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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사회 참여로 연극 몰두…선 굵은 연기에 ‘남자’ 역 도맡아

등록 2015-05-10 20:52수정 2017-01-09 10:13

[이희호 평전] ⑥ 제1부 학업시대-5회 연극배우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의 일생을 그리는 ‘이희호 평전-고난의 길, 신념의 길’은 <한겨레>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 19번째 이야기다.

이 이사장이 걸어온 길은 20세기 초 일제강점기부터 21세기 지금에 이르기까지 90여년에 걸쳐 있다. 이 일대기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해방 전후 대학 시절과 미국 유학, 사회운동 시절을 거쳐 정치인 김대중과 만난 뒤 현대사의 파란과 굴곡을 헤쳐 나오는 시기를 모두 아우를 예정이다. 그의 삶은 일찍이 사회문제에 눈뜬 여성운동가의 삶이었고, 흔들리지 않는 신앙으로 간난신고를 헤쳐 나온 종교인의 삶이었으며, 남편과 함께 불굴의 의지로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투사의 삶이었다.

지난해부터 준비해온 이 일대기는 매주 한 번씩 진행하는 육성 인터뷰를 바탕으로 김대중평화센터와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에 보관된 개인 문서와 구술 사료, 저서, 관련 책과 지인들의 증언을 참고해 집필한다.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메시지 담은 예술 매력에 빠져
통학열차 안에서 즉석 연극도
“잘 웃지 않는 이범석 장군도
이희호 연기 보곤 폭소 터뜨려”

5살 위 강원용 목사 만나고 난 뒤
기독교학생운동에도 뛰어들어
‘신인회’ 창설땐 핵심 중 핵심 참여
훗날 DJ 신랑감 면접도 그에게 부탁

이희호의 젊은 날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남장 배우 이희호’다. 특히 서울대 사대 시절 연극 <이수일과 심순애>에서 ‘이수일 역’으로 인기가 높았다. 사진은 1946년 12월 사대 동기생들과 안양에서 연말 고아돕기 기금마련 공연을 마친 뒤 찍은 것인데 작품 제목은 확인되지 않았다. 뒷줄 왼쪽 넷째 벙거지 모자 차림이 이희호다.
이희호의 젊은 날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남장 배우 이희호’다. 특히 서울대 사대 시절 연극 <이수일과 심순애>에서 ‘이수일 역’으로 인기가 높았다. 사진은 1946년 12월 사대 동기생들과 안양에서 연말 고아돕기 기금마련 공연을 마친 뒤 찍은 것인데 작품 제목은 확인되지 않았다. 뒷줄 왼쪽 넷째 벙거지 모자 차림이 이희호다.
사범대 학생 시절 이희호가 특히 몰두한 것이 연극이었다. 연극은 이화고녀와 이화여전에 다닐 때도 열심히 했지만, 이 시기에 이희호는 연극을 단순한 문화적 취미 활동을 넘어 사회적 참여 활동으로 삼았다. 당시 연극은 대중적 예술 장르이자 정치적 선전 도구였고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유용한 미디어였다. 이희호뿐만 아니라 많은 대학생·젊은이들이 연극 활동에 뛰어들었다. 이희호는 무대의 좋고 나쁨을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는 통학열차 안에서 즉석 연극을 하기도 했다.

“둘째오빠가 의사로 개업을 해서 안양역 근처에 살았는데, 거기에 한동안 얹혀살면서 통학을 했어요. 기차로 서울역까지 와서 학교로 갔지요. 그때 통학열차 안에서 승객들을 관객 삼아 연극을 했어요. 어떤 내용으로 연극을 했는지, 몇 사람이 같이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혼란한 시절이라 피난민 돕기 모금을 하는 차원에서 했던 것 같습니다.”

이희호는 어느 배역이든 맡는 대로 소화했지만, 연기의 선이 굵어서 남장을 하고 남자 역을 많이 했다. 이희호의 연기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당시 조선민족청년단에서 활동하던 서영훈의 증언이 생생하다. 서영훈은 1948년 여름 조선민족청년단 중앙훈련소 제2기 여성반 훈련 때 본 것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특별히 인상 깊었던 일은 훈련생들이 큰 밤나무 밑에 가설무대를 만들어 놓고 <이수일과 심순애> 연극 공연을 할 때 있었던 일이다. 심순애 역은 서울대학교 법대에 재학 중이던 황윤석씨가 맡았고 이수일 역은 이희호씨가 맡았는데, 이희호씨의 그 대사, 연기력이 놀라울 만큼 뛰어났다. 이범석 장군을 비롯하여 여성 지도자들, 안춘생·장준하 선생과 훈련생 200여명이 청중으로 앉았는데, 그때 이희호씨와 황윤석씨의 연기는 큰 인기를 얻었고 나에게도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다. 알고 보니 대본은 이희호씨가 손수 썼고, 그 활발 명쾌했던 연기는 프로를 능가하는 것이어서 모든 사람을 감탄케 하였다.”

조선민족청년단(족청)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광복군 참모장 출신의 이범석이 1946년 6월 귀국해 만든 민족주의 청년운동 단체였다. 처음에 30명에서 시작해 창립 2년 만에 120만명의 단원을 거느린 전국적인 조직이 됐다. 초기에는 민족주의 의식이 강한 청년들이 많이 참여했다.

“나는 그때 민족청년단에 깊이 관여한 것은 아니었어요. 서울대 문리대에 다니던 친한 친구가 ‘여름방학 동안 놀지 말고 민족청년단 훈련에나 가자’ 해서 같이 갔던 거예요. 가보니 훈련이 한창이었어요. 나머지 시간 동안 훈련을 받았고 마지막에 연극하는 시간이 있어서 <이수일과 심순애>를 한 거지요.”

민족청년단 단장 이범석은 잘 웃지 않는 근엄한 사람이었는데, 이희호의 연기를 보고는 참을 수 없어서 폭소를 터뜨렸다고 서영훈은 기억한다. 이희호 주연의 <이수일과 심순애>는 다른 곳에서도 여러 차례 무대에 올랐다. 말하자면 <이수일과 심순애>는 ‘연극인’ 이희호의 레퍼토리 가운데 하나였다.

민족청년단 훈련소에서 심순애 역을 맡은 황윤석은 1952년 제3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해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판사가 됐다. 이때의 인연으로 두 사람은 나중에도 절친한 관계를 유지했다. 황윤석은 이희호를 멘토로 여겨 결혼 뒤에도 고부갈등 같은 집안문제를 상담하기도 했는데, 애석하게도 서른두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서울대 재학 시절 이희호는 기독교청년학생운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학도호국단 활동은 학생 신분인 이상 의무적으로 한 것이고 민족청년단은 일시적으로 참여한 정도라면, 기독교학생운동은 이희호가 열정을 바쳐 뛰어든 주요 활동 영역이었다. 이 시기에 이희호를 기독교학생운동으로 이끈 사람이 경동교회의 강원용이었다. 강원용은 이희호와 처음 만나던 장면을 다음과 같이 떠올렸다. 이희호는 독특한 자기소개로 강원용의 눈길을 끌었다.

“1946년 아니면 1947년이었다고 기억한다. 당시에 나는 기독학생운동을 일으켜 전국의 대학과 고등학교를 순회하며 강연을 했다. 어느 날 강연이 끝난 후 학생들과 모여 앉아 대담을 하게 되었고 학생들이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했다. 그런데 모여 앉아 있던 학생들 중에 한 여학생이 자기소개를 하기 전에 ‘히히호호’ 하며 크게 웃었다. 나는 왜 저렇게 웃는가 했더니 그 여학생 말이 제 이름이 ‘희호’이기 때문에 ‘히히호호’ 하고 웃는다고 했다. 나는 그 여학생의 재치있는 자기소개와 밝은 성격에 끌려 그를 따로 만났다. 그것이 이희호와 나의 만남의 시작이었다.”

이희호보다 다섯살 위였던 강원용은 해방정국에서 대단한 웅변으로 정치지도자들의 관심을 끌고 대중들의 사랑을 받던 청년 운동가였다. 함경남도 이원군에서 태어난 강원용은 열여섯살에 기독교에 입문해 독실한 크리스천이 됐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경찰에 잡혀가 혹독하게 당한 터라 친일파라면 이를 갈았다. 해방 뒤 공산주의자와 소련군의 무법적 행태에 질려 월남한 뒤 반공을 원칙으로 삼았다. 친일파도 배척하고 공산주의도 반대했던 강원용은 처음에는 우파 민족주의 계열 이승만·김구·김규식을 모두 존경하고 따랐다. 그러나 이승만이 친일파를 가까이하고 권모술수를 부리는데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것에 배신감을 느껴 이승만을 떠났다. 강원용은 김규식과 여운형 중심의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국가 건설이 민족의 살길이라 보고 그 일을 성사시키는 데 힘을 쏟았다. 또 그 자신은 우파에 속하면서도 통 큰 좌파 지도자 여운형을 흠모했다.

서울대 사범대 강연 뒤 강원용은 이희호와 자주 만났다. 강원용이 여러 대학과 고등학교 학생 중에서 핵심 인재를 뽑아 ‘신인회’(新人會)라는 기독교학생운동 조직을 만들었을 때 이희호는 ‘핵심 중의 핵심’으로 참여했다. 신인회는 기독교학생운동의 중추 구실을 했다. 1947년에 결성된 한국기독학생총연맹(KSCF)도 경동교회의 신인회 멤버들이 주축이었다. 강원용은 경동교회를 수시로 드나드는 이희호를 친동생처럼 대했다.

“나는 그 당시 경동교회 안에, 아래위에 방 한 칸씩인 초라한 사택에서 가족과 함께 하루에 옥수수죽 두 끼를 먹으며 살고 있었다. 참 어렵던 시절인데 그(이희호)는 우리 집에도 허물없이 찾아와 옥수수죽을 함께 먹으며 한 식구처럼 가깝게 지내게 되었고, 나의 두 딸은 그를 ‘고모’라고 부르게 되었다.”

강원용의 강연이 학생들에게 큰 인기를 얻자 여러 군데서 강연 내용을 책으로 써 달라는 요청이 밀려들었다. 1949년 여름 강원용은 다른 일을 제쳐두고 집필에 들어갔는데, 이때도 이희호는 강원용이 책을 완성할 때까지 옆에서 도왔다.

“글은 원고지에 써야 하는데 내 글씨가 하도 악필이어서 내가 쓴 글을 나도 읽을 수 없었다. 이런 뜻을 안 이희호씨는 원고 정리는 자기가 책임질 테니 걱정 말고 책을 쓰라고 해서 그의 도움으로 1949년에 <새 시대의 건설자>를 펴내게 되었다.”

강원용과 이희호의 인연은 그 뒤로도 오래 이어졌다. 한국전쟁이 난 뒤에는 부산에서 만나 기독교학생운동을 재건하는 데 힘을 합쳤다. 1962년 이희호가 김대중의 청혼을 받았을 때 김대중의 ‘면접’을 본 사람도 강원용이었다. 강원용은 김대중을 만나본 뒤 이희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생각에 그와 결혼하면 보통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정치적으로 매우 야심있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소질도 있는 사람이라고 본다. 한국 같은 사회에서 유능한 정치가의 길이란 매우 험난하고 시련이 많은 가시밭길일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사회활동에 능한 사람이니 정치가의 내조자로서 사는 데 보람을 느낄 수 있다면 결혼하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한다.”

강원용은 1980년 신군부가 김대중에게 내란음모 혐의를 씌워 사형선고를 내렸을 때 대통령 전두환에게 국정자문위원을 맡을 테니 김대중을 살려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제5공화국은 당시 사회에서 존경받는 사람들을 끌어들여 쿠데타와 광주학살의 죄를 덮으려고 했다. 자기 이름이 더러워지는 걸 각오하고 김대중 구명에 나설 만큼 강원용이 이희호와 맺은 인연은 각별했다.

“배움에 힘쓰면서 민족 미래 열자”
대학생리더 모임 ‘면학동지회’ 주도
결성식 뒤 경교장 달려가 김구 면담

1950년 5월 마침내 대학 졸업 후
유학 준비하던중 한국전쟁 터져

1947년 12월13일 이화여중 강당에서 서울대·연세대·이화여대 재학생 대표 33명으로 결성된 면학동지회는 대표적인 우익 청년 조직으로, 이희호가 가장 열성을 기울인 단체였다. 사진은 면학동지회 결성 직후 백범 김구 선생을 방문해 경교장에서 기념촬영을 한 모습으로 앞줄 왼쪽 둘째가  이희호다.
1947년 12월13일 이화여중 강당에서 서울대·연세대·이화여대 재학생 대표 33명으로 결성된 면학동지회는 대표적인 우익 청년 조직으로, 이희호가 가장 열성을 기울인 단체였다. 사진은 면학동지회 결성 직후 백범 김구 선생을 방문해 경교장에서 기념촬영을 한 모습으로 앞줄 왼쪽 둘째가 이희호다.
사범대 시절 이희호의 또다른 활동 공간은 ‘면학동지회’였다. 면학동지회는 1947년 겨울 각 대학의 학생 리더들이 뜻을 합쳐 만든 모임이었다. 좌우익 갈등에 학교가 휩쓸리던 시절에 배움에 힘쓰면서 민족의 미래를 열어가자는 것이 창립 취지였다. 그해 12월13일 이화여중 강당에서 결성식이 열렸다. 대학생 33명이 모여 시대의 엄혹한 분위기가 배어든 비장한 선언문을 낭독했다. “우리는 면학동지회의 한 사람으로 불같은 조국애와 동지애를 가지고 새나라 건설을 위해 같이 배우고 같이 일하고 같이 죽기를 엄숙히 선언한다.” 이 자리에는 이범석·안호상을 비롯해 정치·교육계의 거물들이 참석하고 미국·영국·중국의 외교사절들이 축하전문을 보내왔다. 꽤나 주목도가 있는 모임이었다.

눈에 띄는 것은 면학동지회 결성식이 끝난 뒤 회원들이 다 함께 경교장으로 달려가 백범 김구를 만났다는 사실이다. 백범을 가운데 두고 면학동지회 사람들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 자리에 대학생 이희호도 있었다. 면학동지회 회원들이 김구를 방문한 그때는 김구가 이승만과 최후의 결별을 할 무렵이었다. 1945년 11월 충칭(중경) 임시정부 각료들을 데리고 환국한 김구는 이승만과 함께 우익 정치 노선을 걸었다. 김구는 좌우합작에 거리를 두었고 신탁통치를 집요하게 반대했다. 이승만이 극우로 치달으며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할 때도 이승만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러나 1947년 12월초 한민당 거두 장덕수 암살 사건이 터진 뒤 이승만이 김구를 배후로 지목하자 김구는 더 참지 못했다. 이때부터 김구는 이승만의 단독정부 노선을 맹비난하고 남북협상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희호가 면학동지회 회원들과 함께 경교장을 방문한 날은 이런 정치적 대전환이 막 이루어지던 참이었다.

김구는 1948년 2월10일 ‘삼천만 동포에게 울며 고함’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통일하면 살고 분열하면 죽는 것은 고금의 철칙이니 (…) 삼천만 자매형제여! 마음속의 38선이 무너지고야 땅 위의 38선도 철폐될 수 있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김구 일행은 그해 4월19일 남북협상을 하러 북행길에 올랐다. 경교장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북행을 반대하자 김구는 군중에게 호소했다. “이대로 가면 한국은 분단될 것이고 서로 피를 흘리게 될 것이다.” 김구는 경교장 뒷담을 넘어 북으로 향했다. 그러나 김구의 북행은 너무 늦은 결단이었다. 남북협상은 사실상 아무런 소득 없이 끝났고 남한은 5·10 총선을 강행해 단독정부를 수립했다. 김구는 1949년 6월26일 암살당하고 한반도는 동족상잔의 비극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김구의 죽음 앞에서 이희호는 오랫동안 울었다.

서울대 사대 시절부터 부산 피난지로 이어진 면학동지회 활동은 이희호의 인생에 중요한 인연의 고리가 됐다. 사진은 1949년 여름방학에 면학동지회에서 충남 대천해수욕장으로 수련회를 갔을 때로, 둘째 줄 맨 오른쪽 모자를 손에 든 이가 이희호다.
서울대 사대 시절부터 부산 피난지로 이어진 면학동지회 활동은 이희호의 인생에 중요한 인연의 고리가 됐다. 사진은 1949년 여름방학에 면학동지회에서 충남 대천해수욕장으로 수련회를 갔을 때로, 둘째 줄 맨 오른쪽 모자를 손에 든 이가 이희호다.
그 시절 장차 이희호의 남편이 될 김대중도 시국의 흐름을 주시하고 있었다. 김대중은 해방 직후 여운형이 결성한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해 목포지부 선전과장을 맡았다. 그 뒤 좌우합작을 표방하는 조선신민당에 가입했다가 당내 공산주의자들과 갈등을 빚은 끝에 탈당했다. 이후에도 청년 김대중은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정부 수립에 모든 희망을 걸었다. 분단을 막고 전쟁을 피하려면 중간파가 주도하는 좌우합작 말고 다른 길이 없었다. 미군정청 사령관 존 하지도 좌우합작에 기대를 품고 있었다. 이희호가 그 시절에 따르던 길도 민족주의적 열정을 동력으로 한 김구의 남북협상 노선이었다. 그러므로 뒷날 이희호와 김대중의 만남은 해방정국의 좌우합작과 남북협상 노선의 만남이기도 했다. 두 사람의 만남 속에 깃든 남북화해와 평화통일 정신은 40년 뒤 남북정상회담으로 이어진다.

시절이 어지러웠지만 이희호는 마지막 학년에 졸업논문을 쓰느라 바빴다. 논문 주제를 ‘가이던스’(교사의 학생 지도)로 잡고 겨울방학 내내 미국공보원에 가서 거기 있는 책들을 참고삼아 논문을 완성했다. 1950년 5월 이희호는 서울대 사범대학을 졸업했다. 28살이었다. “나는 결혼에는 흥미가 없었고 공부를 더 계속하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유학을 염두에 두고 이희호는 미국공보원 부설기관 이티아이(ETI, English Teaching Institute)에 등록했다. 영어교사·언론인·공무원·군인 60명과 함께 1년 동안 영어를 배우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러나 이희호는 한달도 채 다니지 못했다. 전쟁이 터진 것이다.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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