼선개헌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박정희는 개헌을 지지하지 않으면 불신임으로 간주하고 대통령을 그만두겠다는 말도 했다. 삼선개헌을 대통령 신임과 연계하는 협박 전술이었다. 9월13일 개헌안이 국회 본회의에 회부됐다.

개헌안 상정을 앞두고 야당은 총력전을 펼쳤다. 9월10일 국회 본회의에서 김대중은 삼선개헌의 부당함을 지적하는 연설을 했다. 김대중은 이 연설에서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니 박정희가 계속 집권해야 한다는 여당의 주장이 왜 틀렸는지, 박정희가 왜 강력한 지도자가 아닌지 역설했다. “국민의 민주주의적 역량을 집결하는 사람이 강력한 지도자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과연 강력한 지도자입니까? 국민과 야당의 비판이 두려워서 언론의 자유로운 비판을 봉쇄하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이 어떻게 강력한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까? 국민의 자유로운 투표를 두려워해서 부정선거를 하는 사람이 박정희 대통령 아닙니까? 강력한 지도자는 자기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소신이 있으면 ‘언론은 자유롭게 비판해라. 자유롭게 비판해도 나는 옳은 일을 하고 있으니까 국민의 지지를 받는다’는 자신이 있어야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강력한 지도자가 아닙니다.”

개헌안이 본회의에 상정되자 신민당 의원들은 단상을 점거한 채 무기한 농성을 벌였다. 공화당 의원들은 9월14일 새벽 2시 국회 본회의장을 두고 길 건너편 국회 제3별관에 몰래 모여 개헌안을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의사봉을 준비하지 못한 국회의장 이효상은 주전자 뚜껑으로 책상을 세번 쳤다. 10월17일 삼선개헌 국민투표가 실시됐다. 박정희는 이번에도 관권을 모조리 동원했다. 돈과 밀가루가 온 나라를 덮었다. 박정희가 유권자를 매수하는 데 쓴 돈은 1500만달러(물가지수 감안한 현재가치로 983억원)에 이르렀다. 그렇게 돈을 쏟아붓고 관권이 설쳤는데도 투표율 77.1%, 찬성률 65.1%에 그쳤다. 박정희는 세번째 출마를 막는 장애물을 억지를 부려 치웠다.

1969년 말 3선개헌 반대 투쟁에 실패하면서 신민당에서는 세대교체 바람을 타고 ‘40대 기수’가 떠올랐다. 70년 1월 김대중도 ‘7대 대선’에 출사표를 던지며 합류했다. 사진은 그해 9월 신민당 후보 지명대회를 앞두고 총재 유진산 자택에 모인 40대 기수 3명과 중진들로, 왼쪽부터 김영삼·조영규·고흥문·서범석·김대중·이철승·홍익표 의원.   자료사진
1969년 말 3선개헌 반대 투쟁에 실패하면서 신민당에서는 세대교체 바람을 타고 ‘40대 기수’가 떠올랐다. 70년 1월 김대중도 ‘7대 대선’에 출사표를 던지며 합류했다. 사진은 그해 9월 신민당 후보 지명대회를 앞두고 총재 유진산 자택에 모인 40대 기수 3명과 중진들로, 왼쪽부터 김영삼·조영규·고흥문·서범석·김대중·이철승·홍익표 의원. 자료사진
그 무렵 야당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던 신민당 총재 유진오가 중풍으로 쓰러졌다. 유진오는 1969년 11월 일본으로 치료를 받으러 건너갔다. 이듬해 1월 임시전당대회에서 유진산이 신민당 총재로 선출됐다. “유진오 당수가 대통령 후보 1순위였는데 갑자기 병이 나 물러나니까 누가 야당 대통령 후보가 될 것인지를 놓고 경쟁이 벌어졌지요.” 가장 먼저 깃발을 든 사람이 신민당 원내총무 김영삼이었다. 김영삼은 1969년 11월8일 ‘40대 기수론’을 내걸고 대통령 선거에 나갈 뜻을 밝혔다. 세대교체 바람이 불었다. 이어 김대중이 1970년 1월24일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이철승도 세대교체 바람에 합류했다. 김영삼 43살, 김대중 46살, 이철승 48살이었다. 총재 유진산은 40대 기수들을 ‘정치적 미성년자’라고 부르며 그 바람을 우습게 보았다. 유진산은 자신이 대통령 후보가 될 것으로 생각했으나, 바람은 갈수록 거세졌다.

끝내 개헌 못막은 야당 ‘40대 기수’ 돌풍
1970년 1월 대선후보 지명 전 출사표
‘비주류 김대중 알리기’ 발품 지원 나서
주소도 없는 봉천동 달동네 샅샅이

“40대 대통령은 좀 이르지 않을까요?” 김대중이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가겠다는 결심을 아내에게 밝히자 이희호가 내보인 첫 반응이었다. “40대에 대통령을 하고 나면 그다음에 뭘 할 수 있겠어요? 그렇게 일찍 대통령을 할 필요는 없지 않으냐는 뜻이었지요.” 이희호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일단 남편이 뜻을 굳히자 도울 일을 찾아 나섰다.

김대중은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 출마를 선언하는 자리에서 “우리가 만일 71년에 또다시 박정희씨에게 당선을 허용한다면 이 나라는 영원히 선거 없는 총통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고했다. 이어 김대중은 “우리는 하루속히 젊고 패기에 찬, 그리고 국정개혁의 청사진이 마련된 대통령 후보를 지명해 절망에 빠져 있는 대중의 가슴에 새로운 용기와 희망의 불을 지르도록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김대중은 기자회견 끝에 한번 더 자신의 결심을 밝혔다. “나는 사명감과 신념을 가지고 절망을 모르는 시시포스의 신과 같이 최후의 승리의 날까지 싸워나갈 것입니다.” 이 마지막 말은 김대중이 자신의 미래에 던지는 예언이 되었다. 이희호는 남편의 그 도전이 이후 생사를 넘나드는 험난한 여정의 시작이 되리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김대중은 정상 바로 밑에서 굴러떨어지는 돌을 끝없이 다시 굴려 올리는 시시포스의 운명 속으로 들어갔다.

신민당 안 비주류인 김대중이 후보가 되려면 당내 열세라는 장애를 넘어야 했다. 1968년에도 총재 유진오가 지명한 ‘원내총무 김대중’ 인준 안건이 다수파인 유진산·김영삼의 반대로 의원총회에서 부결된 적도 있었다. “남편은 당원과 국민을 직접 접촉하는 방법을 써서 열세를 만회하겠다고 결심했지요.” 김대중은 전당대회가 열리기 직전까지 8개월 동안 전국을 돌았다. 이희호도 발품을 팔아가며 대의원들을 만났다. 서울의 산동네를 샅샅이 뒤졌다.

1970년 1월 신민당 대선 후보 경쟁에 뛰어든 ‘비주류’ 김대중은 9월 후보 지명대회를 겨냥해 전국을 돌며 직접 당원들을 설득했다. 같은 기간 이희호는 특히 달동네의 서민층 대의원들을 찾아다니며 남편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 사진은 그 무렵 이희호가 오르내렸던 서울의 대표적인 달동네 봉천동의 천막촌 풍경이다.   자료사진
1970년 1월 신민당 대선 후보 경쟁에 뛰어든 ‘비주류’ 김대중은 9월 후보 지명대회를 겨냥해 전국을 돌며 직접 당원들을 설득했다. 같은 기간 이희호는 특히 달동네의 서민층 대의원들을 찾아다니며 남편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 사진은 그 무렵 이희호가 오르내렸던 서울의 대표적인 달동네 봉천동의 천막촌 풍경이다. 자료사진
“주소하고 지도만 들고 대의원 집을 찾아다녔어요. 당시 야당 대의원들은 산동네에 많이 살았어요. 대다수가 농촌을 떠나 도시로 온 빈민층이었어요. 살림 형편이 안 좋다는 것을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지요.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한 분 있어서 둘이서 같이 다녔는데, 어느 날은 집을 찾지 못해 하루 종일 헤매기도 했어요. 어떤 집은 케이크, 어떤 집은 과일을 들고 가 인사드렸지요. 대의원들은 대개 집에 없고, 부인들이나 노인들이 있었어요. 그분들한테 인사하면 반갑게 맞아줬어요.”

이희호가 만난 서민들은 정이 많았다. “그분들이 친근하게 대해주니 기분이 좋았어요. 하루 종일 비탈길을 오르내려도 피곤한 줄 몰랐지요.” 국회에서도 이희호와 김대중은 서민들에게 먼저 마음을 주었다. “남편이 국회의원이 된 뒤 명절이면 국회에서 일하는 청소부 아주머니나 수위 아저씨들의 선물을 챙겨서 드렸지요.” 그 시절 김대중이 특권경제를 반대하고 대중경제를 주창한 것은 경제학 책에서 끌어낸 순수 이론의 결론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한 정서적 교감의 결과였다.

박정희에게 가장 쉬운 상대는 유진산이었다. 유진산은 그렇잖아도 야당 지도자로서 선명성이 부족해 ‘사쿠라’라는 말을 듣고 있었다. 박정희는 새로 중앙정보부장이 된 김계원에게 유진산을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만들어내라고 지시했다. 중앙정보부는 유진산을 박정희의 대선 파트너로 세우는 공작을 폈다. 거액의 정치자금이 들어갔다. 중앙정보부의 바로 그 공작이 오히려 유진산을 궁지로 몰았다. 유진산이 사쿠라 노릇을 계속하자 당내 인기가 뚝 떨어졌다. 유진산은 후보 경쟁에 나서는 것을 포기했다. 유진산이 떨어져 나가자 박정희는 “내가 어떻게 김영삼 같은 애송이와 싸우라는 말이냐”고 김계원에게 호통을 쳤다. 박정희는 신민당 주류인 김영삼이 야당 대통령 후보가 될 것이라고 보고 자기 위신에 더 신경을 썼다.

대권을 포기한 유진산은 후보를 뽑는 전당대회를 1주일 남짓 앞두고 자신에게 후보 지명권을 달라고 요구했다. 김영삼과 이철승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으나 김대중은 거절했다. 대의원의 뜻을 묻는 것이 민주주의 원칙에 맞는다는 것이 김대중의 항변이었다. 유진산은 전당대회가 열리기 전날 김영삼의 손을 들어주었다. 유진산에게서 모종의 언질을 받았던 이철승은 유진산이 김영삼을 지지하자 배신당했다고 느꼈다. 유진산의 지원까지 얻었으니 후보는 김영삼으로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인터뷰 녹취정리/유선희 인턴기자(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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