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환자 격리와 치료의 최일선 현장인 서울 중구 을지로 국립중앙의료원 내 국가지정 병리 병상을 방문해 병실을 살펴보고 있다. 박 대통령이 메르스 대응 현장을 직접 방문한 것은 지난달 20일 국내 첫 확진 환자가 나온 뒤 17일 만이다. 청와대 제공
민심을 듣기보다 전문가 보고서를 선호하는 스타일 탓에
국민들의 관심사는 온통 메르스였는데 대통령에겐 ‘뒷전’
국민들의 관심사는 온통 메르스였는데 대통령에겐 ‘뒷전’
다음주의 질문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5일 오전 춘추관 브리핑을 통해 “오늘 오후에 예정됐던 통일준비위원회 민간위원 토론회 일정은 순연됐다”며 “메르스는 현 단계에서 정책 우선순위 중 가장 위에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2일에는 전남의 창조경제센터 출범식에 참석하고 3일에는 충남의 국방과학연구소 종합시험장을 방문했다. 그때까지 메르스 정책 순위는 그 뒷전이었다는 말이 된다. 반면 메르스 첫 사망자가 발생한 1일부터 국민들의 최우선 관심사는 메르스였다. 오죽하면 교육에 목숨 거는 대치동 학부모들이 요구해 3일부터 학교를 휴업(휴교)하고 학원 문을 닫았을까.
대통령이 느끼는 메르스의 위기감과 국민들이 느끼는 위기감은 왜 이리 큰 차이가 있을까. 청와대의 메르스 대응은 왜 그리 굼뜨고 느렸을까. 이를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가 박 대통령의 ‘서면보고 원칙’과 ‘전문가 중심주의’다.
박 대통령에게 메르스가 첫 보고됐을 당시 상황을 추정해 봤다.(왜냐면 청와대는 이런 기본적인 상황까지 보안에 부치고 설명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메르스 첫 환자가 확진된 5월20일, 박 대통령은 서면으로 그 내용을 보고받았을 것이다. 세월호가 가라앉고 있는 상황에서도 대면 보고를 받지 않았던 박 대통령이었으니. 그 보고서에는 ‘메르스는 전염성이 낮아 크게 우려할 상황은 아니다’라는 전문가의 평가가 있었을 것이다. 주무부서인 보건복지부의 판단이 그러했으므로. 박 대통령이 5월26일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누구 입에서도 메르스의 ㅁ자도 나오지 않은 이유는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박 대통령이 처음 메르스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1일 오전 10시 수석비서관회의 자리였다. 박 대통령은 그때까지 15명의 메르스 환자들이 발생했다고 말했다. 그날 오전 6시40분에 보건복지부가 18번째 메르스 환자가 발생했다고 발표했지만, 대통령은 이를 모르고 있었다. 대통령이 환자 숫자를 틀린 것은 전날 받은 서면보고를 기준으로 했기 때문일 것이다. 회의 시작 전 담당인 보건복지 비서관의 대면보고만 받았어도 생길 수 없는 일이었다.
박 대통령의 늦은 대응을 부추긴 또다른 요소는 ‘전문가’ 중심주의다. 청와대는 메르스 대책을 마련하자며 3일 여당이 요구한 당정청 협의회 개최를 “현 단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거부했다. 청와대는 이날도 당정청 협의회 개최는 없을 것이라고 거듭 확인했다. 자신에게 반기를 든 유승민 원내대표의 의견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대통령의 오기와 ‘대책 마련은 전문가가 하는 것’이라는 대통령의 생각이 녹아 있는 답변이었다. ‘정치인들이 메르스에 대해 뭐를 안다고…’ 하는 생각이다.
당정청 협의는 본질적으로 당에서 국민들의 민심과 목소리를 정부와 청와대에 전달하고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자리다. 민심의 흐름을 포착하는 데 동물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는 것이 정치인들이다. 다가오는 위기를 느끼고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라고 외치는 것이 정치인들의 몫이다. 그러나 그렇게 직접 듣는 목소리보다 보고서를 더 선호하는 것이 대통령의 방식이다.
메르스에 대한 대응을 보면서 세월호의 악몽이 떠올랐다는 말이 여당 국회의원 입에서 나오는 이유는, 박 대통령의 이런 스타일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를 겪고서도 그런 스타일을 바꾸지 않은 박 대통령이 메르스를 겪으면서 바꿀 것 같지는 않다. 그 피해는 우리 국민이 입는다.
이태희 정치부 정치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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