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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박 대통령의 ‘잠복기’ 없는 거부권…한국정치의 ‘자가격리’

등록 2015-06-16 19:51수정 2015-06-25 15:31

성한용 선임기자의 현장칼럼 창
국회법 개정안 이송된 뒤 거부하면 될 일인데 ‘수용 불가’ 선창
대통령 심기 살피느라 묘수풀이 골몰하는 여야 ‘자기모순’ 빠져
결국 국회는 괜한 일을 한 것 같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회법 개정안에 대해 예고한 대로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다. 민경욱 대변인은 16일 “제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한 글자’ 고쳤던데 우리 입장이 달라질 게 없다”고 했다. ‘요구’와 ‘요청’은 한 글자 차이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정의화 국회의장의 적극 중재, 유승민·이종걸 원내대표의 끈질긴 협상 등 정치복원 노력은 이렇게 무위로 돌아갔다. 국회법 개정안에 비판적이던 언론도 사설을 통해 박근혜 대통령에게 수정안을 받아들이라고 권고하고 나섰지만 머쓱하게 됐다.

박근혜 대통령이 4일 오전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박근혜 대통령이 4일 오전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앞으로 이렇게 될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메르스 사태가 가라앉는 적절한 시기를 선택해 거부권을 행사하고 법안을 국회로 환부할 것이다. 친박 의원들은 유승민 원내대표의 사퇴를 요구할 것이다. 처음부터 그게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누리당 의원들은 재의에 부치는 것 자체를 반대할 것이다. 의원들이 다 박근혜 대통령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집권 3년차에 식물정권을 만들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 혼자 승리하고 대한민국 정치는 몽땅 패배하는 그런 시나리오다. 그러고 보면 박근혜 대통령은 여전히 ‘치킨게임’의 강자다.

일이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대통령의 법률안 거부권 행사는 사실 유별난 것도 아니다. 국회가 통과시킨 법률안에 이의가 있을 때 재의결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의는 ‘생각이 다르다’는 의미다. 헌법 위반뿐만 아니라 예산이나 법률 집행에 어려움이 있어도 거부권을 행사한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13년 1월 택시를 대중교통수단에 포함시키는 ‘대중교통의 육성 및 이용촉진에 관한 법률 개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다. 개정안이 본래 법률의 입법 취지에 맞지 않는다는 점과 재정부담이 이유였다. 이 법안은 국회에서 재의를 하지 않았고 지금도 ‘부의 예정 안건’으로 계류 상태다.

박근혜 대통령은 6월1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이번 국회법 개정안은 정부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법안 내용이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법안이 이송된 뒤 그냥 거부권을 행사해 환부하면 될 일이었다. 이유는 법안을 환부하면서 밝히면 충분했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그토록 거칠게 즉각 반응한 이유가 뭘까. 내세우는 명분의 바닥에 깔린 심리 상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나만큼 국가와 국민을 사랑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애국심 독점 증후군’일까, 악당이 비련의 공주를 괴롭힌다는 ‘백설공주 콤플렉스’일까.

국회법 개정안은 박근혜 대통령이 생각하는 것처럼 잘못된 법안이 아니다. 국회법 개정안에 대해 시비가 일자 조해진 새누리당 원내수석부대표가 5월31일 의원들에게 설명 자료를 돌린 일이 있다.

“지금까지 시행령이 국회가 발의한 법이 위임한 범위를 벗어나거나, 입법 취지를 무력화시키도록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았음. 그런 이유로 현행법하에서도 국회는 각 상임위에서 시행령 수정에 대한 의견을 내고 있음.”

“다만, 개정법은 현행법상 ‘국회의 시정 의견 통보’와 ‘정부의 처리 계획 및 결과 보고 의무’를 ‘국회의 시정 요구’와 ‘정부의 처리 및 결과 보고’로 표현을 좀 더 강화하고 명확하게 한 정도임.”

조해진 의원은 “2014년 환경노동위원회의 행정입법 지적사항 27건 가운데 환경부는 22건을 수용(5건은 수정사항이 없는 지적)하기로 했고, 고용노동부는 10건의 지적사항을 모두 수용하고 조치하겠다고 했다”는 참고자료까지 덧붙였다.

따라서 “정부 시행령까지 국회가 번번이 수정을 요구하게 되면 정부의 정책 추진은 악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 결국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그리고 우리 경제에 돌아갈 것이다. 국정은 결과적으로 마비 상태가 되고 정부는 무기력화될 것이다”라는 박근혜 대통령의 말은 명백한 거짓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논리가 옳다면 현행 국회법의 관련 조항 폐지를 요구해야 마땅하다.

박근혜 대통령의 반응에 대해 의학 지식이 있는 정치인들은 ‘과민’이라고 진단하는 것 같다. 과민은 감각이나 감정이 지나치게 예민하다는 뜻이다. 그럴까? 정말 과민에 불과한 것일까? 혹시 ‘정신적·심리적 갈등 때문에 일어나는 정신신경증’이라는 뜻의 ‘히스테리’와 ‘과민’ 그 중간 어디쯤에 와 있는 것은 아닐까?

대통령 한 사람의 심리를 ‘상수’로 놓고 이를 피하기 위해 여야 지도부와 국회의장, 언론까지 나서서 묘수풀이를 해야 하는 기막힌 상황은 언제까지 계속돼야 하는 것일까?

‘야당 같은 대통령’의 파트너는 ‘여당 같은 야당’일 것이다. 이종걸 원내대표는 16일 “더 이상 불필요한 정쟁에 휘말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라고 했다. 이석현 국회부의장은 “요구와 요청은 호랑이와 고양이처럼 현저히 다른 것이다. ‘요구’는 당연하니까 내놓으라는 뜻이고, ‘요청’은 필요하니까 좀 내주세요 하는 뜻이다”라고 설명했다. 눈물겹다. 요구와 요청이 그렇게 다른 것이라면 이상민 법사위원장 말대로 ‘의안정리 사항’이 아니라 ‘번안 사안’으로 다루어 본회의를 다시 열었어야 했다. 박근혜 대통령 한 사람 거스르지 않으려고 국회와 여야가 지금 모두 스스로를 속이거나 궤변을 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다. 더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대한민국 정치가 끌려다녀서는 안 된다. 어느 친박 의원은 “원내대표는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뒷받침하는 실무책임자”라고 했다. 그게 아마 박근혜 대통령의 생각일 것이다. 이런 비정상 사고를 정상화해야 한다. 정치인들은 일곱 난장이 코스프레 같은 행동을 이제 중단해야 한다. 대통령의 잘못을 비판하고 당당하게 맞서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의 심기보다는 대한민국의 정치와 미래가 훨씬 더 소중하다.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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