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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6·8선거 개표장, 갑자기 전기가 끊기고…일제히 손전등이 켜졌다

등록 2015-07-19 21:28수정 2017-01-09 10:19

[길을 찾아서 | 이희호 평전]
제2부 만남과 동행-8회 목포의 전쟁 (하)
‘6·8 목포 선거’의 결정적 승인은 막판 투·개표 부정 방지 대책 덕분이었다. 사진은 목포 유달초교 개표장에서 야당 참관인으로 참석한 후보 김대중(오른쪽)과 비서 권노갑(왼쪽)이 6월8일 밤 여권에서 시도한 ‘깜짝 정전과 투표함 바꿔치기’ 순간 미리 준비한 손전등을 켜고 있는 모습으로, 미국 방송사 취재진이 찍은 것이다. 사진 권노갑 전 의원 제공
‘6·8 목포 선거’의 결정적 승인은 막판 투·개표 부정 방지 대책 덕분이었다. 사진은 목포 유달초교 개표장에서 야당 참관인으로 참석한 후보 김대중(오른쪽)과 비서 권노갑(왼쪽)이 6월8일 밤 여권에서 시도한 ‘깜짝 정전과 투표함 바꿔치기’ 순간 미리 준비한 손전등을 켜고 있는 모습으로, 미국 방송사 취재진이 찍은 것이다. 사진 권노갑 전 의원 제공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의 일생을 그리는 ‘이희호 평전-고난의 길, 신념의 길’은 <한겨레>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 19번째 이야기다.

이 이사장이 걸어온 길은 20세기 초 일제강점기부터 21세기 지금에 이르기까지 90여년에 걸쳐 있다. 이 일대기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해방 전후 대학 시절과 미국 유학, 사회운동 시절을 거쳐 정치인 김대중과 만난 뒤 현대사의 파란과 굴곡을 헤쳐 나오는 시기를 모두 아우를 예정이다. 그의 삶은 일찍이 사회문제에 눈뜬 여성운동가의 삶이었고, 흔들리지 않는 신앙으로 간난신고를 헤쳐 나온 종교인의 삶이었으며, 남편과 함께 불굴의 의지로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투사의 삶이었다. 이 일대기는 매주 한번씩 진행하는 육성 인터뷰를 바탕으로 삼아 김대중평화센터와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에 보관된 개인 문서와 구술 사료, 저서, 관련 책과 지인들의 증언을 참고해 집필한다.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그 시절 가장 흔한 선거부정은
개표장을 암흑으로 만들고
표를 바꿔치기하는 것이었어요

개표장 안에는 카메라 조명·손전등
밖에서는 시민들의 응원 함성
그렇게 세 차례나 정전됐지만
부정한 손은 감시의 눈을 못 이겨

목포 선거에 공화당은 돈다발을 쏟아부었다. ‘막걸리가 강을 이루고 국수로 다리를 놓는’ 잔치판이 벌어졌다. 법정 선거비용이 730만원으로 한정돼 있었지만 집권세력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공화당이 인구 17만명의 소도시에 2억원을 퍼부었다는 말이 돌았다. 서울의 양옥집 한 채가 300만원이던 시절이었다. 이희호는 돈이 없어 쩔쩔맸다. “우리는 법정 선거비용도 다 쓰지 못했어요. 가난한 사람들이 한푼 두푼 도와줬지요.” 김대중은 연설장에서 말했다. “내가 지나가면 손에 100원, 200원을 쥐여주는 고마운 시민들이 계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은혜를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김대중의 힘은 사람들의 마음을 잡아 흔드는 연설에 있었다. 공화당의 쉴 새 없는 금권·관권 공격을 연설 하나로 막아내는 형국이었다. “저를 위해 애쓰다가 테러를 맞고, 직장에서 목이 달아나고, 나 같은 사람을 위해서 자기 돈을 써가면서 수고를 하시고, 나 같은 사람을 위해서 교회에서 절간에서 집에서 기도해주시는 수많은 애국시민에게 무엇이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 악독하고 더러운, 역사에 유례가 없는 부정선거를 극복하고 기어코 당선해서 7대 국회에 나가는 것만이 여러분에게 보답하는 길이라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연설은 유세장의 인파를 감전시켰다. 김대중은 혼신을 다해 외쳤다. “유달산이여! 네게 넋이 있다면, 삼학도여! 너에게 정신이 있다면, 영산강이여! 네게 뜻이 있다면, 목포에서 자라고 목포에서 커서 이 나라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보겠다는 이 김대중이를 한 나라 정부가 죽이고 잡으려고 하니, 유달산과 영산강과 삼학도가 넋이 있고 정신이 있고 뜻이 있다면 나를 보호해 달라는 것을 목포 시민 여러분과 같이 호소하고 싶습니다.” 말의 고압전류였다. 김대중 자신도 놀랄 지경이었다. 수만명의 청중은 후보와 함께 울고 웃었다.

연설은 청중의 심장을 지나 머리를 때렸다. 김대중은 자신의 비전을 이야기했다. 김대중이 가장 힘주어 말한 것은 분단된 나라의 통일이었다. “나에게는 비원이 있습니다. 내 소원은 돈이 아닙니다. 2억도 싫고 20억도 싫고 200억도 싫습니다. 내 소원은 이런 것입니다. 나는 신라 삼국통일 이래 처음으로 국토가 갈라져 있다는 사실을 그대로 둘 수가 없습니다. 해방 후 국토가 20년이나 분단됐다는 이 사실…, 나는 통일이 없으면 우리에게 절대로 영원한 자유가 없고 영원한 평화가 없고 영원한 건설이 없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김대중의 평화통일 염원은 20대 때 이래 평생을 일관했다.

1967년 ‘6·8 목포 선거’는 사실상 대통령 박정희를 상대로 한 승리였기에 이희호는 기쁨도 컸지만 앞날에 대한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사진은 6월9일 트럭을 타고 당선사례를 다닐 때로 김대중(뒤쪽) 앞쪽 한복을 입고 고개를 숙인 채 시민의 환호에 답하고 있는 모습이 이희호다. 사진 권노갑 전 의원 제공
1967년 ‘6·8 목포 선거’는 사실상 대통령 박정희를 상대로 한 승리였기에 이희호는 기쁨도 컸지만 앞날에 대한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사진은 6월9일 트럭을 타고 당선사례를 다닐 때로 김대중(뒤쪽) 앞쪽 한복을 입고 고개를 숙인 채 시민의 환호에 답하고 있는 모습이 이희호다. 사진 권노갑 전 의원 제공
김대중은 경제정책도 이야기했다. “나에게는 또 하나의 소원이 있습니다. 재벌을 대재벌로 만들고 국민은 더욱 가난하게 만드는 이 특권경제를 타파하고, 내가 주장하고 우리 당 정책으로 채택된 중산층과 근로대중을 중심으로 한 대중경제체제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김대중의 연설은 대통령 선거 유세를 떠올리게 했다. “내게 이 정권을 맡겨주면, 내가 정권을 가지면, 나는 오늘의 독재와 부패와 특권경제를 타파하고 이 나라 국민 전체가 잘사는 경제체제를 만들 수 있다는 소신과 포부와 확고한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김대중은 연설을 할 때마다 “민주주의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겠다”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마치 순교자가 될 각오를 한 사람 같았다. 김대중은 언제 테러를 당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유세장에서 김대중은 암살 음모를 폭로하기도 했다. “어떤 공화당 유력 간부의 부인이 암살 계획을 듣고 자기가 하느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사람을 죽인다는 이 사실에 치가 떨려서 저한테 연락을 해주면서, 어디 가서 물 한 모금 마실 때도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나는 지금 이렇게 생명의 안전조차 보장받지 못한 선거를 치르고 있습니다.” 김대중은 목숨을 내놓은 사람처럼 말했다. “여러분! 나는 결코 굴복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자유를 위해 희생할 것이라고 명백히 선언합니다. 저는 목숨을 버린 사람입니다. 목숨을 버린 사람은 겁이 없습니다.”

김대중이 목숨을 바칠 각오로 싸우자 박정희와 김대중의 ‘목포 대결’은 전체 선거판을 배경으로 밀어낼 정도로 초미의 관심사가 됐다. 과연 누가 승리할 것인가. 힘과 힘의 충돌이었다. 박정희는 무슨 일이 있어도 권력을 놓지 않겠다는 의지로 뭉쳐 있었고, 김대중은 박정희의 장기집권 의지를 무너뜨리겠다는 의지로 차 있었다. 한쪽이 민주주의를 비웃는 권위주의자이고 다른 한쪽이 권위주의와 싸우는 민주주의자라는 점에서 달랐지만, 목숨을 걸었다는 점에서는 두 사람이 다르지 않았다. 김대중이 목숨을 걸고 선거에 뛰어들었듯이, 박정희도 목숨을 걸고 한강을 건너 권력을 잡은 사람이었다. ‘목숨을 걸고’는 박정희의 심장에서 펄럭이는 깃발의 표어였다. 김대중과 박정희의 대결은 두 목숨 가운데 하나가 사라지지 않는 한 끝나지 않을 싸움이었다. 이희호는 그 싸움의 첫 회전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다. 이희호 자신이 그 싸움의 일원이기도 했다. 김대중이 폭풍 같은 말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냈다면, 이희호는 자기를 낮춤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갔다.

공화당의 작전은 조직적이고 대담
법정비용 730만원인데 2억 퍼부어
투표 전날 밤 집집마다 ○ △ ×
우리쪽 기지로 금품작전 수포
야당 투표참관인도 일대일 회유
투표 당일 전원 교체해 부정 방지

결과는 6500여표 차 김대중 승리
그러나 제7대 총선은 공화당 압승
부정선거 규탄 시위 전국으로
박정희는 “유감” 한마디로 퉁쳐

1967년 ‘6·8 총선’에서 박정희와 공화당은 노골적인 부정선거로 ‘3선 개헌을 위한 과반 의석’을 끝내 확보했다. 야당은 ‘총선 무효’를 선언하고 재선거 투쟁에 나섰고 전국의 대학생·고교생들까지 ‘6·8 선거는 쿠데타’라며 규탄 시위를 벌이자 정부는 휴교령을 내렸다.
<한겨레> 자료사진
1967년 ‘6·8 총선’에서 박정희와 공화당은 노골적인 부정선거로 ‘3선 개헌을 위한 과반 의석’을 끝내 확보했다. 야당은 ‘총선 무효’를 선언하고 재선거 투쟁에 나섰고 전국의 대학생·고교생들까지 ‘6·8 선거는 쿠데타’라며 규탄 시위를 벌이자 정부는 휴교령을 내렸다. <한겨레> 자료사진
공화당의 부정선거 작전은 조직적이고 대담했다. 여당은 유령 유권자를 만들어내 투표를 대규모로 조작하려고 했다. 유세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김대중은 3·15 부정선거 때 시민들이 들고일어나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렸던 역사를 상기시켰다.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부정선거를 묵과할 바에는 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만일 공화당이 지금 획책하고 있는 부정선거를 포기하지 않을 때에는 여기서 제2의 마산사태가 안 난다고 누가 보장할 것이냐? 나는 이렇게 여러분 앞에 외칩니다. 여러분! 나는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내 목숨을 걸겠습니다. 내가 싸우다가 죽으면 여러분은 내 시체에 꽃을 던지기 전에 먼저 제2의 최인규를 타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나라에서 부정선거의 뿌리를 뽑는 억센 투쟁을 전개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지 않고는 나는 결코 눈을 감고 죽을 수 없습니다.”

김대중의 발언은 박정희 정권에 대한 강력한 경고였다. 공화당의 부정선거 음모를 막으려면 다른 수가 없었다. 선거를 총지휘하던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현장의 분위기를 보고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했다. “각하! 이러다가 잘못하면 제2의 마산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김형욱의 보고를 받은 박정희는 결국 유령유권자 명부를 폐기하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판세가 김대중 쪽으로 확연히 기울었다. 이희호도 변화를 실감했다. “처음엔 여당에서 목포 발전 공약을 내세우니까 민심이 그쪽으로 움직였는데, 선거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우리 쪽으로 돌아섰지요.” 이제 남은 것은 투개표 부정을 방지하는 것이었다. “우리 선거캠프에 엄창록 비서가 있었어요. 이북에서 피란 온 사람이었는데 재주가 뛰어났어요. 그 사람이 부정을 막을 대책을 많이 내놓았지요.”

가장 중요한 것이 투표 전날 밤 여당의 돈봉투 살포를 막는 일이었다. “공화당 운동원들이 밤중에 통반장을 앞세우고 집집마다 대문에 백묵으로 표시를 했어요. 돈봉투를 넣을 집은 ○표, 유동표는 △표, 봉투를 주지 않을 집은 ×표…, 이렇게 일일이 표시를 해놓았는데, 우리 쪽 선거운동원들이 그 뒤를 따라가며 표시를 반대로 바꿔놓았어요. 엉뚱한 곳에 돈이 가니 혼란이 일어났어요. 그렇게 해서 투표 직전의 금품살포 작전이 효과를 거두지 못했지요.”

그다음은 투표장의 부정을 막는 일이었다. 김대중의 선거 참모들은 여당에서 야당 참관인들을 매수하려 한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참관인 매수를 막을 대책을 짰다. “우리는 야당 참관인들을 투표일 전날 한자리에 모았어요. 선거감시에 참관인이 얼마나 중요한지 역설했지요.” 이 장면을 엿본 공화당 끄나풀이 경찰에 보고하자, 여당 쪽 사람들이 이 참관인들에게 달라붙어 한 사람씩 회유했다. “우리는 이 사태를 예견하고 진짜 참관인단을 따로 꾸려 놓고, 투표 당일 야당 참관인들을 모두 교체했어요. 진짜 참관인단이 투표소가 열리자마자 자리를 차지하고 앉으니 공화당의 참관인 매수 작업이 헛일이 되고 말았지요.” 새 참관인들이 여당의 공개투표와 대리투표를 막았다.

마지막 남은 것이 개표 부정을 저지하는 일이었다. 밤늦게 유달초등학교에서 개표가 시작되었다.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표를 지켜야 한다는 이심전심의 마음으로 모인 사람들이었다. 1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보슬비가 내리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개표장 주위를 둘러쌌다. 개표 과정에서 무슨 일이 나면 그대로 일어설 태세였다. 국내외에 관심이 집중된 선거구여서 방송사와 신문사의 카메라들이 몰려들어 개표장을 주시했다.

“그 시절 가장 흔한 개표 부정은 전기를 끊어 개표장을 암흑으로 만들고 표를 바꿔치기하는 것이었어요. 아니나 다를까. 개표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전기가 통째로 나갔어요. 이런 사태가 벌어질 것을 염두에 두고 우리는 미리 가상훈련을 해두었지요.” 개표 참관인들이 엎드려 몸으로 표를 막았다. “불을 켜라.” 여기저기서 외침 소리가 어둠을 갈랐다. 그때 방송 카메라의 조명등이 일제히 켜졌다. 카메라 조명등은 개표장의 전깃불을 대신했다. 개표장 밖에 모인 시민들이 함성을 질렀다. 다시 전기가 들어왔다. 잠시 뒤 또 전기가 나갔다. 사람들은 손전등을 켜들었다. 시민들의 함성이 터져 나오자 다시 전기가 들어왔다. 그날 밤 세 번이나 정전이 일어났지만, 부정을 저지르려는 손은 시민의 함성과 카메라의 불빛을 이겨내지 못했다.

개표가 완료됐다. 유효표 5만2017표 중 김대중 2만9279표, 김병삼 2만2738표였다. 6500여표 차의 승리였다. 대통령이 직접 내려와 선거유세를 하고, 국무회의를 목포 현장에서 열고, 중앙정보부가 맨 앞에서 지휘하고, 모든 공무원 조직이 총동원되고, 막대한 돈이 뿌려진 유례없는 관권선거를 이겨내고 얻은 승리였다. 기적이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시민들은 개표장이 떠나갈 것처럼 환호성을 질렀다. “남편과 나는 트럭을 타고 다니며 감격스러운 당선 인사를 했지요.” 자신감을 얻은 김대중은 당선 인사를 하며 외쳤다. “여러분의 영웅적인 투쟁이 승리했습니다. 여러분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앞으로 대통령에도 도전하겠습니다. 한국의 김대중, 세계의 김대중이 되겠습니다.” 김대중의 눈이 더 넓은 곳을 향해 열리기 시작했다.

일정에 쫓긴 김대중은 서둘러 상경했다. 이희호는 목포에 남아 뒷정리를 했다. 전쟁 같은 선거를 치르느라 보낸 시간이 아득한 세월처럼 느껴졌다. 들뜬 마음이 가라앉자 불현듯 가슴속으로 을씨년스러운 냉기가 스며들었다. 이희호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오래 잠을 이루지 못했다. “공화당이 온갖 수단을 다 동원했는데도 패배했잖아요. 자존심이 상한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를 해코지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어요.” 상대에게 패배감을 안겨주었으니 보복을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었다.

1967년 사실상 ‘박정희와의 첫 대전’이었던 ‘6·8 목포 선거’에서 김대중(가운데)은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두고 “앞으로 대통령에도 도전하겠다”고 선언했다. 사진 왼쪽은 수행비서 이윤수이고, 오른쪽 홍익선은 민족청년단 목포 감찰부장으로 3대와 6대 때 출마해 김대중과 경쟁도 했으나 7대 때는 선거참모로 가세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67년 사실상 ‘박정희와의 첫 대전’이었던 ‘6·8 목포 선거’에서 김대중(가운데)은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두고 “앞으로 대통령에도 도전하겠다”고 선언했다. 사진 왼쪽은 수행비서 이윤수이고, 오른쪽 홍익선은 민족청년단 목포 감찰부장으로 3대와 6대 때 출마해 김대중과 경쟁도 했으나 7대 때는 선거참모로 가세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김대중은 제7대 총선의 최대 격전지에서 살아 돌아왔지만, 야당은 관권선거의 해일을 넘어서지 못했다. 선거 결과는 공화당의 압승이었다. 공화당은 전체 의석의 3분의 2를 13석이나 웃도는 130석을 차지했다. 신민당은 44석을 얻는 데 그쳤다. 선거 과정의 부정은 말할 것도 없고 투개표 과정에서도 부정이 난무했다. 신민당 당수 유진오는 6·8 총선을 ‘선거로 저지른 쿠데타’라고 규정했다. 학생들이 일어나 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벌였다. 정부는 대학교 31곳과 고등학교 163곳에 휴교령을 내렸다. 야당은 6·8 총선을 무효로 규정하고 전면 재선거를 요구하며 국회 등원을 거부했다.

민심이 거세게 요동치자 공화당은 부정선거를 비공식으로 인정하고 야당과 타협하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15~20석을 내놓겠다고 했다. 그렇게 되면 여당 의석수가 3분의 2 밑으로 떨어지게 될 터였다. “남편은 유진오 당수에게 재선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삼선개헌을 저지하는 것이 중요하니 여당의 타협안을 받아들이자고 제안했어요. 또 지방자치제를 해야 부정선거를 막을 수 있으니 이참에 지방자치제 실시를 조건으로 내걸자고 했지요.” 유진오는 전면 재선거를 요구하는 당내 강경파 목소리에 밀려 김대중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대중은 이렇게 되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시간만 허비할 것이라고 항의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야당은 5개월 만인 11월19일 등원을 결정했다. 야당은 박정희가 8월11일 “이번 선거가 문제를 남기고 끝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한 발언을 사죄로 간주하였다. 삼선개헌을 하지 않겠다는 보장도 얻지 못하고 지방자치제를 실시한다는 약속도 얻지 못했다. “우리가 걱정한 대로 되고 말았어요.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막기 어렵게 된 거지요.” 야만적 독재가 눈앞에 있는데 야당은 소리만 지르다가 기회를 놓치고 만 꼴이었다.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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